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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그 날, D-day인가 V-day인가? (살전 4: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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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D-day인가 V-day인가? (살전 4:15-5: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의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 장군은 독일이 자랑하는 명장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뒀습니다. 롬멜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고 있던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게 되면 독일군에게 굉장히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비운 사이,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上陸舟艇) 4,1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백 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연합군 15만 6천명의 어마어마한 군사가 프랑스 해안을 통해 유럽 대륙에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당초 디데이는 6월 5일이었지만, 날씨가 25년 만에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부득불 하루 늦춰 6월 6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입니다. 디데이는 작전을 개시하는 날을 말합니다. 작전을 위해서 정해진 날입니다. 
  
물론 1944년 6월 6일을 디데이로 잡고 작전을 개시했다고 곧바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후 독일군의 최후 저항은 계속되었고, 힘든 전투 역시 계속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연합군은 나찌의 독일을 패배시키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승리를 거둔 날을 ‘브이데이(V-day)’라고 말합니다.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을 디데이로 잡고 작전을 개시할 때, 그냥 날짜를 잡고서 그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막강한 독일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수없이 작전회의를 해야 했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작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만반에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디데이 이후 브이데이까지 역시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독일군을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연합군도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승리의 날인 브이데이를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을 보내주실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암시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든 하나님의 대적자 뱀에게 이렇게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세기 3:15) 여기 ‘여자의 후손’은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마귀의 세력을 짓밟아 하나님께 승리를 가져다주실 메시야 말입니다. 
  
그렇게 메시야를 보내주실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서 4: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 가장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정하신 날짜가 바로 하나님의 디데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디데이 사건입니다.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과 죄악의 세력을 점령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세력을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자신의 세력이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때, 헤롯 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다 죽이고 맙니다. 어떻게든 메시야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슴에 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의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오마’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시 오마’ 약속하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날이 우리에게 브이데이입니다. 승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모든 악한 세력을 전멸시키는 날이 바로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승리의 날인 브이데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5:1-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이 땅에 강림하실 것입니다. 
  
‘호령’은 명령을 뜻합니다. 적군과 싸우러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휘하의 부하들에게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이 떨어지면 군인들은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돌격 앞으로!’ 그러면 포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전진해 가야 합니다. 

또 장수가 ‘후퇴!’라고 외치면, 아무리 전쟁이 우리 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지라도 후퇴해야 합니다. 명령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사격!’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총을 쏴야 하고, ‘사격 중지!’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사격을 멈춰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세상을 향하여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 명령은 특별히 죽은 자들을 향해 외쳐지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며 호령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으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는 베다니라는 동네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한 지 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으로 가시지 않고 곧장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고는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씀에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데, 온 몸은 베로 동여져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져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이 땅에 오실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마치 죽어 무덤에 누워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온 것처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든 성도들이 죽음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브이데이, 승리의 날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승리의 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자들이 주님의 호령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의 그 영광스런 모습을 로마서 5: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생명 안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큰 소리로 호령하시며 이 땅에 오실 그 날이 우리에게 브이데이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호령하는 소리와 함께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하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천사장은 하나님의 나팔 불어 예수님의 재림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는 일곱 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Michael), 계시의 전달자인 가브리엘(Gabriel), 성도의 기도를 주관하는 라파엘(Raphael), 그리고 우리엘(Uriel)과 라구엘(Raguel)과 사리엘(Sariel)과 예레미엘(Jeremiel)입니다.  
  
재림하실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만나러 오실 때에 나팔 소리를 울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오실 때에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연기가 자욱한 시내산에 임재하셨고,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오갔다고 말씀합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재림하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천사장이 나팔소리를 크게 울린다는 것은 심판의 주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팔소리는 예수님의 강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짐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선포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날은 우리에게 승리의 날입니다. 브이데이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시면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면서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브이데이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강림으로 맞게 될 브이데이, 승리의 날을 기다리면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결코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1944년 6월 6일 디데이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에서 승리한 브이데이까지 끊임없는 전투를 해야만 했습니다. 상륙작전에 성공했다고 그것이 곧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의 군인들이 전쟁에 게을렀다면 그들에게 브이데이는 영원히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디데이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제 브이데이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승리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깨어 있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여 즐기며 살라고 말합니다. ‘네 감정에 충실하라.’는 슬로건으로 우리는 유혹합니다. ‘내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 이면에는 우리 인생을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이데이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를 절제하며 깨어 있는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즐기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검증받아야 합니다. 그 때 내 감정에 충실한다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았다면 분명 주님으로부터 책망 들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삶을 엉망으로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텐데 뭐 하러 열심히 일하느냐’며 일하지 않고 놀기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을 꾀어 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데살로니가후서 3:6)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0)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을 거스르며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게 성도다운 모습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나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동에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검소하게 살아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먼저는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주님, 죄악이 만연된 세상에 죄악을 씻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강단 앞에 초 5개를 놓고 불을 켜 놓았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기 촛불 하나만 켜 놓았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두 개의 초에 불이 켜질 것이고, 그 다음주일에는 세 개의 초에 불이 켜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탄절에 가운데 흰색 초에 불이 켜지면서 5개의 초 모두에 불이 켜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울러 대림절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디데이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실 브이데이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승리의 날 브이데이를 선물로 가져다주실 그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거룩한 계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디데이인 성탄절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캐럴에 마음이 들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현혹되어 세상에 정신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디데이인 성탄절이 진정한 성탄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브이데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믿음으로 살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바른 신앙으로 사는 사람만이 브이데이에 주님의 승리에 함께 기쁨의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 유안진(1941-) 씨가 쓴 <까마귀의 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드립니다.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추워야 한다지.

여러분! 어두운 세상이지만,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파묻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는 눈을 감고 더욱 깊은 영적인 세상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유혹하는 길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그렇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법을 바꿔 사는 기간입니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던 우리의 삶을 바꿔 말을 좀 절제하고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이 움켜쥐고 살던 우리의 삶을 바꿔 움켜쥔 것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만을 앞세우며 살던 우리의 삶을 바꿔 이웃과 형제를 존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이익에 너무 민감하게 살던 우리의 삶을 바꿔 세상에서 좀 바보처럼 살더라도 주님의 삶을 닮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 대림절에 우리의 눈을 조금 더 감아보십시다. 세상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감고 다시 오실 주님을 더 많이 바라보며 사십시다. 세상의 이익을 많이 생각하며 살던 우리의 생각을 잠시 멈추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묵상하며 사십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눈을 감고 주님을 향해 조금 더 눈을 뜨고 사십시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불을 끄고 눈을 감아야 한다.’는 유안진 시인의 외침처럼, 너무 바쁘게만 살아왔던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서서 다시 오실 주님을 가슴에 새겨보십시다. 그러면 디데이를 통해서 이루어주신 우리의 구원이 브이데이를 통해 완성될 완전한 승리로 우리 가슴 가득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우리의 가슴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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