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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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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5-19)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그리하시고는 베드로 위에,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트라’ 곧 반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는 그 존립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반석 1. 신앙고백

주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고 계신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 도시는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요단 강이 발원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은 또한 가이사랴 라는 지명이 상징하듯 로마 황제, 곧 가이사에게 헌정된 곳입니다. 황제 신상도 있고, 온갖 우상이 가득한 곳입니다. 바알 등 우상을 섬기는 사원이 14개나 있던 곳이고, 그 주변에 큰 동굴이 있는데, 동굴 신 ‘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상이 있던 곳은 항상 윤리적 타락과 사치가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오늘날의 세속도시의 한 복판과 같다 할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은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가이사랴를 지배하고 있던 황제의 논리는 오늘날의 도시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경쟁. 바알 우상이 이제는 물질우상으로 바뀌어 끊임없는 물질 추구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마치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도덕적 타락과 무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살아가도 있습니까?

성도를 성도답게 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교회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 신앙고백입니다. 사람 수가 아닙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닙니다. 멋있는 이념이나 비전이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이 아닙니다. 가장 단순한 것,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한 교회는 아무리 수가 적더라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1)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탐욕과 경쟁의 사회를 이길 수 있는 힘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치 않다면 우리는 세속의 가치관에 다 전멸되고 말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고백입니다.

자기 의지나 힘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병들고 쓰러지고 나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이 자기를 구원해 줄 줄 압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애국적 민족주의든. 이념도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이념에 목매인 사람은 시대가 바뀌면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평소 신념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기도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념은 시대를 조명하는 틀일뿐입니다. 오직 영원하신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구원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최근의 황우석 교수 사태나 여전히 황우석 교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일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왜 호출했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세 명의 친구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동안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가자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은 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친구는 궁궐 앞까지만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했지만 별로 소중하게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요청을 받자 임금님 앞까지라도 같이 가서 자기가 변호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재산보다는 사람이 더 낫고, 사람보다는 선행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행도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선행이 얼마나 우리를 보호해주겠습니까? 우리를 영원히 변호해줄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신앙고백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 라는 가치관입니다. 재산보다는 사람이 낫고 사람보다는 주님이 낫습니다. 재산보다는 일이나 건강이 낫고 그것들보다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더 낫습니다.

2)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사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몇몇 이단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을 합니다. 저는 오늘 베드로의 고백에서 ‘살아계신’ 이라는 수식어에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로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죽은 하나님도 있느냐? 예, 있습니다. 이슬람권의 신 ‘알라’가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신은 이신론의 신입니다. 이신론이란 것은 마치 시계를 만들어 태엽을 감아놓고 던져 놓으면 저절로 시계가 가는 것 같과 같습니다. 신이 우주를 만들고 법칙을 만든 후에는 뒷짐을 지고 우주에 간섭하지 않는 신입니다.

신이 존재하지만 우리 인생과 상관이 없다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신이라면 그런 신은 죽은 신과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도 그렇게 믿지 마십시오. 죽은 예수 믿지 마세요. 자신이 죽은 예수를 믿는지, 산 예수를 믿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면 그 사람은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응답해 줄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역시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2천년 전에 능력을 행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능력을 행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예수 이념을 믿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삶과 모범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예수도 죽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의지나 생각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자기 기분에 들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방망이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침투하여 우리 인생을 깨뜨리고 뒤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불입니다. 우리 가슴에 갑자기 불을 질러서 우리로 도무지 가만있게 만들지 않습니다. 손에 쥔 것을 놓고 새로운 비전을 향해 떠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개척 교회가 좋은 점은 자신을 신앙생활의 최전선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살짝 숨어서 신앙생활 했는데 이제는 정면에 노출이 됩니다. 헌금, 교회출석, 봉사 모든 게 그렇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이때 자기 신앙을 점검하십시오. 무엇보다 자기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인생의 승부를 신앙에 거십시오. 세속 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오직 구원자는 예수 한 분 뿐이며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는 분명한 고백을 하며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신앙이 바로 서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문제는 엉거주춤한 것입니다. 교회와 세속 양쪽에 발을 디디고 있으니 힘든 것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의 무리들과 싸우며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반석 2. 사람 : “너는 베드로라”

교회는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근거하지만 우리가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는 ‘어떤 회의에 회집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카할’이라고 불렀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광야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건물 위에 교회를 세우니까 마치 건물이 교회고, 강단을 지성소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연약합니다. 오늘 주님은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연약한 인생일 뿐임을 일깨워 줍니다. ‘바요나 시몬’, 곧 베드로는 요나의 아들이며, 연약한 시몬 곧 시므온 지파 출신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16절에 말씀하신 대로 ‘혈과 육’으로 만들어져서 병에 걸리기 쉽고, 조그만 위협에도 비겁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21절 이하에 보면 곧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붙들고 간합니다. 여기 간했다는 단어는 부드러운 번역이지 원래 뜻은 ‘에피티마오’로 꾸짖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2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책망하십니다.

한 순간에 교회의 반석이었던 사람이 사단의 똘마니가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변하고 또 내 자신도 잘 못 믿겠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완벽한 인간들만 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어느 때는 성령충만해서 천사 같던 사람이 또 다른 순간에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안색을 붉히고 싸웁니다. 그래서 기적이 달리 기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이 구원 받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부족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도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는 눈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우리 자신 스스로도 정죄하거나 비하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괜찮다고 하시는데 어째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눈은 콩깍지가 씌인 눈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그렇지요.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것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기 과거보다 미래나 가능성 자기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인정해주길 원합니다. 소망의 눈은 그 가능성을 보는 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 곧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사람이 됩니다. 바뀝니다. 이런 가능성의 시선으로 사람을 볼 때 지금은 부족하지만 미래에는 달라 질 것입니다.

반석 3. 교회의 주인 : “내 교회”

주님은 18절에 분명히 ‘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근본 원인은 소유권의 혼란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인데 그 자리를 인간이 차지합니다. 세습이나 전횡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교회가 주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도 나올 정도이겠습니까?

주인이 인간이 되니 교회를 예수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세상의 방식대로 운영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작은 소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마치 세상처럼 작은 소자를 하찮게 여깁니다. 오히려 권세 있고 힘 있는 사람을 위주로 교회가 운영이 됩니다. 섬기라고 했는데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땅 끝까지 나아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다윗의 이런 고백을 좋아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며...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1-14)

예컨대 농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농사해서 열매를 거두면 이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번 따져봅시다. 땅을 만든 분은 누구며, 씨앗을 만든 분은 누구입니까? 때를 따라 주어지는 햇볕과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인간의 뛰어난 머리와 손의 기술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인간이 하는 노력은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은사나 능력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뛰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술성이 뛰어납니다. 조금만 노력해도 성적이 쑥 오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실 자도 여호와십니다. 문제는 소유권 의식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권, 로드십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로드십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반석 4. 교회의 권세

예수님은 이런 교회에 다음 두 가지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첫째는 18절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적 권세입니다. 둘째는 19절의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메고 푸는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1)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입니다. 인간을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그 힘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사자 밥이 되고, 저녁을 밝히는 불 기름으로 사라져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천당이라는 말이 요즘은 어떤 광신도의 구호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대단한 선언입니다. 죽음이라는 음부의 권세가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죽는다 할지라도 잠간 잠을 잔 듯 눈을 뜨고 나면 하나님 품속에 있을 것을 믿습니다. 아직도 이 믿음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자기 신앙을 한 번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라는 것은 또한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나 사단이 이제 여러분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십자가가 박혀 있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가슴속에 십자가가 보입니까? 잘 보이지 않으면 미아리에 있는 점쟁이한테 가보세요. 점쟁이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남편의 장래에 대해 불안해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갈 수 없고 믿지 않는 친구와 함께 미아리에 있는 용하다는 점쟁이한테 갔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속이고 점을 보는데, 이 점쟁이가 점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점괘가 잘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수나 잘 믿어” 합니다. 그 집사님 가슴속에 십자가가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는 잘 모르는데 악한 영들은 더 잘 알아봅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가 된다면, 곧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이 분명하다면 모든 환난이 우리를 피해 갈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도 변하여 감사가 되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예수쟁이는 세상이 감당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우리의 가슴속에는 십자가가 박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마치 골리앗 같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할 뿐이지 어떻게 해할 수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2)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두 번째 축복은 천국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육중하게 닫힌 문도 열쇠만 있으면 쉽게 열립니다. 생각하면 천국은 모두가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 곳입니까? 지금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얻기 위해 고행하며, 고통하며 때로는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 이 열쇠를 거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은 곧 복음 전파의 특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의미 없이 외롭게 살던 인생이 예수를 만나 인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삶이 행복해지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죽음의 권세를 이깁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말은 또한 여러분에게 축복과 저주하는 말의 권세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축복하든 저주하든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매거나 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권세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정치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말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습니까? 별것도 아닌 한 마디 말 가지고 대서특필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 한마디는 평범한 사람의 말 한 마디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아마 그러면 “산은 산이지 산이 물이냐?”하며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하면 사람들이 “아, 심오하도다”하며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골몰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이 그렇게 위대하고 힘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누군가 축복 기도를 하고, 축복의 말을 하면 하늘에서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저주하면 그대로 하늘에서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건들면 “까불지마 잘못하면 다쳐” 하고 말하세요.

요즘 세상 사람들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만큼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여기서 좀 더 나가야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한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세상을 복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신앙고백 위에 바로 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우리 인생에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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