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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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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탄절에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의 양된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죄에서 우리 생명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받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복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5절 말씀이 풍성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게 상을 베푸시고

다윗은 주님에 대해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상’은 밥상을 말합니다. 원수들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만찬 상이 베풀어지고 그 상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왜 하필 평안하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는 그림을 다윗은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한 만찬이 아니라 승리의 만찬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금 원수들은 패하여 우리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승리한 군사들은 기뻐하며 기름진 음식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전쟁을 겪으면 살았기 때문에 원수를 자기 발 앞에 무릎 꿇리는 통쾌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왕들은 발등상이라고 하여 발을 올려놓는 발 받침대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발등상에는 자신이 정복했던 왕들을 자기 발로 밟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통쾌함과 영원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은 아름답고 목가적일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탄원과 관련된 내용들이 더 많습니다. 성경 검색 프로그램으로 ‘원수’와 ‘악인’이라는 단어를 시편에서만 찾아보면 한글성경으로 155 개나 검색됩니다. 시편이 150편인데 매 시마다 근 한 번씩은 악인이나 원수가 등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인이나 원수가 누구입니까? 시편의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시편은 주로 성전예배 때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등장하는 원수들은 주로 민족적 원수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이방 민족이 주로 그 원수들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의인들을 핍박하는 세력들이 악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수들과 악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과 의인들을 보호하십니다. 그 원수들의 목전에서 여 보란 듯이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고, 그들 앞에서 승리의 식탁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원수라고 부를 정도면 그들은 강합니다. 우리 힘이 더 세었다면 우리가 그들을 원수라고도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는 강하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사 왕이 구스의 백만 대군 앞에서 드렸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14:11)

우리 하나님은 불의하게 죽음을 당한 아벨의 하나님입니다. 노예로 고통스럽게 살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고 병들었던 거지 나사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강자입니까 약자입니까? 약자라면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문제 앞에 서면 모두 약자가 됩니다. 암이나 건강의 위기 앞에 선 사람들, 취직이나 시험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사업이나 물질적 어려움을 돌파해야 하는 사람들, 인간관계의 틀어짐이나 사랑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약자입니다. ‘문제들’은 강대한 골리앗처럼 보이고 우리는 메뚜기처럼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전심으로 찾는 자들이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신다는 말씀은 또한 우리 인생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사라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평화로운 식탁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나 가능할 것입니다. 원수들이 내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앞에서도 평화로운 식탁을 즐깁니다. 우리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모든 원수들을 이기고 고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끊임없이 몰아치지만 엄마 품에 안기 아기처럼, 독수리 날개 아래서 두려움을 모르고 잠든 새끼독수리가 누리는 그런 평안함입니다. 원수를 바라보면 두려움과 근심이 앞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하신 손을 바라보는 자는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도 편안히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름으로 바르셨으니

중동의 풍습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면 그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중동 지방은 먼지가 많은데 기름을 바르면 먼지가 씻기고 윤기가 납니다.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이 향유를 옥합에 담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는 눈물로 그 발을 씻고 자기 머리털로 닦은 후 그 발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죄 많은 여인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주인인 시몬이 못마땅해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을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를 손님으로 초청했으면서도 입 맞추지도 않았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책망합니다. 존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색한 시몬의 하나님이 아니라 후히 주시되 누르고 흔들어도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얼굴에 윤이 나도록 복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행복해야 그 행복이 얼굴로 흐릅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고도 그 얼굴이 빛났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1:15) 산해진미를 먹고도 근심과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른 떡을 먹으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잠언서 말씀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우리 얼굴이 빛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강하게 복 주시는 분입니다. 양을 괴롭게 하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는 것들은 파리나 진드기나 옴 같은 것들입니다. 파리는 그 코에 유충을 낳아서 심할 경우 뇌에 이상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옴 같은 질병에 걸리면 전염성도 빠르고 양들은 인간처럼 손을 쓸 수 없기에 머리를 땅에 박거나 서로 부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능숙한 목자는 그래서 아마유와 유황을 섞은 기름을 준비했다가 수시로 머리에 발라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눈에 띌 정도로 편안하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신음하고 있는데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를 치료해 줍니다. 그때 썼던 것이 바로 기름과 포도주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눅10:34) 목자가 양들의 건강하기를 바라듯 하나님은 우리가 강건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예수님 잘 믿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절제하지 못할 때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많은 욕심을 품을 때 그곳으로 병이 침투합니다. 물론 우리는 유전적인 원인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주님의 뜻이 있겠지만 주님의 본 마음은 목자가 양의 건강함을 염려하듯 주님께서는 우리의 건강을 염려하시고 병든 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분이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다는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생활필수품만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치스러운 것도 내게 주시나이다.” 사도 바울도 유사한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주님의 식탁에서는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풍성하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3:3)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자일 뿐 아니라 나를 영화롭게 만드시는 분, 사람들 가운데 내 머리를 세워서 자랑스럽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중동에서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잔에 붓지는 않습니다. 만약 넘치도록 붓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의 표시입니다. 만약 주인이 잔이 비었는데도 채우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잔을 재우되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그 주인이 손님을 여전히 환대하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이처럼 환대하십니다. 환대 외에도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이 연상시키는 그림은 정도 이상으로 넘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게 되는 고백은 내 잔이 넘친다는 고백입니다. 내 인생이라는 잔이 있고 그에 합당한 분량이 있습니다. 이런 내 분량보다도 넘치도록 우리 인생을 축복해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에게 이것은 정말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다윗은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덟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에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사울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프 연주자로 들어갔던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미 사울 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울 왕의 실수와 실패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다윗은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축복하셨을 때 다윗의 고백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8-10) 자기는 죄인이요, 예수를 핍박하던 자로 도무지 은혜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를 강권적으로 부르시고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사도로 삼으셔서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감격에 대한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는 고백은 무엇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연희 권사님이 쓰신 실화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발을 씻기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청년 맹의순 씨의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맹의순 씨는 조선신학교를 다니며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패잔병으로 오인 받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사랑의 전파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늘 찬송을 부르고 시편23편을 외우면서 중공군 포로 부상자들의 병간호를 위해 밤낮없이 봉사하고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과로로 쓰러지고 석방을 앞둔 채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은 맹의순 씨의 모습을 통해 참된 천사를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중공군 포로 환자가 맹의순 씨의 죽음을 추도하며 쓴 글의 일부입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오늘밤, 귀 교회에서 우리의 위로자였고 사랑과 존경의 표적이었던 맹선생의 추도 예배를 드린다기에 우리 모든 사람의 뜻을 모아 서둘러서 이 글월을 드립니다... 선생은 새벽 한 시, 두 시면 늘 병동에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도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시달리는 그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들 앞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하늘에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는 다 그의 얼굴을 보며 그 말씀을 따라 외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맹의순 씨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갇힌 분노,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수고 등 그에게는 별로 감사할 제목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이런 생명의 복음을 주시고 전파하는 사명을 맡기셨다는 감사, 자신의 손으로 이방 땅에 온 지치고 병든 나그네들을 돌보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게 하셨다는 감사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잔이 넘치는 잔이냐 바로 감사하는 자의 잔이 넘치는 잔입니다. 우리 욕심이 크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습니다. 불평하면 불평하는 곳으로 잔이 샙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라도 감사한다면 그 잔은 넘칩니다. 빵 한 조각을 들고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부족한 듯 허기진 사람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감사를 잊은 데 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부족하다는 듯이 여전히 더 많이, 더 빠른 성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마음은 빈곤해진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고백할 말은 무엇입니까? 내 잔이 넘친다는 바로 이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후회 없는 인생, 잘 산 인생이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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