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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밖의 선물 (삼하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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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선물 (삼하 9:1-10)

심리학자 어닌 젤린스키는 걱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고,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즉,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모두 불필요한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Thank는 생각 Think에서 유래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1. 사울 가문의 비극

요즘 대선을 앞두고 권력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사울의 가문과 다윗의 가문 사이에는 권력을 가운데 둔 치열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왕정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다고 합니다. (삼상 9“ 2)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외모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으며 결국 그의 왕정 시대는 내리막길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의 권세는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을 상징하는 기름을 부었으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29:5)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자 사울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왕좌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고, 두려움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그를 죽이고자 하는 집착과 망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으며 그 일에 삶의 모든 열정을 불살랐습니다. 인생 마지막에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반미치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그는 버림 받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그의 모든 아들들은 모두 전사합니다. 사울은 도망가는 중에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스스로 자결을 합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 31: 6) 

사울 가문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했다는 소식이 궁정에 전달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으며 블레셋군의 칼을 피하기 위해서 모두들 미친 듯이 도망쳤습니다. 궁정의 유모들은 요나단의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숨기기 위해서 그들의 처소로 달려갔습니다. 

그 중 한 유모는 왕자들 중의 하나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그녀의 팔 안에 감싸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나머지 그녀는 미끄러져 넘어졌고, 이 아이는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아이를 길바닥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발은 부러졌고 결국 그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삼하4: 4). 

그 후에 그는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광야로 비밀스럽게 옮겨졌고, 로드발이라고 하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막 마을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의 므비보셋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사울 가문에는 완전히 희망이 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일하게 남은 사울 가문의 아들은 두 발을 저는 절름발이입니다. 

사울 왕가의 몰락 후에 다윗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므비보셋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왕자이지만 왕자가 아닌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신체적 장애는 그의 삶을 저주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다윗은 왕위에 올랐고 다윗의 가문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2. 뜻밖의 사건: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러고 나서 약 15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윗은 사울 일가에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단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다윗이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권력을 장악하면 전 왕의 가족들을 일망타진 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후손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발을 다 절기 때문에 목발에 의지한 체 다윗의 군사들이 그의 집으로 오는 것을 바라보던 젊은 므비보셋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비록 그는 다윗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다윗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증오했겠습니까? 동시에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혹시라도 잡히면 죽게 될 테니까요. 다윗이 그를 예루살렘 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를 죽이기 위함일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왕 앞에 붙잡혀 왔습니다. 그는 목발을 옆에 둔 채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사형선고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므비보셋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사무엘하 9: 7)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은 이유는 그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은총을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숨어살 수밖에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과 그와 세운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가문은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나단과 다윗은 생명보다 소중한 우정을 키웠으며, 두 사람은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언약을 세웠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삼상 18: 3) 

언약이란 계약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언약(covenant)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h)에서 유래하며, “서로를 묶는 의무”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은 헌신적인 사랑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언약이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묶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 20: 14-15) 

두 사람 사이의 언약의 핵심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헤세드(인자함)를 서로에게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들의 언약은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삼상 20: 42) 사실 요나단은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가진 왕자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왕권을 확실하게 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다윗을 제거하려는 자신의 아버지 편을 들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언약을 맺었고, 그는 차기 왕이 되는 권리를 내려놓았고,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에 약속을 지켰습니다. 사울 왕에게 속한 모든 밭을 다시 주었고, 항상 다윗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3.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요나단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아담의 가족에서 태어난 우리는 사울 가문의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길을 걸었고, 어둠의 지배에 있는 권세 가운데에서 살았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건널 수 없는 사이에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의 중재자가 되신 것입니다. 마치 요나단이 사울 가문의 사람이지만 다윗과 언약을 맺은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 8)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마치 므비보셋처럼 우리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우리는 화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도 하지 못한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언약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 12)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co-heir)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은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끊을 수 없는 관계” 안에 있으십니다. 마치 다윗이 요나단 때문에 므비보셋을 영광의 자리에 앉히신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십니다. 


결론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일은 무엇입니까?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게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나기 전까지는 성격적으로 삐뚤어져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의 탓이 아니라, 그의 살아온 삶의 흔적 때문일 것입니다. 삐딱한 시선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은혜의 시선만이 그 삐뚤어진 각도를 제자리로 돌릴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입술을 바꾸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랑의 말만이 미소를 머금게 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육체적인 장애보다 어려운 것은 그의 정신적, 영적인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감사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 때문에 베푼 다윗의 은혜 때문에 그의 삶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모두 절고 있습니다. 그의 육체의 변화는 없습니다. 과거의 상처는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변했습니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현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과거는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사울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다윗 가문의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도 비슷한 점이 발견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참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내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는 세 번이나(즉, 수도 없이) 육체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 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 9)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격 없지만 하나님의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 같이 분노, 두려움 속에서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가문에서 다윗의 가문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담의 가문에서 예수님의 가문으로 옮겨왔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교차된 것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교차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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