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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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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행 11:19-26)

2012년의 12월이 되었습니다. 오늘로 주의 강림을 대망하는 대림절이 되었습니다. 예배신학자들은 이 절기를 대림절(Adven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강절, 강림절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교회력에 있어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은 대림절로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4번의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탄절- 12월 25일이 되기 전의 4번의 주일을 대림절이라고 하고, 성탄절에서 4주 전에 맞이하는 주일을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라고 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고 준비하는 사순절을 본받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40일전부터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준비하는 전통이 교회에 정착되었는데, 4번의 주일을 대림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가장 먼저 다시 오시는 예수님, 주님의 재림을 선포하며 기다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천국-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며 기다리고, 후반부로 와서 주님의 탄생을 선포하며, 기다리는 것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2012년 12월이 되었습니다. 2012년 12월 19일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초미의 관심사는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쪼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민족의 역사를 길이 빛내는 인물, 국가의 번영과 한반도 통일에 초석을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사람, 국민 모두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편 가르기를 잘하는 민족으로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장년층과 젊은 층, 때로는 많이 가진 사람과 조금 가진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이북과 이남으로,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뉘어 다투고, 질시하고 반목을 일삼았습니다. 중국과 같이 넓은 땅이라고 하면 동이니 서니, 북이니 남이니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좁은 땅에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지고 갈등이 불거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암담하고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우리는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여 대화를 하다보면 대놓고 화를 내는 것을 봅니다. TV에서 대화하다보면 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웃으며 개진하는데, 몇 사람이 모여 좌담하다보면 중도의 온건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진정 걱정하며 이야기하면, 자기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몰아붙이고, 십중팔구 색깔논쟁으로 비화됩니다.    나중에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시비하고 정죄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나중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불편한 관계요, 앞으로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낙인찍으면서 어색하게 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시대 대통령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서 정직과 신뢰와 세계성을 심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도자는 첫째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두고두고 인정받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not popularity but recognition) 두 번째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리더여야 합니다. (not knowledge but wisdom) 세 번째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not mind but heart) 마지막으로는 군림하기보다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리더여야 합니다. (not reigning but servant) 

이런 지도자상을 놓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나는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도자인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12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길에서 다투고 있을 때에,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6)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란 “남을 가르쳐 이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구원받은 그의 자녀들이요, 섬기는 종들입니다. 섬기는 종으로서의 지도력, 서번트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우리도 몸을 낮추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실천하지 않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큰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과연 누구이며,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삶을 말합니다. 이 제목은 신앙과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데,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라는 말이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교’라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하면, 사실 무슨 뜻인지 한문자로 보아도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기독교(基督敎)라고 할 때, ‘기’라고 하면, 터기(基), 근본 기, 라고 하여 기초가 된다는 말입니다. ‘독’(督)라는 말은 감독할 독, 살필 독, 거느릴 독, 꾸짖을 독, 독촉할 독이라는 말입니다. 한문자로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기독교인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중국인들이 만든 가차문자(假借文字)를 그대로 사용한 말입니다. 가차문자라는 말은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 음(音)만 비슷하면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을 말합니다. 취음(取音)이라고 합니다. 

마카오에 가보니 햄버거 파는 맥도날드 간판에 맥당노(麥當勞)라고 써놓았습니다. 맥도날드 로고는 분명히 맥도날드 로고인데, 맥당노라고 쓰여 있습니다. 읽을 때에는 비슷하게 맥도날도라고 읽겠지요. 영어 간판을 안 쓰고, 자기네 한자와 비슷한 발음이 날 수 있게 가차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음만 비슷하다면 빌려 쓰는 문자를 가차문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국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표기하였느냐 하면 기리사독(基利斯督)라고 했습니다. 중국말로 그리스도를 ‘지리스두’라고 발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리사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길다고 하여 축약형으로 기독(基督)이라 쓰고, ‘지두’라고 발음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우리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한 가차문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기독교(基督敎)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기리사독(지리스두)이 되었고, 다시 축약하여 지두(기독)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중국에서 사용하던 말대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정말 전혀 엉뚱한 말이 되고 보니 현대에 와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한참 설명하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기독교’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칭호는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11: 26에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라는 사도가 다소에 찾아가서 바울을 만나고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고, 두 사도가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부를 때에 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그 이름은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본문 외에 두 번 나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성도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6:28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벧전4:16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은 사람, 제자, 도를 좇는 사람, 성도, 형제들, 믿는 무리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드디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여 이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멸시하고 조소하는 요소가 배어 있으면서도 철저한 정신과 생활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경멸하고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 ’라고 할 때에는 ‘지독하게 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라, ‘예수쟁이’, ‘예수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말하였어도 그 말에는 뼈가 들어 있습니다. 정말 제대로 보고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시시하게 믿는 중에 들은 말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 의의를 정리해보면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종교로 보아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칭호는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었습니다. 저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 분을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왕으로,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디옥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답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를 내어걸었습니다. 지난 11월 16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연세대의 한인철교수는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부정적인 영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받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처럼 사는 삶의 방식을 전면 전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꺼리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이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많은 시간을 기독교인으로 변화된 삶을 말하기도 보다는 구원받는 교리에 치중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창의의 교리를 가르치고, 전파하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자기가 구원받게 된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 알고 말하고 강조해도 구원받은 사람으로 변화된 삶에 대하여는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교리 개혁에 머물렀습니다. 이제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안디옥교회를 통해 모름지기 교회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본질에 충실할 때에 듣게 된 이름이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21에는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예수를 전하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살전1: 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전파가 일어날 때에 능력도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다닐 때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주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22-24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고 했습니다. 

두 사는 강조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의 종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였습니다. 

빌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갔습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나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을 배울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5-26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에 대한 말씀, 인격적인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교회의 생활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잘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형편없을 때도 있습니다. 잘 믿으려고 힘쓰고 있는데, 수준이 오르지 않습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님들은 장로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되고서,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목사가 되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을 들어 말씀드리면, 장로의 자격이 있어 장로 되실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에만 머물지 말고, 장로다운 장로님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조만식장로님 같은 분들이 나와야 합니다. 역시 목사도 한경직목사님 같으신 분을 본받아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고, 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의 부정에 대하여 신문에 보도될 때에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떤 장로님 정치가가 구속되거나 비리에 연루되어 발표될 때에, 아니 먹고 살만큼 있고, 그 자리까지 올라갈 때에 얼마나 피땀 흘렸을 터인데, 아니 그 자리에 올라가서 구속되느냐고 쫓아가서 혼내주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수준을 보시고, 하늘나라에 데려가는 것입니까? 물론, 신분이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맞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소속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였다가 이제는 우리 주님에게 속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입니다. 그리스도의 당원들입니다. “너도 같은 도당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들고 추종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님, 내 안에, 나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을 배울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격적인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삶 부분적으로 배우지 말고, 통째로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 곳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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