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삶에 불만이 가득할 때 (롬 12:11)

첨부 1


삶에 불만이 가득할 때 (롬 12:11)


나의 탓만은 아니다.
젊었을 때의 건강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지만, 어른이 되면 건강은 상이고 질병은 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느냐를 보여주는 성적표라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 인생이 늘 이런 정확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를 참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책임이 아닌데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아닐까요?
우리 삶의 문제가 심은 대로 거둔 대로만 산다고 해도 불평이 덜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셨을 때, 모두가 부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고백을 했고,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로, 불신앙의 사람들과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공동체는 같이 짐을 져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누군가 때문에 함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시간이 있지요. 같은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에 누군가 때문에 일어난 아픔을 참고 견뎌야 하기도 하지요.
여러분 중의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머리가 나쁘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에 있다면 용납하겠지만, 내가 태어난 가정, 그리고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우리 집안에 찾아온 불행 때문에 “나의 삶에는 선택이 없었노라고, 그래서 나는 너무나 억울하다고.”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부지런히 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말씀이 정말 듣기 싫은 말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듣고 싶은 이야기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괴리를 참 많이 경험하기도 하지요.

예로부터 기독교 전통에서는 ‘직업’을 'job'이라는 말보다는 'vocation'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밥을 먹고 살아가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지 말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직업을 선택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이 밥 먹고 살면서 소명도 충족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는 대개 이 둘 사이의 괴리에서 존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쓰는 말이 있지요. “어쩔 수 없이!”
이 말은 열심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도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 일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깔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직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 직장을 옮긴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감하게 "직장을 옮겨라!"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참고 견뎌라!”라고 하실까요?

직장을 얻어도 사람들이 모두 만족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만족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직장을 옮기려 하는 사람이 72.6%나 된다고 합니다. 직장이 적성에 맞지 않아 불만족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도 71%나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직업을 통해서 중보의 삶을 살고 공헌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만족하게 헌신하고 희생하고 섬김의 정신을 발휘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을 하되 대부분 대충 적당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삶이 얼마나 불행하고 한심한 삶입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을 통해서 섬기고 중보하고 공헌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선택할 때 아주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선택한 직업에 대해서 불만족하게 되면 이 정신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누는 이유는 어쩌면 능력 있는 사람들, 아니 능력을 키워서 뭔가 결단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아니면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을 살아와야 했던 분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지를 함께 고민하며 말씀을 나눠보려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을 허비한 것 같은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져있을 당신의 삶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동행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라는 말씀이 더 억울하게 들리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억울했을 사람이 어쩌면 모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당시 애굽에서 ‘양치기’는 가장 경멸받는 직업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였던 시절,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돕기 원했고, 그래서 자기 백성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살인자로 알려졌고, 애굽에서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아니 지명수배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가 가진 실력과 권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꿈이 다 날라가 버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추락한 인생은 “게으름”에 대한 문제도 아니었고, 그의 자의적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인생이기에 더욱 억울했을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장을 주목해 보세요.

모세가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가게 되었을 때,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왔을 때 다른 목자들의 위험에서부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딸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아버지에게 그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애굽 같았으면 그의 신분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음 직하지만, 출애굽기 2장 19절에 보니까,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떼에게 먹였나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이제 그는 르우엘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나중에 그 딸 중의 하나인 십보라와 결혼하게 되지요. 모세의 직업 선택은 적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젊은 시절은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자기의 교육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상황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꿈꿨던 미래와는 너무나 다른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참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윈 루처의 책에 보면 참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40년 동안 그가 들은 가장 지적인 말은 양의 울음소리였다.”

열심을 회복하는 길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령과 함께하는 열심을 품고' 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주를 섬기기 위한 열심은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으로는 곧 성령께서 주시는 불타는 열심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열심(enthusiasm : en + theus)이란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불만스런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안에서 열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올바른 방향 안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기업 경영 컨설턴트이며 리더십 연구가인 코비(Seteven Covey)박사는 “시계를 보지 말고 나침판을 보고 살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열심'이 생기고, 어떤 사람에게 섬기는 일이 가능할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열심'이 가능할까요?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과 삶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불림을 받은 때, 그는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계획된 혹은 바라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만족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서 결혼해 얻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방에서 객이 되었다)이라고 지었겠습니까?

모세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이 무엇인가요? 
원망과 배신으로 분노에 찬 인생 가운데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기다리며 인내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주어진 일에 대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태도는 그 사람을 삶을 바꿔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과 직업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지,
정말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동료와 상사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지,
정말 일이 고된 상황인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릴 수 있는지.

기다리지 않는 자에게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달라지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다.”
언젠가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비서처럼 하라!]
자신이 모시는 상사를 가장 잘 보고 배울 기회가 비서에게 있습니다. 비서를 비서로 보는 사람과 비서를 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제가 좋은 상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일하는 목양실에서 함께 사역하는 전도사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묻는 순간, 내가 궁금해하는 순간 돕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기를, 윗사람이 궁금해하지 않도록 생각하고 돕는 것.”
그때부터 비서는 윗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열심” “섬김”이 가능할까요?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내가 생각하기 시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이 일을 주신 주님을 섬기는 태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람 중의 하나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중세의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일에만 관심을 둔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나 헌금, 선행 같은 것이죠.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중세 교회를 보며 종교인들의 이중성을 보았고, 성과 속을 나누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가를 생각하라고 도전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
청소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
성만찬을 집례 하는 사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루터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는 일의 근본적인 차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할 때의 “예배 자세”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중요한 인물 중의 4분의 3이 둔교적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양을 돌보는 목축업자였고,
요셉은 행정가였으며,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은 우리와 동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향해 무엇을 바라보며 가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시절에, 아니 이곳에도 공부를 하기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청소를 하고, 허드렛일을 하고. 

하지만 순례자의 길을 가는 동안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인 룻 그래함은 설거지하는 게 너무 싫었다고 하죠. 그래서 그녀는 싱크대 위에 “매일 하루에 세 번 이곳에서 거룩한 섬김이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고 합니다.

구체적 제안

이제 불만스런 우리의 삶을 주 안에서 주시는 열심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몇 가지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곳에서는 그의 화려한 과거의 경력을 아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살아가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나를 세우시고, 내가 세울 만한 삶이 되지 못할 때는 세움 받지 않는 것이 유익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조바심은 우리 자신을 견딜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어려운 시절과 사람들의 평가 앞에서 좌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모세에게 가장 큰 시험은 자신이 지금 당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년이 아닌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삶 말입니다.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양 떼를 먹이는 일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루한 삶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양 떼를 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불만스런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가만히 보세요. 불만스런 삶에서 인내하며 살았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느 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을 세우려 할 때, “교만” “인간적 방법” “타락”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에게 힘을 주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정말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될 때가 언제인가요?
참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사는데 묵묵히 선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내일 일터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만족할만한 환경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속에서 일어납니다. 힘들고 고된 날이 될 것을 앎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힘든 때를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살아생전에 좋은 날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소탐대실하지 말기를. . .

아마도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돈을 알기 시작할 때, 아니 어른들이 돈을 주면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처음에 동전을 알기 시작한 아이에게 손님이 와서 종이돈을 주면, 형제 중의 누나나 형이 살살 꾀지 않습니까? “바꾸자고”

아니 또 참 신기한 것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같은 현상인데, 동전을 만드는 재질을 다르게 해서 작은 단위의 동전의 크기가 큰 단위의 동전보다 크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작아도 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재정적인 압박 앞에서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위해 저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코주빅”을 끌고 나가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연주하며 활동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경제적 후원입니다. 
저에게 편지를 한 이유는 일화에서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죠. 아마도 후원을 해 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정말 믿음이 없죠. 당장 어려운 것을 아니까 통일교 단체지만, 도움을 받아도 되는 정당성이 없는가? 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분은 저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것이 바로 “소탐대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단체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믿음으로 시작하도록 하셨으면,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 때문에 그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듯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당장 유혹에 굴복하면 경제적인 이득과 편안함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거부하지 못한 유혹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훼손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북한에서 달러를 위조한다고 하죠. 위조한 돈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 훈장을 준다고도 하죠.
당장 어려움을 모면할지는 모르지만, 그 나라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는 것이죠.
북한을 생각하며 가장 안타까운 것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사람과 땅과 자원을 중국에 하나하나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죠.
잘못된 가치와 기준으로 한 나라와 백성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60년대까지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필리핀과 권투를 하는 날이면 온 국민의 관심이 TV에 집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하면 가장 무서운 적수가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이었습니다.

당장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 적어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민족이 이렇게 사는 것, 골짜기마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 정말 치열하게 믿음을 지켰던 우리 신앙의 선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 앞에서, 물질의 빈곤 앞에서 지켜야 할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들. 지금은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과 쓰실 수 없는 사람이 말입니다. 

저는 교인들과 만나 식사를 하거나 사업장에서 기도할 때 그런 기도를 종종 합니다. “하나님, 이 가정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프란시스 쉐퍼가 참 멋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다. 오직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불만족스런 삶이 꼭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우리가 아무리 만족한다 해도 결국 수치를 당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무슨 직업을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기보다 지금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재정적 위기와 환경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쓰임 받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때입니다.


세 번째로,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가장 신실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불만족스런 상황들이란 결국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은 아닌가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가 부지런히 주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는 불의한 문제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나요?

야고보서 5장 4절 말씀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그리고 야고보서 5장 7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이어서 야고보서 5장 9절에서는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 불평등한 대우들을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정의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향한 우리의 갈망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망을 놓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정치와 제도에 대하여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정말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답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신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실한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광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부르심 앞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모세가 40년의 불만스런 삶 가운데서 부르심에 쉽게 나아가지 못한 이유도 그에게 그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백성에게 거절당하면 어떨까 하는 상처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쓰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강권하셨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뜨거운 우유를 마시다 데인 적이 있는 사람은 요거트도 호호 불며 마실 것이다.”
그만큼 상처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 가운데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그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모세의 삶을 통해 보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의 깊이는 왕궁에서, 애굽에서가 아니라 광야와 사막에서 드러났으며, 하나님이 참으로 귀하게 보시는 우리의 믿음은 그분이 우리를 쓰실 때와 말씀하실 때가 아니라, 아직은 침묵하시며 지켜보실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김병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