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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들의 울음 (눅 19: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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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의 울음 (눅 19:37-44)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셔,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아, 팔레스타인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이 참 역동적입니다. 한 주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안철수 교수의 대통령 후보직 사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또 지난 두 주 동안 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일단 봉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분쟁의 불씨는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전쟁의 배후에 감춰진 추악한 정치적 계산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양극화와 고물가로 인한 경제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더욱이 내년 1월 총선을 앞두고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타냐후 총리로 하여금 안보 불안감을 부추기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분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아 개발한 무기인 아이언 돔을 세상 앞에 선 보이는 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아이언 돔은 로켓포 공격을 차단하는 무기입니다. 그 무기의 성능을 과시함으로써 구매자들을 불러모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전쟁은 악마적입니다.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소중한 이들입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은 어린이나 노인 그리고 여성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간 생명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잊습니다. 전쟁을 기획하는 이들은 그들의 죽음을 부수적인 손실(collateral loss)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오만한 말입니까. 미국의 진보적 사상가인 하워드 진은 미국이 벌였던 전쟁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목숨은 미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목숨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목숨의 가치가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피부색이 어떠하든, 부자나라에 살든 가난한 나라에 살든,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을 기획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입니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참상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그림이 있습니다. 아심 아부 샤크라(Asim Abu-Shakra, 1961-1990)의 선인장 그림입니다. 선인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그들은 선인장을 집과 경작지를 두르는 울타리로 삼았습니다. 봄이 되면 피는 노랗고 붉은 선인장 꽃은 마치 촛불처럼 보입니다. 아심 아부 샤크라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꽃을 피우는 선인장에서 자기 동족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가 남겼던 스케치 가운데는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이 맨발의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선인장 위를 걸어가도록 강요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게 그 땅의 현실입니다.

• 예루살렘 길 위에서

저는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 진력하셨던 예수님의 발걸음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람들은 ‘우주의 배꼽’, ‘평화의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던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맞은편 올리브산의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눅19:38). 삶이 팍팍하지 않았다면 이런 노래가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제게 확 다가온 것은 하마다 게이코의 동화 <평화란 어떤 걸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도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을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종교조차도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종교가 이익이나 권력에 맛들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는 ‘거룩함’과 무관합니다. 실상사 회주인 도법 스님은 지금은 종교보다 일반 사회가 훨씬 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여전히 부정부패가 있다고는 하지만 종교단체보다는 자정 능력이 있고, 또 모든 사람이 기본권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이야기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암5:24) 세상을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허구일 뿐입니다. 시편 시인은 정의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시85:10-13)

찬양으로 예수를 맞았던 이들은 이런 세상이 열리기를 염원했을 겁니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 왜 저들을 꾸짖지 않느냐고 항의합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이 부른 노래는 평화 없는 세상, 정의가 실종된 세상에서 사람 대접받고 살지 못했던 사람들, 곧 돌멩이 같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으니, 그것을 돌들의 노래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 예수의 울음

오늘의 본문을 읽어 나가가다 우리는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41) 예수님도 인간이셨으니 울 때도 있었을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께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말했습니다(히5:7). 복음서는 예수님의 울음을 두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가 세상을 떠나자 누이동생 마리아는 매우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비통해져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이때 마리아 자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터뜨리신 울음은 눈물만 조용히 흘린 것이 아니라 소리내어 우신 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속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이었습니다.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3년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그야말로 죄의 권부였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곳이 가장 속된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며 주님은 슬피 우셨습니다. 주님은 그 도성에 내릴 심판을 미리 내다보셨던 것입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깨어 다가오는 재앙을 바라보는 것처럼 기가 막히고 난감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찍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에 지펴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눅13:34) 

놀랍지 않습니까? 신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폭력이 그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 평화의 길

종교가 평화가 아니라 불화를 조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리의 전도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들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전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들을 보신다면 흐뭇해 하실까요? 적어도 성경을 통해 제가 아는 예수님, 그리고 지금껏 관계를 맺어왔던 주님은 오히려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실 것 같습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교회는 뿌리부터 말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18세기 독일의 극작가이며 철학자였던 고트홀트 E. 레싱(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 작품 <현자 나탄>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쟁패를 벌이던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희곡을 통해 참 종교를 분별하는 법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왕에게 소유자로 하여금 신과 인간의 사랑을 받도록 신통력이 부여된 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그 반지는 반지의 신통력에 대해 소유자가 확신할 때만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훌륭했기 때문에 왕은 어느 아들에게 그 반지를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어느 날 세공사를 불러 진짜 반지와 똑같은 반지 두 개를 만들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세공사는 정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반지를 만들어왔습니다. 왕은 아들들을 따로 불러 반지를 넘겨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들은 반지가 세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위를 두고 다투던 그들은 판결을 내려달라며 재판관에게 나아갔습니다. 재판관도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혜안이 떠올랐습니다. 재판관은 왕자들을 불러 일렀습니다. "이 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라. 너희가 각각 반지를 아버지한테서 받았다면,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확실히 믿어라…그리고 아버지의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을 본받도록 노력하라. 자기 반지에 박힌 보석의 신통력을 현현시키려고 경쟁하라. 온유함과 진정한 화목과 옳은 행동과 신에 대한 진정한 순종으로써 그 신통력을 돕도록 하라."(<현자 나탄>, 128쪽)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진짜 반지를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증명할 길은 그 반지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흥겹게 저마다의 생명을 누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픔에 자리에 서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차이가 지워집니다. 종교도 인종도 피부색도 빈부도 유식과 무식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 아픔의 자리에 서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불화를 조성한다면 그 까닭은 분명합니다. 나를 이롭게 하려고 남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남의 나라를 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마20:25-26)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강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세도를 부리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태도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남보다 돋보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택해야 할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섬김과 나눔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나누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평화도 있는 법입니다. 

• 돌 위에 돌 하나도

주님 눈에는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통한 울음을 터뜨리신 주님은 예루살렘이 맞이하게 될 파국적 운명을 알리셨습니다. ‘그 날’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성을 에워싸고,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짓밟고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때 말입니다. 주님은 어쩌면 예루살렘 도성의 돌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셨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예고하신 참극은 불과 40년 후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막강한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런 비운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시고, 경고하실 때 그들이 못들은 척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거리에서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롬12:15-16)

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함께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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