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 이루었다 (스 6:13-18)

첨부 1


본문/에스라 6장 13-18절
제목/다 이루었다

벌써 2012년도가 저물어 가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때를 맞으시는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흡족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교우님들이 아쉬움으로 이때를 맞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연초에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많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면 항구적으로 가진 영적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항구적인 영적 목표는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결한 신앙, 능력 있는 신앙, 전도의 열매를 맺는 신앙,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돌보는 사랑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영적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을 받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목표를 잘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저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대로 우리를 위해 생명의 길을 여시는 일을 다 이루심으로써 메시아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부디 저도, 여러분도 아름다운 목표들, 특별히 마음의 성전을 잘 지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일을 완수할 수 있길 원합니다.

아름다운 목표를 가졌으나 실패하는 아픔은 유다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면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던 성전도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주전 536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무너지고 새로 등장한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백성들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을 경배하여 섬기리라!>, 이것이 그들의 소원이요, 목표였습니다. 가슴이 흥분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돌아온 지 이년 째 되던 해 둘째 달부터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에스라서 3장 8절 앞부분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한 편으로는 너무 기쁘고, 한 편으로는 너무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기쁜 이유는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요, 아쉬운 이유는 자신들이 짓는 성전이 과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작고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에스라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흥분으로 시작했던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기초 공사만 한 후 무려 16년 동안이나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사모하던 공사가 중단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룩한 일들, 아름다운 일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이 왜 중단되곤 하는 것일까요?


첫째, 결심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 공사가 중단 되었을 당시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학개서 1장 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언뜻 들으면 이 말씀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토록 성전 공사를 사모했던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아직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만 해도 빨리 성전을 짓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성전 공사를 시작해 보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마음이 점차 식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서둘렀어. 아직 성전 지을 때가 아닌데,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 게 아니었어.....>

누구나 처음에는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초의 사랑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색하고, 첫 출근할 때의 마음이 변합니다. 입학 때의 각오가 쉽게 탈색됩니다. 실패 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이를 악물고 시작합니다만, 그 각오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저도 두려워하는 게 있습니다. 땅끝교회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처음에 부임할 때의 모습과 달라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게을러지고, 열정이 식고, 열정이 식고, 교회에 대한 마음이 변질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또 땅끝교회가 부산의 창고교회로서 영도의 1/10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책임감과 비전이 시들해져서 대충 시간이나 보내다 끝내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길 원합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할 때가 다가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완성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조금도 흔들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초지일관하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6-7절을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붓는 포도주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전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 과정에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변치 않았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끝까지 그렇게 하십시오. 선한 목표를 가지셨습니까? 끝까지 그렇게 하십시오. 에베소서 6장 2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되,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조금도 변치 않고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둘째로, 거룩한 일이 중단되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어려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에서 소위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동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 나라가 나뉠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 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는데, 이것은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약 140년쯤 전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방으로 흩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북 왕국 지역에 다양한 민족들을 데려다가 섞여 살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서로 혼인을 하여 피가 섞였고, 신앙도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전 공사에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참여하여 힘이 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에스라서 4장 3절을 보면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거룩한 성전을 짓는데 부정한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거부당한 사람들이 성전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이에 대해 에스라서 4장 4-6절을 보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요한 방해는 그들을 지치게 했습니다.

또 이런 방해꾼들 외에도 유다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돌아온 백성들이 가진 경제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어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든데 성전 공사를 계속하는 게 무리라고 여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귀하고 아름답지만 고단한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아쉽지만 포기하고 편안하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편안하게 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일손을 놓은 대신 자신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성전 공사에 사용될 재정을 자신들의 집을 짓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처음엔 소박하게 짓고자 했으나,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점점 화려한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학개서 1장 4절을 보면 이런 책망이 나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학개 선지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졌던 마음은 다 버리고 자신들의 집만 잘 짓고 안락하게 편안히 사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걸려 넘어지는 가장 큰 문제는 <신앙 우선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욕망 우선인가>의 질문 앞에서 눈앞의 욕망을 선택할 때 발생합니다. 신앙 우선으로 하려면 하나님 우선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건 피곤하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자기 이익만 추구합니다.

그래서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주일 아침에 엄마가 꼬마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을 두 개 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는 헌금 드리고, 하나는 사탕 사먹어!> 그런데 장난 하면서 가다가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고, 시궁창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녀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미안해요, 하필이면 왜 하나님께 드릴 게 빠졌네요. 여기 이건 제 껍니다.>

이러다보니 예배보다 세상일을 우선합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나 중심입니다. 나 필요한 것 우선 다 쓰고, 남는 게 있으면 신앙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씁니다. 그러나 내 할 일 다하고, 내 쓸 것 다 쓰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과 자신의 안위 중에서 늘 사명을 우선했습니다.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을 때, 모세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백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백성의 구원이 먼저였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뜻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편안함은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데마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바울과 함께 한 신실한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데마는 바울도 떠나고 복음도 떠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데마는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쾌락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되시겠습니까? 데마가 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보다 신앙의 일을 먼저하고, 몸을 먹이는 일보다 영혼을 먹이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내 욕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택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할수록 자기중심에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면서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뒤를 돌아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는 해야겠는데, 아직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경우를 말합니다.

해가 바뀌어도 신앙의 성장 없이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 생활이 성장하지도 않고, 기도 생활이 성장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성장하지 않고, 늘 그대로만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아직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직도 나 중심으로 살고 있는, 눈앞의 안락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거룩한 일이 중단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방해하는 사람들과 경제적 곤란 앞에서 좌절했고, 결국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이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리오왕은 성전 공사를 방해하지 말고, 속히 모든 것을 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또 14절을 보세요.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할렐루야!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셨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긴 수학 문제를 풀 때 한 과정이라도 빠지면 답을 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더해지고, 고려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공식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 수학 문제를 푸는 데 가장 중요한 공식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무리 난제라 하더라도 하나님이란 공식으로 풀면 쉽게 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비록 약해도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는 어리석어도 하나님은 지혜로우심을 믿으십시오. 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계산에서 뺐을까요?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위해 힘쓸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할 때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배의 사람이 되고자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고자 애를 쓸 때 반드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세상일을 먼저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먼저 예배부터 드리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십시오. 먼저 신앙을 위해 수고하십시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세상 일 중에는 실패할수록 좋은 일들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일은 실패할수록 좋습니다. 또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인 일들이 있습니다. 점심 을 먹든지, 못 먹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여유의 정도, 출신 학교, 직업,....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해 보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가치 있게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에 실패했다고 반드시 인생까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일에 실패하면 그것은 치명적입니다. 다른 일보다 먼저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떨쳐 일어나세요. 힘을 내세요,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땅끝교회 성도 모두가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천성을 향해 끝까지 달리시길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