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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 하나님의 웃음 (사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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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하나님의 웃음 (사 11:1-5)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12월 첫째 주인 오늘은, 예수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라고 부릅니다. ‘오다, 다가오다’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 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1년 동안의 교회 절기를 교회력이라 부르는데,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 대림절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력의 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 이 땅에서 수난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순절, 수난의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을 지나면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성령강림절이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 달력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각 절기별로 대표성을 나타내는 색깔이 있는데, 대림절은 기다림을 표시하는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보통 네 개의 촛불을 켭니다. 대림절 첫 주를 맞은 오늘 첫 번째 촛불을 켜고, 그 다음 주에 두 번째, 이어서 세 번째, 그리고 성탄절 바로 전 주일에 네 번째 촛불을 켜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씩 초에 불을 붙이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켜진 촛불의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대림절을 위한 전통적인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기뻐하며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이 촛불에서 나오는 빛처럼 그리스도의 축복을 우리에게 내리시어 우리 길을 밝히시옵소서. 주님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오니 이 세상 어둠 속에, 그리고 바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내려주소서. 아멘”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대림’이라는 말처럼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며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을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망’입니다. 마음속에 소원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을 것입니다. 소원을 품고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소망을 품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허무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삶에 기다림만 계속된다면 그 또한 우리의 가슴을 타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과 함께 성취도 주셨습니다. 기다림과 성취, 기다림과 성취.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취에 앞서는 기다림을 주셔서 하루하루를 잡아당기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이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림을 갖고 미래의 시간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다가 깰 때가 가까이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지금은 그저 지나는 순간이 아니라 곧 가까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다가옴의 시간적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설렘이 있습니다. 가슴을 부드럽게 하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곧 성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기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소망과 빛으로, 생명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 그리고 영원한 세계 속에 약속하신 생명과 은혜의 자리를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신앙의 기쁨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약속한 결혼 날짜를 기다리며 하나 되기를 소망하는 기다림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핵심과도 같은 기다림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허망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사건이 금방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추어진 상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져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11장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곳에도 숨겨진 계시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난다고 합니다. 이새가 무엇입니까? 바로 다윗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이새는 그저 농부였고 목자였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문에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별 볼일 없는 것,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큰 가치가 없는 것에서 하나님의 역사, 믿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 메시아의 역사를 시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자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누구도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관에는 작은 방 한 칸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도 예수님을 멸시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나사렛이라고 하는 천박한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이방 지역인 곳,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런 자리에서 자라난 예수가 도대체 무슨 메시아일까?’ 이렇듯 예수님은 그저 비천한 이방 지역의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지극히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아니 비천하고 초라하기까지 했습니다.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배고픈 자로 오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크고 화려한 궁궐이 아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자리로 보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세 그룹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높은 체 하며 으스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이웃을 조롱하는 것,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 하나님은 이러한 태도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탐욕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권력과 재물, 명예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조차 무시하고 그것을 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나님은 가장 겸손하고 긍휼이 많으며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을 하나님은 비웃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교만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자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자였던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분노하며 어린 예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당시 종교 율법을 꿰뚫고 있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자들과 가진 것이 많다며 뽐내고 살던 사람들은 볼품없이 다가온 예수님에게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정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이사야 29:13~14) 

“세상에서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을 내가 무력하게 만들겠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의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조롱과 꾸짖음의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2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시편 2:1)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편 2:4) 

분노하며 헛된 일을 꾸미는 모든 이들을 보시면서 “네가 세상의 왕이냐? 나는 하늘의 왕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들, 힘 있다고 으스대는 사람들, 권력을 뽐내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웃음입니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조롱이고, 교만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리아는 성령께서 오셔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놀랐습니다. 자신처럼 어리고 연약한 여인에게,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여인에게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임한 놀라운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녀의 노래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누가복음 1:48)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1~53)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강렬한 것입니다. 기존의 것들을 뒤집어 놓는 혁명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뒤집어 놓고 있을까요? 바로 인간들의 자랑과 교만, 인간들이 의지하는 자기 힘, 권력과 재물을 향한 끝없는 탐욕, 그것들 때문에 더 잔인해지는 인간사회의 모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다 뒤집어 놓기를 원하셨습니다. 

무언가 휘두를 것이 있다고 자기를 뽐내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연약한 자를 조롱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비웃으심. 그것이 바로 예수님 오심의 내용입니다. 성공만을 추구하면서 달려가는 사람들, 권력에 붙들린 사람들, 돈과 재물의 탐욕 속에 빠진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서, 가장 비천하고 무력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따뜻한 웃음을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이런 힘 있는 자들을 향한 비웃음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웃음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시작을 묵상하면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 99살이 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내년 이맘때쯤 네 아내가 아들을 안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기가 막혔습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는 그 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제가 100세이고, 제 아내가 90세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백 세가 된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라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 내용을 천막어귀에서 엿듣게 된 그녀의 반응 또한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세기 18:12) 

‘내가 이렇게 다 늙어 빠졌는데 무슨 아이를 낳는다고...’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라야, 너 왜 웃느냐?” 사라는 깜짝 놀라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가 웃었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을 보신 하나님은, 그들이 곧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주십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분이신지를 느낍니다.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라의 웃음은 기가 막혀서 나온 웃음이었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여겨서 터진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후, 사라가 아들 이삭을 안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6) 

하나님이 웃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꿔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아, 너희들도 나와 함께 웃어라.”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기쁨의 웃음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웃음을 선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의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신 또 다른 이유입니다. “가난한 자들아, 애통하는 자들아, 고통 받는 자들아, 우는 자들아, 참담하게 절망하는 자들아, 내가 내 아들 예수를 너희에게 보낸다. 예수는 너보다 더 배고프고 너보다 더 가난하다. 너보다 더 절망하고 더 고통을 받는다. 그러니 예수를 통해서 위로를 받아라.” 예수님의 생애는 가난한자, 힘든 자, 외로운 자에게 오셔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소망과 힘을 주시어 그들을 다시 세우신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웃음입니다. 사탄의 종이었던 우리가 죄악 중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 이보다 더 큰 웃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만할 때는 하나님의 웃음이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주님의 은총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웃음은 기쁨과 사랑의 웃음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기쁨의 웃음을 웃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도 울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금방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보며 방긋이 웃어주면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방긋 웃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웃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웃음을 보면서, 마치 어머니의 웃는 얼굴에 웃음으로 대답하는 어린 자녀처럼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아픔과 슬픔들을 다 토해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따뜻한 사랑의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늘도 그 웃음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래서 나 같은 자를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주님을 기쁨과 감사로 노래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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