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적 웰빙의 삶 (창 4:16-26)

첨부 1


영적 웰빙의 삶 (창 4:16-26)


한때 유행했던 문화집단 중에 <보보스(bobos)족>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부르주아 보헤미안> 의 줄임말입니다. 정보화시대에 걸 맞는 엘리트그룹을 지칭하는데 보헤미안 또는 히피족의 자유로운 정신 및 부르주아 자본가들의 물질적 야망을 함께 지닌 새로운 문화집단입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그 자유를 누릴만한 물질을 소유하자는 것이죠. 자칫 겉으로 볼 때는 부르주아 같은 삶으로 보이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겉치레를 중시하는 부르주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화려한 외관의 미보다는 내적인 질을 더 중시합니다.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거나 걸쭉한 프랑스 정통 코스요리를 즐기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그 어떤 화학 첨가물도 넣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인 유기농음식을 먹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집단을 <보보스(bobos)> 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단이 유행처럼 번져가더니 그 다음으로 불어 온 바람이 <웰빙(Well-bing)>이었습니다. 도심의 공해와 현대인의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몸의 평화를 추구하고 패스트푸드보다는 유기농 야채와 곡식으로 만들어진 신선한 건강식을 섭취하고자 하며 또 몇 만 원짜리 식사보다는 가벼운 생식을 즐기고, 그 값으로는 향긋한 스파 마사지나 발마사지를 즐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도 헬스클럽이나 요가센터를 찾아 하루의 스트레스를 건전하게 날려버리는 등 삶을 어떻게 즐겨야 한다는 구체적인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몸과 정신이 모두 편안해질 수 있는 마음가짐을 제일 우선하며 남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한걸음씩 쉬어가는 것에 진정한 가치를 두고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처럼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해집니다. 무엇이 잘 사는 방법이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냐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할지라도 인간의 삶이란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즉 변하지 않아야 할 기본바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근면입니다. 성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진실입니다. 보보스 족이든, 웰빙 족이든지 간에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입니다. 저절로 보보스 족이 되고 자동으로 웰빙 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보스건 웰빙이건 그 속에서 삶의 가치를 충분히 얻는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의 삶은 정신이 지배합니다. 그의 정신이 얼마나 건전하며 건강한가가 그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중요합니다. <미술작품>을 보고 우리는 화가의 정신세계를 파악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작가의 정신세계를 엿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에는 작곡가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이 병들면 작품이 병듭니다. 정신이 병들면 삶이 병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정신이전에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더 근원적인 것이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올바르게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지적하고 오늘 본문 속에서도 역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대표적인 몇 가지를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만 어쩌면 이렇게 그 모습이 오늘날과 같은지 모릅니다. 
그 부류를 보면 먼저는 세상에서 가질 것은 다 가졌으나 믿음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부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부러워할 만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가진 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만 그 삶의 중심에 있다면 많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라멕] 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라멕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졌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렸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아내도 둘씩이나 되었고, 자식들도 모두 탁월했습니다. [야발] 은 장막에 거하면서 전문적으로 목축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아들입니다. 또 그 동생 [유발] 은 음악의 전문가였습니다. 또 [두발가인] 이라는 아들은 대장장이로서 동철로 각양 기계를 만드는 유명한 공학도요, 기술자였습니다. 만약에 오늘의 시각으로 [라멕]을 평가한다면 세상은 그를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수 백 년에 걸려서 할일을 한 세대에 이룬 탁월한 집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행복의 전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23-25절에 나오는 라멕이 자기아내에게 남긴 고백을 보면 실제로는 실패한 자였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한 사람 아벨을 죽였지만 라멕은 자기욕심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이라 할지라도, 소년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이고 얻어낸 성공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인데, 자기를 위해서는 벌이 77배나 될 것이라고 스스로 압니다. 

라멕이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자기욕심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몰아쳐서 욕심과 분노로 양을 치게 했고, 분노로 피리를 불게 했고, 분노로 쇠를 녹이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다. 라멕이 성공하기까지 짓밟힌 사람이 얼마나 많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인자가 되어서 거둔 성공이 자랑할 만한 성공입니까? 세상 많은 것을 다 가졌다고 성공자라 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성공 자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방황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이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는듯하다가 금방 없어지기도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인] 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의 삶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그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그가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더욱이 성을 쌓아 정착하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끝없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의식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 존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욕심, 자기 죄 때문에 분노를 이기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농사지으라고 땅을 주셨고, 그곳에서 에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벨을 죽였을 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곳도 그곳입니다. 

그곳이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 진실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내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존전입니다. 이 한 가지의 삶이라도 떠난다는 것은 곧 가인과 같은 불쌍한 삶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고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세계에 갇혀 살다가 최후를 마치는 삶, 이것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성도의 교제를 즐기는 이 일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가치 있는 일임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삶은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셋의 아들 [에노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에노스는 가인의 후손이 아닙니다. 죽은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 에노스의 삶은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 덕을 본 일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발명하거나 개발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벨의 죽음은 믿음의 제사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이 제사가 가인의 분노로 그 손에 아벨이 죽자 사람들은 감히 피의제사, 믿음의 제사를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가인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에노스] 시대에 믿음으로 드리는 신앙고백의 제사, 피의제사, 아벨의 제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에노스]는 [라멕]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성공과 그의 가문의 번성함과 살인마적인 기질 등...어쩌면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데 가장 큰 훼방꾼이었다는 생각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땅에 무서운 죄가 범람하고,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미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고 지연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성실하지 못하고, 내가 진실하지 못하고, 정말 못되게 구는데도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지 않고 참고 계시는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이 시대의 에노스처럼 피의 제사, 믿음의 제사를 꾸준히 한 번도 쉬지 않고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계속 이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 없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방황하는 삶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불신앙적인 일입니다. 오직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사기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할 진정한 삶의 방식이요, 바로 <영적인 웰빙의 삶>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