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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진짜 눈이 멀었는가? (렘 31:7-9; 막 10:46-52; 히 7: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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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눈이 멀었는가? (렘 31:7-9; 막 10:46-52; 히 7:23-28)

<두 눈 먼 제자들과 두 눈 밝은 맹인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본문의 전후문맥을 보면서 전체적인 틀 안에서 봐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여리고에 사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두 사람의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마가복음 8: 22-26절 말씀이고, 두 번째이자 마가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치유 이적이 오늘 봉독한 막 10: 46-52절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가지 맹인을 고친 이야기는 그 앞부분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론이자 새로운 이야기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두 사람의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 사이에 정 가운데 들어가 있는 부분은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막 8장의 맹인 치유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의 서론이고, 오늘 봉독한 10장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 즉 제자도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왜 하필이면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를 앞뒤로 마치 가운데 책을 세우는 양쪽의 책꽂이처럼 배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밝은 눈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 모두는 육신의 눈은 멀쩡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이미 몇 주 전에 막 8: 27-38절에서 살펴본 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실 메시아의 길이 고난과 수치의 메시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사실은 잘도 알고 있었지만 그 메시아가 고난과 수치의 메시아가 아니라 권능과 영광의 메시아로 오해했기 때문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핀잔을 듣습니다(막 8: 33).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영적 소경이라는 뜻이지요. 

그 다음 주의 성서정과는 막 9: 30-37절의 말씀인데, 여기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는 고난과 섬김의 길을 가시려고 하는데 제자들은 노상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불러놓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 8: 35). 

이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지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대접받는 영광의 길이 아닌, 섬기는 희생의 길임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꼭 2주 전에 우리는 막 10: 17-31절의 부자청년 관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었지만 자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울상을 짓고 떠난 청년의 이야기이지요. 이 청년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써 얻는 영생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눈은 버젓이 뜨고 있었지만 영적인 눈이 감긴 소경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에 지난 주 말씀은 외부강사님이 설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읽지 못했지만, 성서정과의 본문은 막 10: 35-45절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치유 받은 이야기 바로 앞에 나오는 제자들의 논공행상 이야기이지요. 지금 예수님은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는 마당에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요구합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주문이지요(막 10: 37). 

이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까닭에 나온 해프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주 중요해진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도에 관해서 가르쳐주신 아주 중요한 내용의 첫 문을 여는 부분도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이고, 또 그 문을 닫는 결론부도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라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육신의 소경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모르는 제자들의 영적 소경 상태가 훨씬 더 큰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 믿어 두 눈을 활짝 뜨다>

이제 바디매오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바디매오는 아마 어린 시절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일할 수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시장통에서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육신적으로 보지 못했기에 늘 가족이나 친구에게 의존해 살아야 하는데, 먹고 사는 것조차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이와 같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바디매오는, 그럼에도 귀 하나는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두 눈을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바로 자기 앞을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써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두 눈은 멀었지만 영은 밝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요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기에 다시 오지 못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당연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윽박질렀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더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여기 바디매오의 믿음에서 두드러진 것이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사실 “믿음”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법이고 두렵기 때문에 중간에 장애물이 생기면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지붕에 구멍을 뚫어 들것에 실린 친구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 바디매오도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윽박지를수록 더욱 더 담대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바디매오의 끈질김이 예수님의 주의를 불러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주목하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해주자 50절에 보면 바디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여기 겉옷은 그 당신 유대인들이 이불 대용으로 입고 다니던 옷인데,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전 재산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불러주시자 자신의 전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부자 청년이 그 많던 재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못한 사실과 너무 좋은 대조가 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의 저자는 부자 청년과 바디매오를 비교하면서 누가 진짜 눈먼 맹인인가를 은연중에 보여줍니다. 시력 좋은 멀쩡한 두 눈을 가졌다고 해서 다 맹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라곤 낮에는 입고 다니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쓰는 겉옷 한 벌이 전부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 그는 앞은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자신의 전 재산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는 육신으로는 소경이었지만 영으로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으로는 두 눈이 밝았지만 영으로는 어두컴컴한 부자 청년과 얼마나 좋은 대조가 됩니까?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로 나갔을 때 이제 예수님은 굉장히 중요한 물음을 던지십니다. 다함께 51절을 봅시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존귀와 영광을 구했습니다. 높은 자리를 구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주님께 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명예, 출세, 행복. 이런 것은 다 아직 영적인 소경 상태에 있을 때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당연히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고자 했겠지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이 말을 듣자마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칭찬하십니다(52절). 

바디매오는 육신으로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바디매오 안에 있는 믿음이 바디매오를 구원했던 것입니다. “구원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디매오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다 건지는 전인격적 구원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을 차례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맹인 치유의 두 이야기를 앞뒤로 배치해서 그 정 가운데에 제자도에 관한 삽화들을 끼워놓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께서 눈먼 소경의 두 눈을 고치듯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이 어떤 길인지 도무지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두 눈 먼 제자들의 영안도 활짝 열려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두 눈이 멀쩡한 예수님의 12제자들과 부자 청년을 비롯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진짜 눈먼 장님인 것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주셨던 질문을 두고두고 되새김질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돈이나 명예나 출세나 권력이 아닌,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처럼 우리의 두 눈이, 영안이 열려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 두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바로 보게 하소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정직한 눈을 뜨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두 눈을 바로 떠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때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항상 낙관적으로만 보아왔던 맑고 순진한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젊은 날 인도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로 하여금 그 아버지 왕이 세상의 고통스럽고 추한 모습은 모조리 숨겨서 보지 못하도록 했다가, 어느 날 석가모니가 궁궐 밖의 온갖 괴롭고 더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 다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두 눈이 갑자기 밝아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다 본다는 사실은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케빈 카터(Kevin Carter)라는 사진기자는 1993년에 아프리카 수단에서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걸어가던 중에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어린 소녀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끔찍하게도 이 소녀의 사체는 잽싸게 날아온 독수리의 밥이 되는 현장을 카터는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 사진으로 인해 카터는 1994년 5월에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두 달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기근으로 죽어가는 그 소녀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은 뒤부터 카터는 그 참혹한 광경을 떨쳐내지 못하고 나무 밑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울부짖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참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본다는 사실은 우리를 유아기에서 벗어나게 해서 더 성숙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더럽고 추하고 끔찍한 것들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눈을 뜰 때 우리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깊고 선한 눈으로 세상을>

이제 이런 눈을 뜨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프레임,” “틀”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철석같이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새로운 눈을 떴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고, 그런 뒤 마침내 잃어버린 두 눈의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디매오는 세상을 볼 때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끔찍한 것을 본다고 할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는 새로운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살이 떨리는 광경도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고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니라 부활까지도 볼 수 있는 새로운 비전, 변화된 시력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어떤 침례교목사님이 사춘기 시절 미시시피의 한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끔직한 참극에 가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흑인차별이 심했던 시절이기에 한 흑인이 군수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가혹한 린치를 당했습니다. 백인들은 이 흑인 청년을 자동차 뒤에 매단 채 자갈밭에 끌고 다니면서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백인들은 마침내 갈기갈기 찢어진 그 흑인의 시체를 공동묘지에 함부로 버렸습니다. 아직 철없던 시절이라 이 목사님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 이 흑인의 시체에 모욕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는지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철없던 시절의 그 참혹한 인종차별이 뼛속 깊이 후회가 되어 깊이깊이 뉘우쳤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우리의 눈이 달라집니다. 온갖 편견과 탐욕과 삐뚤어진 눈이 맑고 깨끗하고 순한 눈으로 바뀝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으로 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 기아, 홍수, 온갖 무서운 테러와 범죄, 등등,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변화된 시각으로 이런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랴?”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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