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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주인공입니까 (에 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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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인공입니까 (에스더 4:4-17)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자신이 주인공인 것 같은 감정이입 상태로 봅니다. 주인공과 같이 울고 같이 웃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실에서 주인공이 아닌 자신을 안타까워하면서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각자의 인생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가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길 원하십니다. 

<드라마 허 준>의 주인공이 허 준 자신인 것처럼, 우리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라는 인생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11월 이맘때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성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것은 무엇을 먹고 입고 살 것인가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면서 주인공의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읽은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흥미롭고 특징적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아마 이 질문을 이상하게 여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주인공은 에스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에스더는 주인공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운 여성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무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그녀는 여성으로서 당시 최고인 왕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게다가 왕에게 하소연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을 건졌으니 주인공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또 책 제목까지도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더서는 에스더가 아닌 또 다른 진정한 주인공을 보여줍니다. 그는 다름 아닌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입니다. 어떻게 모르드개가 주인공일 수 있는지 몇 가지 근거를 찾아봅시다.  

먼저 에스더서의 맨 마지막 부분인 10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아하수에로 왕의 업적을 정리하면서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일>을 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에스더가 그 후에 왕후로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고, 모르드개가 존경을 받고 민족을 위해 수고한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첫 부분에서도 에스더보다 모르드개를 먼저 언급합니다. 2장 5절 이하를 보면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와의 관계에서 언급됩니다.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촌 여동생으로 등장하고, 모르드개가 아버지처럼 양육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또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명에 불순종하여 왕후의 자리에서 축출된 후 왕후를 다시 얻기 위해 전국의 처녀들 중 빼어난 이들을 모아들일 때, 에스더도 뽑혀 가게 되었는데, 그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다 사람임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고, 에스더는 순종했습니다. 2장 20절을 보면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에스더보다 모르드개가 주도적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이 책은 <에스더서>가 아니라, <모르드개서>라고 하는 게 더 옳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간 사람일까요? 

우선 그는 옳음을 따라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옳음을 추구한 증거는 그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사실 에스더서에 기록된 유다 백성의 위기는 모르드개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왕궁 문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왕이 가장 총애하는 신하는 아각 사람인 하만으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드나들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만일 이 때 모르드개도 하만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3장 1절 이하를 보세요.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르드개는 왜 절하지 않았을까요? 교만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배후에는 모르드개의 깊은 신앙적 판단이 들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하만이 모든 신하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그가 악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모르드개의 성격이 강직하여 이러한 불의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하만이 아말렉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만은 <아각> 족속 사람인데, 아각은 아말렉의 왕들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이는 하만이 아말렉 자손이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아말렉이 어떤 민족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말렉 자손은 이스라엘 백성이 용납해서는 안 될 적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갈 때 가장 먼저 그 앞길을 가로막아 전쟁을 한 나라가 아말렉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아말렉의 피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앞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에스더서 3장 3절 이하에 나옵니다.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유다인임을 밝혔더니>란 말은 절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유다 사람이기 때문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행동 뒤에는 유다 사람으로서의 자존심과 하나님께서 정죄한 사람들에게 절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옳음보다 목적의 이익을 생각하여 비굴하게 엎드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치는 <옳음을 추구한 정도>에 따라 평가됩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옳음을 지키기 위해 아까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옳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이므로 실패자가 아니라 오히려 승리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보세요. 당시 조정에서는 왜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북진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에게 출병하여 왜군을 막아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버텼습니다. 준비 없이 전함을 띄우면 패할 게 뻔하고, 수군마저 몰살하면 조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감히 왕명을 거역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 죽음이 두려워 싸우지 않으니, 당장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살기 위해 피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전함을 만들고 병정을 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장렬하게 싸워 조선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어려운 싸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 안위를 위해 비겁하게 무릎을 꿇을 때, 성도는 옳음을 위해 싸울 수 있어야합니다. 

신앙이란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옳음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됩니다. 달콤한 이익이나 위협이 우리를 무릎 꿇리려 할 때, 옳음을 위해 행동하십시오. 옳다면 거부하기도 하고, 옳다면 뛰어들기도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옳음을 위해, 신앙을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살아가는 사람이 마지막에는 오히려 잃은 것을 되찾는 승리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모르드개는 어려움 속에서도 굴종하지 않고 믿음으로 상황을 헤쳐 나갔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왕명으로 발표되었을 때 모르드개가 얼마나 비통했을까요? 그 모습이 4장 1-2절에 나옵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하만이 온 유다 백성 전체를 죽이려 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런 위기를 만났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저 나 한 사람이 절하지 않은 것이 온 민족이 멸망을 가져오다니, 이런 파국을 가져올 줄은 미처 몰랐어. 지금이라도 하만에게 잘못을 빌자. 그의 신발이라고 핥자. 그가 죽인다면 죽어야지. 내 한 목숨을 던져 내 민족을 구하자.>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만을 찾아가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에게 굴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만을 찾아 엎드리는 대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그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궁궐에 있던 왕후 에스더는 시녀들을 통해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베옷을 입고 운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하닥이란 사람을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하닥을 통해 에스더에게 전한 말이 무엇입니까?  

7-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왕에게 나아가서 유다 민족을 위해 구하라고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굴종하는 대신 가진 모든 것들을 총동원하여 상황과 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의 결심은 강했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 보세요. 하닥을 통해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가 처음엔 난색을 표했습니다. 

10-11절을 봅시다.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아무리 왕후라고 해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에게 나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엄한 법이었습니다. 이미 그 이전 왕후인 와스디가 왕이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다가 쫓겨난 바 있었습니다. 부를 때 나가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부르지 않을 때 나가는 것도 죄였습니다. 에스더는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녀는 아직 마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난처해하는 에스더의 말을 전해들은 모르드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만약 모르드개가 결심이 굳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래,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람이 에스더인데, 그녀마저 해결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린 끝이다. 이제 방법은 하만에게 굴복하는 수밖에 없어...>라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스더를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13-14절까지 다같이 읽어봅시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그는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후가 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에스더가 비겁하게 침묵한다면, 유다 백성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고, 에스더와 그녀의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꾸짖었습니다. 모르드개의 모습에는 두려움이나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는 매우 단호하게 상황과 맞섰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는 유다 백성들이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죽게 하실 리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하만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생각을 한 근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길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혹시 에스더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줄 믿는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가?> 이게 모르드개의 믿음이요, 확신이었습니다. 

모르드개의 강한 메시지를 받은 에스더는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하면서 왕에게로 나아갑니다. 15-16절을 읽어보실까요?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모르드개는 모든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금식하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매달리게 했습니다. 모든 유다 백성들이 모르드개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르드개는 이 위기의 상황을 맨 앞에서 주도했고, 유다 백성들의 걸출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백성들이 기도하면서 매달린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갔고,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에 에스더를 향한 사랑이 끓어오르게 하셨고, 결국 하만의 악이 드러나 하만과 아각 족속은 멸망하고, 유다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에스더서에 나타난 모르드개의 삶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주어진 상황을 주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끌려 다니지 말고, 우물쭈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는 의욕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에스더는 왕후였고, 아름다운 외모가 있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궁궐의 문지기에 불과했던 모르드개가 진정한 주인공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외모가 뒷받침되고, 높은 지위가 있어야만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향력이란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오는 게 아닙니다. 아래서 위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세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이에 비해 이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모세에게 혼자 애쓰지 말고, 천부장, 백부장 등의 중간 지도자들을 세우도록 충고했고, 모세는 그 말을 따름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이드로가 가진 영향력의 결과였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전쟁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군인도 아니었고, 형님들을 면회하러 찾아온 앳된 청년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신앙에 따라, 옳음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아니라,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신분으로 따지면 사울 왕이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그 날의 주인공은 다윗이었습니다. 

역사가 기억하는 인물은 지식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은 옳음을 위해 행동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굴종하지 않고, 믿음으로 싸워 나가는 사람입니다. 

지난 이틀 동안 <글로벌 리더십 서밋. GLS>에 참석해서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모두 상황을 주도하고, 불의와 싸우며, 하나님의 뜻을 확장시켜가는 멋진 주인공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좀 더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더 뜨거운 믿음으로 노력하면서, 더 분명한 신앙으로 살았으면, 지금 더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동안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놓쳤습니다.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흘려보냈습니다. 충분히 어떤 상황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만, 뒤에 앉아 구경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길 원치 않습니다. 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더 강한 신념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더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 간절히,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기도하고, 전도하고, 섬겼다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성장하여 부산의 영적 지도를 바꾸는 교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보다 연약한 교회들을 보면서 만족하고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보다 잘하는 교회를 보면서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 가치와 진리를 위해 일어서십시오. 옳음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어려움이 와도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높이신 것처럼, 우리를 명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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