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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눈을 밝게 하소서-이성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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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 3:3) 사람의 지체 중에 눈이라 하는 것은 제일 요긴한 것이다. 사람의 뇌에 기억되는 지식 가운데 3분의 2가 눈으로 들어온 것이라 한다. 귀로 듣는 것은 인상이 퍽 미약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단상이 강하고 그 인상된 것이 우리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도 대개가 눈이란 지체를 통하여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와는 눈을 통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다윗도 눈을 통하여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다윗은 이 쓰라린 경험을 한 후에 눈동자같이 나를 보호해 주소서, 내 눈을 밝게 하사 죽음의 잠을 자지 말게 하소서하는 등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대한 교훈을 반드시 배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는 삼종이 있다는 것이다. 육안(肉眼), 지안(智眼), 영(靈眼)이다. 육안과 지안 육안으로는 물건의 형체와 대소 장단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며 색의 청·황·적·흑·백을 분별한다. 육안 속에는 지혜의 눈이 있는데 이는 동물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 시설이 다 지혜의 눈에서 나온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비행기를 발명한 미국 라이트(Wright) 형제나, 차관의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기차를 발명한 스티븐슨(Stephenson)이나, 나무에서 과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 인력을 발견한 뉴턴(Newton)이나, 번개를 보고 무선 전신을 발명한 마르코니(Marconi)나, 전기·전화를 발명한 에디슨(Edison) 등은 다 지안(智眼)에서 나온 것이다. 영안 사람에게는 영안이 있는 것인데 이 영안으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즉 우리 눈앞에 보이는 만물을 보아서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창조하심으로부터 그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곧 그의 영영한 하나님의 능력과 신인데, 그것은 그 지으신 만물로 보아 알지니, 그러므로 사람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지 못함은 그 지으신 만물로 보아 절대로 핑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그 책을 읽고서 저자의 사상을 알 수 있고,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림을 보 그린 사람의 심경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광대한 우주의 법칙이라든가 광대(宏大)하고도 지극히 조밀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든가 공정(公正))하고도 자비로운 자연 원칙 등을 볼 때에 그 복잡한 세상을 한 가지 진리로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런즉 우주는 하나님을 스스로 보여 주고 있다. 예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하신 말씀은 이러한 생물계와 자연계를 보아서 조물주를 알 수 있지 않으냐 하신 뜻이다. 그뿐인가! 다윗의 시를 읽어보자.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궁창은 저 날에게 말을 전하고 이 밤이 저 밤에게 지식을 베푸는도다 방언도 없고 말도 없으니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도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이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다윗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궁창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았고, 방언도 없고 말도 없으나 천하에 충만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자기를 발견함 이는 자기가 무엇보다도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먹고 입고 번식하는 것만 생의 전부로 삼는다면 다른 동물에 비하여 귀할 것이 없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수원 권업 모범장에 가서 개량 돼지를 보았다. 이는 아메리카에서 천여 환을 주고 사온 종돈(種豚)인데 대단히 잘 먹여 길렀다. 따뜻한 양지쪽에 호불 좋게 누워서 졸고 있는데 어떻게 비대(肥大)하던지! 다른 칸을 다시 가 보았더니 암놈들 7-8마리가 있는데 새끼를 배서 독같이 부른 배를 안고 있고, 또다시 다른 칸을 가서 보니 몇 달 전에 젖 떨어진 베개 통 같은 새끼 돼지들이 우르르 하고 쏟아져 나오는데 자손창성(子孫創成)이로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 좀 우스운 말로 혼자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처음에 본 그 돼지가 팔자도 좋다. 사람이 만일 식색만 위하여 사는 동물이라면 저 돼지 팔자만 못하겠구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잘 먹을까 잘입을까 좋은 첩을 끌어들일까 하고 걱정이나 하지만 돼지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이상의 세 가지 만족을 채우고 있으니 그것이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복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활이 자기 배나 채워서 기름지고 축첩을 많이 하여 만족을 채우는 것뿐이라면 이 돼지보다 낫다는 점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하는 말이다. 사람이 비록 존귀한 데 거하나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금수와 같으니라 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먹고 마시고 안일과 향락으로 생의 전부로 삼는 것이 아니다. 영혼을 소유한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이 존귀하다는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혼이 있으므로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있어야 사람의 생활 중에서 귀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이 헛된 것을 깨달음 명안이 밝은 사람은 인생의 존귀를 발견하는 한편에 또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요, 세상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땅에 있으면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한 것은 더욱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함이니 이 말은 천국에 목적을 주고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건전한 인생관을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으니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꽃을 볼 때는 두 가지 마음을 갖게 된다. 첫번째는 좋은 마음이요 두번째는 슬픈 마음이다. 왜 아침에 피는 꽃을 볼 때는 기쁘지만 저녁에 시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또한 슬픈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인생이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성공의 아침을 기뻐하였더니 어느덧 실패의 저녁이 돌아오고, 청년 시절을 아직 기뻐하기도 전에 벌써 백발은 찾아온다. 이것은 인생의 영고성쇠도 꽃과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꽃이 먼저 좋은 맘을 주고 그 다음은 슬픈 맘을 주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먼저는 기쁜 듯하다가도 슬픈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인생관은 그것만이 아니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나니라 한 것을 보아서 저는 건전한 인생관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고금 세계 천만 사정이 꽃과 같이 변한다. 춘삼월에 이는 저 꽃도 십 일의 단명을 한탄하고 있으니 산다 하면 늘 살까 사람 살기 백년 가기 잠깐이라 됫동산 한 무덤 이를 적에 일생 수가 흔적이 없고나 가고 오는 이 세상은 무심하기 짝이 없네 부와 귀로 호화함이 인생의 낙(樂) 그것이냐? 아! 인생의 낙이 그것이냐? 지혜로운 자야 예수께 와서 영생을 얻으라. 하갈의 눈을 밝게 하사 샘물을 보게 하심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축출을 당한 하갈이 자기 몸에서 난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느라고 간 곳이 광야에 이르렀다. 나올 때에 가지고 온 물과 양식은 떨어진 지 오래되니 드디어 아들 이스마엘은 탈진이 되어 사막 벌판에 넘어졌다.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주린 솔개가 공중에서 엿보고 있는 이 장면은 정말 비참했을 것이다. 하갈의 말로가 역시 우리들의 인생관이다. 인생들은 모두가 촌음(寸陰)에 걸린 생명을 생각하고 광야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에 하갈은 눈이 밝아 자기에게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서 생수를 발견하였다(창 21:19). 생수를 두고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 앞에는 쉽게 마실 수 있는 영생수가 있건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울고 있으며 또한 죽어 가는 영혼이 많다. 우리 눈을 열어 생수의 근원 되는 예수를 바라보라! 우리를 살릴 생수가 그곳에 흐르고 있다(요 4:10). 사마리아 여인의 눈을 밝게 하심 사마리아 여인은 영의 눈이 어두워서 우물가에 앉으신 메시아를 몰랐다. 예수께서 여인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시니 여인은 말하기를 당신이 유대인이 되어 어찌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느냐 하고 유대인 남자가 자기를 천시(賤視)하는 것을 하소연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말을 몇 마디 주고받는 동안에 청천 벽력도 분수 있지 천만 뜻밖에 자기의 숨기고 있었던 과거 비밀 생활을 벌컥 뒤집어놓았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라 하시니, 그때부터 비로소 자기 죄악 생활에 대한 가책의 싹이 트기 시작하여 돌아서서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돈 잘 쓰던 김서방, 지식 많던 지서방, 글 잘 쓰던 문서방, 권세 좋던 권서방, 허랑 방탕 허서방, 과거에 짝했던 남편 수를 막상 결산을 짓고 나니 자기 속을 뚫고 보시는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이 가라사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고 자복을 하였으니, 이 여인의 눈이 점점 밝아짐에 따라서 예수를 깨닫는 지식이 점점 깊어갔다(요 4:25-26). 처음에는 유대인의 남자로, 그 다음에는 선지자로, 그 다음에는 메시아로, 메시아로 알아질 때에는 물동이를 버리고 성으로 뛰어 들어가서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어제의 음부 탕녀가 생수를 발견한 즉시로 돌연 전도 부인이 되지 않았는가! 지식이 없느니, 경험이 없느니 하고 교회의 책임을 피하는 신자나 남에게 전도하지 않는 벙어리 신자가 왜 있게 되는가? 이는 사마리아여인 같은 변화가 없고 그 속에 생수가 없는 까닭이다. 당시 야곱의 우물을 길어다 먹고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먹고 나면 잠시 후에 또다시 목이 갈하여 일평생 목마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생수의 근원 되신 메시아를 만날 때에 영원토록 갈급이 없는 생수가 맘속에 솟아난 것이다. 오늘날 교인을 보면 그 생활은 남이 떠다 주는 물만 마시는 생활을 하고 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목사가 떠 주는 물을 한 컵 마시고 사경회 때에 강사가 떠 주는 물이나 한 사발 마시고 만다. 그럴 것이 아니고 생수 되신 예수를 심령에 모셔들여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는 생애를 보내야 할 것인데, 이는 믿는 자가 성신을 받을 것을 말한 것이다. 발람의 눈을 밝게 하심 발람이라는 예언자가 뇌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나귀를 타고 나갔다. 발람은 세력과 금전 앞에 나약한 선지자였다. 저가 처음에 거절한 것을 보면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나 뇌물을 가지고 여러 번 찾아올 때에 겨우 거절 비슷한 대답은 하였으나 뇌물에 미련은 끊을 수가 없었다. 가급적 가 보았으면 하는 심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막는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가라고 방임(放任)하셨다. 오늘날 신자는 방임과 허락을 분간 못하고 하나님께 허락이나 받은 듯이 덤비다가 실패하는 일이 많다. 발람이 얼싸 좋구나 하고 나귀를 재촉하여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달리는 도중이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선지에게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천사로 하여금 불칼을 가지고 발람의 길을 막았던 것이다. 나귀가 가지 못하니 뇌물에 눈이 먼 발람은 채찍으로 나귀만 때렸다.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시니, 그때에야 발람의 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의 불칼을 본 것이다. 이것은 징계의 칼날이니 우리도 눈을 열어 징계의 칼날을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무순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할 때에 들은 이야기다. 어느 교회에 집게벌레 집사라는 별명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주일날 예배 드리러 가지 않고 마당에 누워서 낮잠만 자다가 집게벌레 한 놈이 귓속으로 들어가서 귀청을 물고 늘어지니까 갑자기 일어나서 깡총깡총 뛰어 돌아가면서 하나님, 한번만 용서해 주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다. 그 후에 벌레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나와 버리고 이 사람은 정신을 차리게 되어, 그만 그 걸음으로 교회에 가서 회개하고 그 교회의 집사가 되어 지금까지 열심으로 교회에 봉사하여 별명이 집게벌레 집사라 한다. 하나님은 벌레를 통해서라도 타락한 심령을 고치셨다. 나는 모친의 인도로 6세부터 교회에 나갔다. 그러다가 18세 되던 해부터 그만 마귀의 꾐에 빠져서 난봉 생활을 하게 되었다. 모친이 마음 아프게 권하는 말씀에 반하여 나는 더 재미있게 난봉 생활을 하면서 40세나 지나거든 또 믿겠다고, 이런 난폭한 대답을 하였다. 때는 여름이었다. 부친이 팔아 오라는 실과를 가지고 평양성에 들어가서 팔아 그 돈을 가지고 방탕히 돌아다니며, 그 돈을 다 허비해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돌연히 골막염 병이 발하여 기자묘 앞에서 거꾸러졌다. 이것이 6월 24일이었다. 그때부터 병이 들어서 3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석에 누웠다. 종시 낫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게 될 21세 되던 7월 3일에 다 죽어 가는 나에게, 병상에 누운 고통의 심령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봉아, 너는 죽을 터인데 지옥이 없다면 다행이거니와 만일 지옥이 있고 보면 그 형벌을 어찌하자는 말이냐? 하는 음성을 듣고서, 나는 곧 죽을 준비로 어머니 앞에 과거의 죄를 낱낱이 자복하였다. 아! 나는 이 징계의 칼날 앞에서 그만 회개치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하여 목적이 계신 고로 그때 내 영혼을 거두지 않으시고 살리신 것이다. 지금도 내 몸에 이 징계의 흔적을 짊어지고 다니는데, 이 흔적을 볼 때마다 감사의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을 과한 실수 없이 주의 역사를 받들어 온 것도 그때에 징계의 칼날이 아니었던들 하는 생각이 나는 것이다. 눈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보게 하심 아람 왕이 이스라엘 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아람군의 작전 계획이 자꾸만 탄로가 나서 실패를 하게 되었다. 아람 왕은 선지자 엘리사가 이 비밀을 알아내는 줄로 알고 아람 군대를 명하여 엘리사를 포위했던 것이다. 엘리사의 하인인 한 소년이 이것을 발견하고 선생님께 고하며 무서워 떨고 있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이 소년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니 이 소년의 눈에 하나님 군대인 불말과 불수레가 가득히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왕하 6:17) 우리는 환경이 악한 것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보호하려고 둘러 서 있는 것을 보아야 하겠다. 옛날에 아합과 바알에 굴하지 않든 엘리야도,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사람에게 굴하지 않던 다니엘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까지 용감스럽게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보았던 까닭이라고 믿는다. 두 제자의 눈을 밝게 하심 당시 예루살렘과 온 유대국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를 사형한다는 문제로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소요가 있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한 후에도 소요했던 민심이 좀 잔잔해진 듯했다가 예수의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시 인심이 수근거리기 시작하였다. 먼저는 예수를 죽이자고 소동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인심에 큰 공포가 일어났다.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는가, 그가 말하던 대로 정말 부활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긴장하였을 때 일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해 가면서 서로 상담하고 있었다. 아직도 저들은 선생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비장한 장면만 생각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나 제자들의 눈이 혼미하여 선생님을 알지 못하였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의 심령의 눈은 이와 같이 혼미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하고 슬피 울며 예수님의 시체를 찾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고 당신이 동산지기냐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거기를 지나서 예수님의 부활에까지 나가지 않으면 눈이 혼미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의 신앙을 깨우셨다. 어리석은 자여 선지자의 모든 말을 더디 믿는 자로다 하실 때 비로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그제야 주님인 줄을 알게 되었다. 형제여! 자매여! 눈이 밝아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보아라 우리 주 부활하시었네 돌무덤 헤치고 부활하시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버리고 우리 주 부활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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