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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김영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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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 18차 정암신학강좌(06.11.7) 지난 30여 년 동안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이시다. 내가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의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다. 그 이후 나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다. 나의 한 평생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등이 나에게 깊은 신앙적 감화를 미친 분들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박 목사님도 나를 퍽 좋아하셨다. 박 목사님은 시간에 상관 없이 나에게 전화를 거시고 그리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라고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다. 박 목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박 목사님의 입장을 교수들 앞에서 내 세우곤 했다. 따라서 나는 박 목사님과의 친근한 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반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다. 박 목사님은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었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었다. 박 목사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별세하시기 얼마 전 안만수 목사가 박 목사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간 일이 있었다. 원숭이나 호랑이를 보여드렸지만 박 목사님은 그것들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 만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들이 함께 모일 때 피차 농담하는 것을 박 목사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다. 교수 세미나를 할 때도 언제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으로 가느냐?“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 목사님은 이와 같은 편지를 쓰셨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다. “내가 주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를 떠나서 우정으로 주를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 생활과 말씀 연구 생활로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기도를 생활화하신 분이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도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곤 했다. 박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다. 1979년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하셨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좀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기도회에 참석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박 목사님보고 “제가 기도회를 인도할 터이니 집에 가시라”고 하고는 밤 기도회를 인도하곤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기도 일관의 박 목사님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 라고 새롭게 감탄하며 나는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행정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기 전에 기도로 일관하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길선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보여준 삶의 자세요 스타일이었던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나는 마지막 1주일간 세브란스 병원에 계신 박 목사님을 거의 매일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기도로 일관한 기간이었다. 나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간 미국 휫튼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 목사님이 피를 토하고 쓸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 목사님께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박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박 목사님은 매일 기도로 일관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쳤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쳤다. 박 목사님은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말씀했다. 나는 지금도 박 목사님의 주석들을 세상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는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토를 달곤 한다. 박 목사님은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다. 박 목사님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또한 겸손과 진실과 착함의 인격으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하고 순박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은 박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종존 나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주시곤 했다. “김 목사, 마음에 기쁨을 잃으면 안돼!” “힘을 내!” “강의 준비를 더 잘해야 돼!” “주님을 바라봐!” 겸손과 진실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셨다. 박 목사님은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기도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면서 박 목사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다. 그리고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성인 이동주 교수가 합신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박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한국 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박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님은 결국 현세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기도하면서 한 평생을 사신 분이었다. 내가 개나리 아파트에 사시던 박 목사님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려고 하면 박 목사님은 의례히 나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열쇠 잊지 마!” 내가 박 목사님과 이야기를 할 때 거의 매 번 내가 가지고 다니는 열쇠 뭉치를 소파에 놓고 이야기 하다가 그대로 놓고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박 목사님은 나보다 더 건망증이 많으신데 나더러 열쇠 잊지 말라고 매 번 당부하신 것이었다. 나는 나의 평생에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박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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