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별세와 그 유익 (요 14:25-31)

첨부 1


예수님의 별세와 그 유익 (요 14:25-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5-2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8-29)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14:25-31) 


다가온 주님의 별세

주님의 별세가 본문의 주제입니다. 주님은 육신적으로 제자들 곁을 곧 떠나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5.28)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은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 날입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주님은 떠나십니다.   
  
이별은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요, 가장 서글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입니다. 연인 사이의 이별, 친구 사이의 이별, 부부 간의 이별, 부모 자식, 혹은 형제들 사이의 이별 등등. 이별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때로는 이별 대신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별합니다. 세상에서의 이별은 不可抗力의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떠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떠나신다는 말씀이 12번 이상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고별사를 들으면서 근심에 빠졌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16:5-6) 무슨 대의명분 때문에 근심한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가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뭔가 얻을 줄 알고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이 떠나신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닌가?  
  
오늘 죽음 앞에 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삶의 변화가 두렵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예로 들어봅시다. 가정이란 매우 탄탄한 반석 같지만 한 사람만 빠져 나오면 쉽게 흔들립니다. 경제가 흔들리고, 자녀 교육이 흔들리고, 공동체의 안전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에 빠집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그러나 두려움이나 근심은 결코 유익이 없습니다. 근심의 결과는 오직 한 가지, 사망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제자들은 주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실상 주님의 별세는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따라서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을 보장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닫고, 큰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별세가 하나님의 계획이란 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주님은 어떤 철저한 계획 아래 움직이고 계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25)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28)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3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31) 아직 함께 있지만 곧 떠난다! 갔다가 너희에게 온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말한다! 곧 세상 임금이 온다! 그 세상 임금은 아무 권한이 없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만 ‘아버지’란 말이 23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생애와 아버지는 불가분리적인 관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곧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봉사,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생애는 마귀 때문에 많은 벽에 부딪쳤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들과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 여기 “관계할 것이 없다”는 표현은 아무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다의 반역, 로마 군병들의 체포, 빌라도의 심문, 사형선고, 십자가 죽음. 이 모두가 마귀의 권세 때문에 이루어진 일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일정일 뿐입니다. 마귀는 예수 생애에 단 한 점의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에 터럭만큼도 방해하거나 막지 못했습니다. 마귀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공동의 목표를 가진 적이 없고, 공동의 관심사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주님의 행동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는 단순히 가룟 유다의 배신이나 로마 총독이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패배도 아니며, 구원의 실패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포기하신 것도 아니며, 죄인들을 포기하심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직 아버지가 설계하신 구원의 드라마에 클라이막스입니다.(엡1:3-6,고전1:18)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의 방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1-32,38-39)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십자가는 종점이 아니라 한 없이 높아지시는 출발점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1) 십자가는 제자들에게는 더 큰 축복의 시작이요, 주님에게는 가장 존귀한 자리로 복귀하시는 귀환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별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들은 정말 주님의 십자가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계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외형상 고난의 상징이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나 번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모든 생애가 아버지의 뜻이듯이, 제자들의 생애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성취됩니다. 주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우연이 아니며, 허술한 인간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생애도 마찬가집니다. 막연하고 우연한 삶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 뜻은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십자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애를 설계하시고, 우리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오늘 내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때로는 내 삶의 실패와 아픔,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출생과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때로는 죽음을 통해서도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믿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내 생애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13:47) 주님이 별세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유익을 보장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심으로 주신 첫 번째 유익은 성령이 오신 일입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본문26절에서 또 반복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26) 성령의 출처를 다시 한 번 밝히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오시되 예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15:26에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 동시에 예수님께로서도 나오십니다. 성부와 성자가 다 성령의 출처가 되십니다.
  
성령의 최대 역할은 진리 교훈입니다.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고차원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자기가 기왕에 가지고 있던 모든 철학과 율법과 사상과 신분과 지위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신앙은 최고의 지식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인간 영생의 지혜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 관한 신령한 지식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지식은 전혀 생소한 것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가르치신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우리 마음에 깨닫게 하십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사람의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14)
  
성령은 교회의 안내자입니다. 성도 개개인에게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유지토록 하십니다. 성령은 교회의 설립자십니다.(행2:1) 

성령은 복음의 증거자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5:32) 베드로와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외쳤습니다.(행4:8, 5:27) 성령은 예루살렘 성도들 무리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감격적인 체험을 주셨습니다.(4:31) 성령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교회의 악을 제거하셨습니다.(5:3,9) 

성령이 집사를 세우시고,(6:3,5) 성령이 스데반을 순교케 하셨습니다.(행6:8,10,7:55) 성령이 빌립에게 구스 내시를 전도케 하시고(8:29,39) 성령이 베드로에게 고넬료를 찾아가라 하셨습니다.(11:12)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우시고,(13:2,4) 성령이 바울에게 아시아 전도를 마치고 마게도니아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16:6,7)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성령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최대의 유익한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아시고 성령께 순종하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주님이 떠나심으로 주신 두 번째 유익은 평안, 혹은 평화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얻은 두 번째 선물입니다. 평안은 인류 최대의 주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화를 찾는 방랑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어디 있는가, 찾아 헤맵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스위스에 있습니까? 아니면 스웨덴이나 남태평양, 혹은 아마존 정글 속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가 없는 줄 알고 죽음으로 평화를 찾습니다. 죽으면 평화 세계가 내게 다가올까요?
  
어떻게 하면 평화가 이루어질까요? 사상가들은 새로운 사상의 진보가 평화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나 혁명가들은 새로운 제도나 혁명이 평화를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합니다. 병법가들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하고, 문명의 신봉자들은 문화가 발전하면 평화 세계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법률가는 법으로, 사회학자들은 망가진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호소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성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를 취재한 KBS 기자들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 땅에 종교는 있는데 평화는 없다! 오늘 이 땅에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은 없는데 평화도 없습니다. 음식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만족은 없습니다.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첨단 과학은 우주를 향한다고 하는데도 평안은 없습니다. 병원에서 맹장, 위, 심장, 간, 신장, 뼈, 골수까지 수술할 수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수술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해도 평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마당에 평화의 주제로 돌아오셨습니다. 인간 최대의 꿈인 평안이 어디에 있느냐? 주님이 오신 목적이 평화 문제의 해결이요, 인간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주님이 주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화의 所在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평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평화가 인간 본성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각 나라마다 평화와 관련된 인사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인사말에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샬롬(평화)이란 인사말이 있습니다. 영어에 헤어질 때 인사말에 good by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God be with you란 말의 준말입니다. 사람마다 평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만 평화는 원래 사람에게 없고 막연하지만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평안이 인간 자신에게 없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기대합니다.
  
주님은 오늘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 이란 말은 평안의 소유자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주노니”란 말은 “divdwmi”(디도미)로써, gift 곧 선물을 준다는 뜻입니다. 평안은 예수님의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말을 환언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평안이 온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천개 만개 맺을지라도 진정한 평안은 유지되지 못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사자들이 모여서 국제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전쟁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요. 이번에는 더 죽도록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제연합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유엔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전쟁이 그쳤나요? 오히려 전 인류는 두 편으로 나뉘어 반세기 동안의 냉전을 치렀습니다. 그 냉전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가 겪은 6.25는 바로 동서 냉전의 산물입니다. 한미 방위조약이 평화의 수단이 아닙니다. 법이 나, 국가 권력이나, 군대와 경찰도 평화의 수단은 아닙니다. 

인간 속에 평화의 능력이 없는 한 평화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인간적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제가 어떤 곳에 갔더니 문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평화”란 귀절이 붙어있습니다. 평화라는 글귀가 붙어있다고 그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다 평화로울까? 평화는 구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누가 손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영원합니다. 잠시 얻는 위안이 아닙니다. 한번 얻으면 영원히 지속됩니다. 셋째로, 절대적입니다. 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상의 상태가 아닙니다. 환경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헬라인들은 소극적 의미에서 평화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 합니다. 그러면 망우리 공동묘지도 평화인가요? 서로 사랑치 않고, 서로 돕지 않고, 서로 무관심해도 싸우지 않으면 평안인가요? 오늘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평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체를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끝없는 교감이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와 소망의 교제가 있습니다. 생동하는 기쁨과 생명의 교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안이요 평화입니다. 즉,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미래를 보장 받는 평안입니다. 축복의 확신 때문에 오는 신앙의 평안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어도 평안했습니다. 그는 파사 왕에게 오히려 문안합니다. “왕이여 만세수 하옵소서”(단6:21)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준 죄로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은 옥중에서 실라와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행16:25) 

예루살렘의 지하 감옥에 갇혀서 내일이면 사형당할 운명에 있던 베드로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깊은 잠에 떨어져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몰랐습니다.(행12:6-7)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던 사울 왕은 정신이 산란해서 잠을 못 이루었어도, 들판에서 양을 치던 다윗은 악령들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단잠을 잤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긴 항해 중에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군인도 선장도 선주도 혼비백산해서 정신이 빠졌어도, 바울은 뱃전에 서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평화 찾지 마세요.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신 직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21,26) 그리고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20:22) 주님의 평안은 별세하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 평안을 얻으세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