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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력을 수반한 용기 (삼상 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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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수반한 용기 (삼상 17: 17-30)

작가 톰 클랜시가 쓴 패트리어트 게임이라는 스파이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소설을 보면 주인공 잭 라이언이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버킹엄 궁전 앞에서 우연히 복면을 쓴 테러리스트들이 영국의 왕세자가 탄 자동차를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순간에 잭 라이언이 맨손으로 뛰어듭니다. 그는 과거 해병대 출신입니다. 그래서 테러리스트 한 명을 제압하고 그 사람의 총을 빼앗아서 다른 한 사람을 사살하고 자기도 총에 맞습니다. 그 사이에 테러리스트들은 도망가고 왕세자의 가족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잭 라이언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이제 회복하고 원래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 상황에 뛰어든 것이냐?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것이냐?’ 잭 라이언이 대답하기를 ‘나는 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분노를 느꼈을 뿐이다. 그 나쁜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냥 화가 났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눈이 커지면서 ‘나에게는 화를 내지 마.’ 이렇게 말하는데 물론 이것은 소설이요 픽션입니다마는 맨손으로 무기를 든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느낀 분노 · 감정적인 반응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 사건은 잭 라이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는 영국 사람도 아니고 경찰관도 아니고 또 왕실가족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도 아니고 외국인 관광객으로 가족과 함께 여행을 온 것뿐입니다. 그는 무장을 한 것도 아니고 아주 위험한 상황에 뛰어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나치지 않고 마음속에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에 따라 뛰어들었어요. 관망하지 않았고 계산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느낀 감정도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이에요.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님들 도시락을 배달하기 위에 온 것뿐입니다. 이미 이 전쟁터에는 많은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쟁쟁한 장수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울 것이라면 그들이 싸워야 됩니다. 이것은 다윗의 전쟁이 아니고 다윗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도시락을 배달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듣는 순간 다윗 마음속에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어요. 다윗을 다윗으로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이것을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꿈틀하는 그 무엇, 그의 정신, 그의 spirit(영혼) 아니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 아니면 그것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 수 있는 그의 실력이었던가. 이 세 가지가 다 그에게 있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영이 있었어요. 정신이 있었어요. 이게 없는 사람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죽은 사람이고 영혼이 죽은 사람이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제사장,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갑니다. 그들이 과연 마음속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지나간 것일까. 아니면 뭔가 마음속에 내가 도와야 되지 않을까하는 양심의 뭔가를 느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어요. 히틀러가 육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일국민들이 많았어요. 그들 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으로 끝냈지, 거기에서 더 이상 그 무엇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이것은 용기의 차원을 넘어서 명분을 보는 것입니다. 명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건 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not my business. 내가 누구라고 이런 일에 참견할 수 있겠느냐고 자격지심을 느낍니다. 이차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했을 때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았지요. 

그때 미국에 반전여론이 우세했습니다. 이건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이건 유럽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가 참견하면 안 된다. 이건 남의 문제다, 이런 주장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1941년에 진주만을 폭격한 것이 계기가 돼서 더 이상 이건 남의 일이라고 주장할 명분이 없어지게 된 것이지요. 

다윗도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할 때 그를 저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친형이에요.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친형 맞습니까. 화를 내려면 골리앗에게 내야지, 왜 다윗에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까. 왜 동생의 용기를 교만함, 마음의 완악함으로 치부하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없는 용기가 다윗에게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더 자라기 전에 잘라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양심이든, 우리 안의 의지든, 우리 안의 선한 뜻이든, 용기를 칭찬하는 사람보다 그것을 탓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너는 오지랖이 넓다, 이건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덕적인 평가까지 합니다. 너는 교만하다, 너는 마음이 완악하다, 다윗의 형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만해야 됩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교만이라면 그건 교만이에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교만이라면 그건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교만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교만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들이 하겠지, 이것이 겸손함이라면 이런 겸손함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에 대하여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 갈 것입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누구관대 이런 큰일을 하겠느냐고 주저했다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용기만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차이점입니다. 실력이 따르지 않는 용기는 만용이요, 미련함이요, 무모함입니다. 골리앗의 희생제물이 될 뿐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다윗은 올라갈 능력이 있었지만 올라갈만한 나무를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입니다.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더 용감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패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특별함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34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것이 다윗의 실력의 검증입니다. 검증된 실력, 미리 쌓은 실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행과는 달라요. 이건 요행이 아니에요. 신앙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지만 다윗은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가 쌓아야 될 실력을 갖지 못한다면 그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내 부족함을 정당화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수능시험 때에 수많은 어머니들이 기도합니다. 교회 가서 기도하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절에 가서 기도하는데 만일 어머니들의 기도대로만 된다면 100 합격할 것입니다. 자식에게 실력이 있고 그리고 기도발이 먹히는 것이지, 실력이 없는데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대학에 들어가서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남들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마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기독교’자가 들어가는 단체, 기독교 학교 · 기독교 언론 · 기독교 방송 · 기독교 출판 · 기독교 음악, ‘기독교’자가 들어가는 단체가 그렇지 않은 단체보다도 우수하든가 비등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기독교’자가 들어가는 단체마다 실력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력 · 실력 · 능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청소년들이 불행한 것이 사실이에요. 다른 나라 청소년들처럼 뛰어 놀지 못하고 공부만 해야 되는 것 참 불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뭔가 희생을 해야 실력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비유를 생각하면 됩니다. 베짱이처럼 놀아서 무엇을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업을 하던, 예술을 하던, 운동을 하던, 음악을 하던, 공부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되고 준비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희생해야 됩니다. 희생이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남들처럼 놀면서 남들이 갖지 못한 실력을 쌓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렇다면 뭣 하러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냥 자기 실력대로 살면 되지. 그건 아닙니다. 그거야말로 교만입니다. 성경말씀에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니라’고 했고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높이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실력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다고 했는데 다윗의 중심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길래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다는 얘기냐. 이 다윗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오늘 제가 열거한 그 세 가지가 아닐까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살아있는 정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실력. 이 세 가지를 갖추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것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게 뭐가 특별합니까? 그것 평범한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다윗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것이라면 여러 사람이 나가서 싸우려고 했을 텐데 다윗 이외에는 골리앗과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시 말하면 다윗이 갖고 있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것이었어요.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 세 가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그걸 다 가진 사람이 드물 뿐입니다. 인기는 그 다음의 일이에요. 이것이 없는 상황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 오히려 혼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한 가지를 더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다윗이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골리앗의 말에 분노를 느꼈던 이유는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리고 그가 싸우러 나갈 때 그냥 나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나님은 이것을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용기는 만용으로 끝나지 않고 그 날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 말씀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다윗은 참 좋겠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헛들으신 것이고 ‘나도 해봐야지! 나도 할 수 있겠다!’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놓친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회를 갖고 계신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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