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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365 감사!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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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감사! (살전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thank God no matter what happens. This is the way God wants you who belong to Christ Jesus to live

수능을 보는 날이었습니다. 
잠깐 기도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들의 초조한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둔 엄마는 아이가 수능을 망칠까 봐 걱정이고,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들의 성적이 “실력대로” 나올까 봐 걱정이겠죠.
결국, 우리의 삶은 이래저래 걱정의 연속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첫째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죠. 우리는 주변에서 언제나 불평하는 사람을 봅니다. 
둘째는, 있으므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죠. 원하는 것이 채워지면 감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위험하죠. 조건이 사라지면 감사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셋째는,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온전하고 성숙한 감사라고 할 수 있죠.
하박국 3장 17-18절에 나와 있는 감사가 그런 것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

얼마 전에 나온 조엘 오스틴 목사의 “행복의 힘”이란 책에 보면,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행복하기로 결정하는 것, 마찬가지로 감사란, 감사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 어거스틴은 매우 중요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올바르게 살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감사”

행복한 삶의 선택 감사!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16절, 17절과 더불어 조금만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말씀입니다. 
아마도 가장 짧은 구절 중의 하나겠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실 우리말 성경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본 영어 성경에는 세 개의 동사가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그리고 다음 문장이 나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유진 피터슨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더군요.
This is the way God wants you who belong to Christ Jesus to live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의 방식 모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동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도할 힘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권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항상 기뻐할 수 있지요. 반대로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나요? 
그래서 이것이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삶의 방식 말입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들려 드리죠.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 양광교회 담임으로 간 장석주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저한테 배우 것 중의 가장 인상적인 것이 늘 “부수고 고치고” 이었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역시 부수고 고치는데, 계약금 지급을 하는 날이 다가오는데 돈이 없더랍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에 참석했던 어떤 분이 헌금을 하고 갔는데, 딱 맞는 금액이었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어려움 없이 공사를 했노라고,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노라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부러운 생각이 들더군요. 나한테 배웠다는데 더 잘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오후에 말씀을 준비하는데 “삶의 방식”을 생각하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더군요.
“그래, 어려운 때 기적을 베풀어 준 은혜에 감격하는 것이 더 감사하냐? 아니며 그런 어려움 없이 목회하는 것이 더 감사하냐?”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이 더 감사한가요?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감사, 기쁨, 기도”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해외 유학생들을 위한 집회에서 자주 만난 강사가 한 분 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입니다. 어떻게 그 연세에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잘 다니시는지 아니 잘 불려다니시는지,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분의 간증이 참 감동스럽습니다.
그의 삶에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시력을 잃어버리고 맹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인생에서 큰 시련일 것입니다. 하지만 빛을 잃으므로 빛 되신 주님을 만났고, 자신의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그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많이 잃었지만, 삶의 목표를 찾았고, 장애인들을 위한 conference에서 도우미로 참석한 지금의 사모님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 가장 복된 만남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결혼하면서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절대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겠다!”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인상이 늘 웃는 모습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삶의 방식을 통해 살아가다 보니 늘 감사와 기쁜 삶이 된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인데요.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생활 방식이 하나님이 뜻인데, 이 뜻은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리더의 7가지 언어]라는 책에 보면 “공감 능력”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2011년 12월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 결과입니다.
두 마리의 쥐를 함께 생활하게 하고 2주가 지난 뒤 한 마리는 우리 안에 두고, 한 마리는 자유롭게 풀어놓았습니다. 우리의 잠금장치는 바깥에 있는 쥐만 풀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쥐는 우리에 갇힌 쥐를 꺼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로운 쥐 옆으로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떨어집니다. 놀랍게도 실험한 쥐의 52%가 먹이를 포기하고 동료를 구합니다. 이제는 반대로 갇혔던 쥐를 풀어주고 자유로운 쥐를 가둬좋으면 같은 상황에서 80%가 먹이를 버리고 동료를 구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동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엄청난 재물과 명예가 떨어졌을 때 어려움에 빠진 동료를 구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간의 전두엽에는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거울 뉴런이 설계되어 있는데 계속해서 반응하는 습관을 지녀야만 퇴화하지 않는답니다. 
그렇군요!
공감하는 것도 훈련이고 습관이네요.
대한민국의 정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죠.
그저 누군가의 허물이 드러나면 끝까지 잡아 뜯고야 마는.
너무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 나오면 좋을 텐데. 
우리의 정치와 사회와 삶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군가의 어려움과 아픔을 공감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요즘 경기도 불황이고 젊은이들이 직업을 갖고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현실입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하지만 누군가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말씀을 준비하던 때, 한 주간 내내 요로결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나오지 않아 며칠 기다려 보고 돌을 깨야 하는 시술을 받아야 할 수도.
하지만 며칠 동안 옆에 붙어서 밥을 해주고 함께 해주는 아내가 있어 행복합니다. 며칠 동안, 정말 오랜만에 밥 세끼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 세끼!"로 보내며.

공감능력은 생활방식으로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익숙해질 때, 기쁨을 누리고, 기도를 하고,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8월 새가족 애찬에서 “오만”에서 온 성도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5-6년을 해외에서 떠돌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 한편의 설교와 배를 드리려면 보통 7시간쯤 걸리는데, 한국에 돌아와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좋은지.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 보니 만나 교회는 집에서 너무나 멀었습니다. 
어느 날 중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하는데, 그 친구 역시 만나 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고 있다는군요.
친구가 하는 말 "행복한 줄 알고 교회 가. 얼마나 멀다고."
그렇죠? 감사와 행복은 거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참 많은 간격을 좁혀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의 능력

감사를 아는 삶이 행복한 것은 삶을 바꾸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고,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 사이를 지나실 때 환자들이 나타나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시죠.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죠. 
그들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10명이 다 함께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여기까지 동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는 그 중의 한 명이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9명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도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정말 아홉 명이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에 일어난 그 일을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감사의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기쁘고 감사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사를 주님께 돌리지 못했습니다. 감사한 일을 만났으나, 감사를 누리지 못하므로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죠.

여러분!
그렇다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간 아홉 사람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사장에게로 가라!"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시킨 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난 다음에 선물이라도 사 들고 예수를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제사장에게로 간 아홉 사람보다 예수에게로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가는 도중에 예수를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생각났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을 그렇게 깨끗하게 해준 예수에 대한 마음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 가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 경계가 보이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제사장에게로 가는 마음과 그 순간 예수가 먼저 생각나는 그 마음의 경계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 경계에서 진정한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나'가 아닌 '너'를 생각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내가 아니라 너를 기억하는 행위이며 마음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문둥병을 고친 아홉 사람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게 '나' 중심입니다. 너에게로 건너뛰어야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감사는 이런 작은 차이에서 시작되는 거 아닙니까? 누구나 마음의 경계에서 삽니다. 제사장에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에게로 먼저 갈 것인지의 경계 말입니다. 사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선물 보따리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나를 건너뛰어서 너에게로 넘어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게 아주 큰 감사였던 것입니다. 감사란 이런 거 아닙니까?
예수께 돌아오지 않고 제사장에게로 직행을 한 아홉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감사의 마음이 아닌 다른 감사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아는 순간 매우 기쁘고 들뜨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이제 돌아가 자기를 내다 버린 가족들을 만나고,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이웃 사람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사회에 복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몸의 병이 나은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점령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보이지 않고 그를 고쳐준 '예수'가 보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7-18절을 보세요.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례적으로 예수님은 세 마디의 질문을 쉬지 않고 쏟아놓습니다. 그만큼 긴장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어느 특정인을 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와서 감사하며 엎드린 사람에게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하고 물을 수는 없습니다. “한 명밖에 없는 거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확인하듯이 묻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질문을 '설의법'이라고 합니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 혼자 감사하러 돌아온 현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에 대해서 서운하시거나 책망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책망을 하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 대신에, “나에게 감사를 하러 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몸이 나았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선물은 모든 사람이 '나'를 벗어나서 '너'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타인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갈 마음으로 가던 길을 돌아설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은 진정으로 깨끗해진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인생의 가던 길을 전환한 사람을 “구원받았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돌아와 감사하다고 인사 하지 않아서 섭섭한 게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와 목표를 바꾸지 않고 일차원적인 문제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던 겁니다.

예수는 돌아와서 감사하는 그 사람에게 ,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 하십니다(20).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교리적이거나 이상적인 그 무엇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 말은 아주 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의 인생은 이전 인생과 매우 다르다!”라는 선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병을 고쳤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관, 가치관,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혹시 “온 맘 다해”라는 찬양을 아시나요?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 만 섬기리. 온 맘 다해.

새로운 삶의 방식 감사하기!
연초에 존 크랠릭이 쓴 [365 thank you]라는 책을 보면서 추수감사절에 교인들과 함께 내용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놓았던 설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감사를 회복해야 할 때라고 말입니다.
계속 우리가 시리즈로 나누고 있었던 주제가 “회복”이었습니다. 회복은 과거를 되돌려 놓을 수 없지만,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감사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key word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감사로 삶의 혁명을 일으킨 어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위대한 이야기보다도 위대한 한 사람이 변화된 이야기, 그리고 그 변화가 감사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존은 2007년 겨울 최악의 날을 맞이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로펌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사무실 임대계약마저 기약 없이 끝나가는 상황이었죠. 텅 빈 통장, 그리고 비좁고 답답한 아파트에 홀로 누워 있었습니다. 아내와는 이혼소송 중이었고 딸마저 빼앗길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먹자고 제안한 친구 앞에서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성공하고 싶었지만, 그의 인생은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예기치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고,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게 망가져 버린 인생을 바라보며 손을 놓고 있었죠.
그렇게 그가 절망의 심연에서 괴로워할 때, 문득 어떤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할 줄 알기까지는.”
“너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하리라.”

그 순간 그에게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었습니다. 꽤 성공한 사업가였던 할아버지는 늘 골프를 치고 주식 시세를 살피며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분이었고, 당시 12명의 손자들을 자주 감동하게 했던 분이었습니다.
1960년 당시 손자를 할아버지가 주는 은화 한 닢에 감동했고, 할아버지는 “이 은화에 감사편지를 쓴다면 은화를 한 닢 더 주마.”라고 약속했습니다. 그게 바로 감사편지의 효력이라고 말입니다. 어렸던 시절 할아버지는 그가 한 약속을 잘 지켰다는 사실. 그는 얼마 후에 두 개의 은화를 갖게 되었죠.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2의 감사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은화는 거기에서 그쳤다는 사실.

2008년 1월 3일 존 크랠릭의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365일 감사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감사편지는 먼저 이혼한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감사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 “곧 만나기를 바라며, 아빠가”라고 썼는데, 편지 봉투를 쓰려는 순간, 아들이 어디에 사는지 주소도 모르고, 아들이 사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주소를 묻기 위해 전화를 하게 되었고, 전화를 하며 아들과 식사 약속을 하고 만나게 되지요.
오랜만의 만남에서 아들은 아빠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안에는 빳빳한 100달러 지폐 다발이 보였고, 아들은 “빌렸던 4000달러에요!”
그 돈에 대하여 그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첫 번째 감사편지에 대한 인스턴트 보상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격으로 그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책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물론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감사편지를 쓴다는 발상은 처음에는 신통치 않아 보였고 두려움마저 불러일으켰다. 만일 내가 망해가는 변호사의 힘겨운 일 속에서도 감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1월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들은 모든 곳에 최소한 감사의 씨앗 심기를 시도해보라고 내면의 나를 설득했다. 설령 만일 내가 내 직무에 관해서 감사편지를 쓰는 동안 희망을 발견하지 못해도 적어도 더 나빠질 일은 없었다. 나는 일단 쓰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감사편지를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의미 있는 은총으로 축복받았다는 뚜렷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은총과 축복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수백 가지 이상의 예 가운데 몇 가지만 꼽자면 내 아들들 안에서, 딸 안에서, 친척들 안에서, 친구들 안에서, 그리고 동료 안에서, 이들 안에서 발견한 은총과 축복들을 예전의 나라면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365통의 감사편지를 쓰는 데 걸린 15개월은 긴 시간이었다. 그것은 내가 삶에서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수많은 것을 주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 목록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적어도 100통 이상의 편지가 크리스마스 선물, 집들이 선물, 내 동료의 엄청난 수고, 친구들로부터 받은 특별 선물, 콘서트와 스포츠 경개 입장권, 저녁 식사와 값비싼 점심 등에 대해 줄곧 써 왔어야 했던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우리가 편지를 써 보려고 합니다. 
당신에게 감사를 있게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말입니다. 
당신이 누리는 감사보다, 그 감사를 주심으로 돌려야 할 영광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드린 감사로 누군가 기뻐하고 행복할 일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감사의 내용을 여러분이 받고 싶으면 자신의 주소를 써도 좋습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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