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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비로운 몸 (롬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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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몸 (롬 12:3-13)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오늘날은 극도의 개인주의화가 심화된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핵가족화라 했는데 이제는 핵개인화가 되어 개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특히 가정 해체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개인주의의 심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가치, 개인의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개인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는 위험합니다. 개인화가 강한 시대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모, 삼촌 등의 여러 관계 안에서 성장했지만, 오늘날에는 형제도 하나, 둘밖에 없는데다가 사촌이나 다른 가족을 만날 일이 잘 없고, 입시 등으로 고립된 핵가족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를 맺는 법을 모르고, 단절된 문화 속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두 사랑을 절박하게 원하지만 정작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큰 교회가 세워지는 데는 긍정적 요인들과 함께 개인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큰 교회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숨기 좋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노출하기보다는 프라이버시를 원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문화인데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온 것입니다. 

본문은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보여줍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자기의 관점에서 교회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아는 것이 유익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반 조직체와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했는데 이것은 교회에 대한 탁월한 묘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진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지상에 또 다른 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승천하셨지만, 지상에 남겨 놓으신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야 하는 분신이 된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곳이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5)」 예수를 믿는 순간,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신비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지어놓으셨습니다. 다양한 신체와 장기들, 신경조직과 세포들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이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국적,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생긴 것입니다. 권속은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다는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면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코라고 해도 얼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굴러다닌다면 섬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멤버십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멤버십은 마음에 안 들면 탈퇴하면 되지만,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몸 안에 있으므로 분리가 되지 않는 관계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때로는 갈등 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한 몸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된 것이고 혈족 이상의 결속으로 굉장히 강한 결속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이라면 따뜻하고 좋은 느낌이 들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싸우는 곳이 가족관계입니다. 별것 아닌 것, 사소한 것으로 많이 싸우지만 며칠 지나면 웃고 함께 뒹굴며 살아갑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인데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일어나면 “교회가 왜 이래? 난 더 이상 안 다닐 거야!”라며 갈등이 없는 곳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날까지 불완전성을 가지고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내 수준과 이상에 도달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안 들어도 한 몸 안으로 녹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은 신체 일부가 몸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믿긴 하지만 여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함들을 서로 감싸주면서 조금씩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손가락에 상처가 생겨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병원에 가서 손가락을 잘라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프면 싸매 줘야 합니다. 손가락은 몸의 일부이고, 몸은 손가락을 보호해주고 회복시켜주는 기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건은 고장 나면 빼버리면 되지만 손가락은 생명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끝까지 품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몸 안에서 함께 자라가고, 몸 안에서 보호받고, 몸 안에서 우리 신앙의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하나 된 몸을 깨는 것은 자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 된 몸을 지키는 데 힘을 써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을 잘하고 많이 해내느냐 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배려하고 섬기고 한 몸을 깨지 않는 열심을 가지는 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교회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롬 12:4)」 

우리 몸에는 다양한 신체가 있고,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얼굴에도 눈, 코, 입, 귀 등이 모두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보기에는 같아 보여도 기능이 다릅니다. 손가락 다섯 개의 기능도 전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각양각색입니다. 교회는 사물이나 숫자의 개념이 아니고, 다양한 생명체들의 연결로 구성되어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합니다. 드러난 기능이든 감추어진 기관이든 모두가 귀중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다양성을 즐기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획일화하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참 힘든 일이지만 우리가 해야 합니다. 몸으로서의 교회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양성을 가지고 각자의 부르심과 은사에 따라 함께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신앙생활도, 은사도, 받은 은혜와 체험, 경험도 다르고, 머리가 해야 할 역할, 손이, 내장이 해야 할 역할이 다릅니다. 그 다양성을 가지고 함께 움직일 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은사와 경험은 독특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에 나온 것처럼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일로, 손 대접하는 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것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자기 기질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어떤 분은 소극적입니다. 다혈질적인 분이 있고 우울질이 강한 분이 있습니다. 각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없이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말썽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썽 피우는 사람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썽을 피우는 사람이 주는 유익은 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도록 기여한다는 것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을 다양하게 부르셨고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몸이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른손이 왜 나만 밥을 먹여야하냐고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일을 감당함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보람, 의미를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양함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가집니다. 사실은 다양하고 다른 것이 좋은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만 있다면 살기 쉬울까요?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렇게도 지으셨구나.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구나.”하는 관점을 가지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조금씩 영적으로 자라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도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볼 때 인내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다양한 기질과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똑같이 획일화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받아들이는 훈련, 용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6절 이후를 보면 받은 은혜와 은사가 다릅니다. 예언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자가 가진 은사, 기질, 재능, 관심도에 따라 각자가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할 일은 성령께서 각자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양성 속에서 생명적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곳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5절에 ‘서로’라는 단어가 나오고, 10절에도 ‘서로’가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이 아주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영적 성장을 하려면 반드시 서로가 필요합니다. 홀로 자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모이게 하신 이유는 혼자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고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면 동시에 나도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기여함으로 함께 존재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고통이나 기쁨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누군가 함께 기뻐해 줄 수 없다면, 그러나 슬플 때 함께 슬퍼해 주는 공동체가 있다면 정말 살맛이 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는 생명의 관계 안에 깊이 연결되어 서로가 깊이 돌아보는 것입니다. 치아가 너무 아프면 잠을 못 잡니다. 그것은 치아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의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만, 주일에 예배드리는 이 공간 안에서는 사실 그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암에 걸렸는데 이런 주일에 대규모의 모임에서는 누가 암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주일에 예배만 드리고 간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파워를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그룹인 사랑방 안에서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기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소그룹에 장례식이 있어도 전국의 어디든지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함께 겪어주는 것입니다. 사랑방 안에는 함께 해줄 수 있는 믿음의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위로를 받고,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군중의 한 사람으로 묻혀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신앙의 일부분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을 저주로 표현했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파워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체적입니다. 

세계에서 지도력을 가지고 미국의 경제력을 쥐고 있는 것은 그 힘의 뿌리가 공동체 사상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그룹이 살지 않고, 집단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소그룹이 주일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소그룹에서 연결되었던 힘이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점점 더 힘들고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험에 가입하지만, 그것도 우리 삶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이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출발시키신 신약의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 시대에는 외부적 환경이 훨씬 더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공동체는 힘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우뚝 세워졌습니다. 그들 안에 유무상통함이 있었고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핍절한 자가 없는 환상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니고, 공유하고 함께 이루어가는, 바울이 말한 한 몸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의 이념이 살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천 년 전의 그것을 완벽하게 복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상을 잘 붙잡고 세워져 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교회야말로 이 시대 안에서 승리하게 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다 떠나가고 사라져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사랑방과 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경험과 은사를 돈 버는 일로만 사용하지 않고 공동체와 이 세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에 관심이 많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헌신해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분들이 모여 효과적인 아이디어와 마음을 모아 그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팀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꿈을 꾸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때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나에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돈을 벌고, 지위가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드려야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해마다 시간을 내어 봉사를 다니는 분들은 사실, 그 일을 통해 가장 큰 수혜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거기서 의미를 깨닫고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에너지를 통해 자신의 직업에 더욱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몸 안에서 서로 기여하고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헌신할 때 자신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직은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참여하고 주면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나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나의 기쁨이 아니라 형제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공동체를 위해 믿음 안에서 각자의 부르심 앞에 반응하고, 각자에게 주신 그 일을 갈고 닦아 주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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