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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의 눈을 뜹시다!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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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눈을 뜹시다! (눅 17:11-19) 

<나병환자 10명 예수님을 만나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7: 11-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다가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은 치명적인 질병이지요.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고 통증마저 사라져 온몸이 썩어문드러지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감각이 없어져 도무지 아프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코나 귀가 떨어져 나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기 이전에 나환자들이 잠자는 방에는 꼭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길렀다고 합니다. 잠자는 사이에 쥐가 발가락을 물어가도 모르기 때문에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나병은 무엇보다도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나환자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의 몸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옷과 집도, 나환자가 관계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보았습니다(레 14: 55).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나환자들은 동네에서 쫓겨나 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병에 걸린 것도 서러운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정말 큰 고통이었지요. 나환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하여 일체의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레 13: 45절에 보면 나환자가 동네를 지나갈 때 혹시 사람이라도 만나면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크게 고함을 질러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나환자 10사람을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들은 율법에 규정한 그대로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도 먼저 “나는 부정하다!” 하고 고함을 질렀겠지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전염되지 않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부탁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부탁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돈을 달라는 의미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이제 10명의 나환자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우리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14절을 보세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먹을 것, 입을 것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몸을 보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렸거나 나았다는 사실을 진단할 수 있는 권세는 의사가 아닌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레 14: 1-9).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하는 말속에는 나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그동안 잃어버린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공민권의 회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10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놀라운 치유가 일어난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분명히 10명의 나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다 깜짝 놀랐겠지요! 각기 제사장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몸이 나은 것이지요. 그런데 9명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오직 한 사람이 자신이 병 나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서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10명 중에 오직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바로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신원을 밝힙니다. 


<감사를 아는 오직 한 사람>

10명의 나환자가 길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도 놀랍지만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병환자 그 자체만 하더라도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환자인데다가 사마리아인은 이중으로 퇴짜를 받는 불행한 사람들 중에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났을 때 북이스라엘에 살던 이들입니다. 이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별 쓸모가 없는 하찮은 사람들만이 일부 수도인 사마리아에 남게 되었는데, 문제는 앗시리아의 정복군주가 다섯 개의 외국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에 살게 했고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혼인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순혈주의가 워낙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훼손시키기 위해 잡혼정책을 썼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잃게 되었는데, 문제는 남유다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이내 뿌리 깊은 적대감이 생겼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설사 우연히 만나더라도 개가 고양이 보듯이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아주 오랜 관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환자인데다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이중의 수치요, 이중의 왕따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사마리아인 나환자 한 사람이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되돌아왔습니다. 큰 절을 하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모두 10명이고 그 중에 아홉은 예수님과 똑같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 9명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마리아 나환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몹시 서운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17-18절을 다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0명이 고침 받았는데 9명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foreigner, outsider) 한 사람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정말 감사해야 할 같은 동족인 정통 유대인은 감사하지 않는데, 유대인과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감사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감사는?>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사실 농사짓는 분들은 들판에서 오곡백과를 거두어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것이 옳겠지만 농사를 안 짓는 분들은 이런저런 감사의 제목을 붙여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너무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경제가 참 어려운 가운데 세 동의 건물을 훌륭하게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역사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시골농부가 도회지에 일을 보러 올라왔습니다. 시장기를 느껴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먹게 되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농부는 식사하기 전에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는 농부의 모습을 처음 본 손님들 중에 장난기가 있는 사람들이 농부에게 농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사는 촌동네 사람들은 모두 당신처럼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드립니까?” 농부가 물끄러미 그 도시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다 저처럼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땅이나 들 잇다 파는 돼지들이라고 부르지요.” 

그렇습니다.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도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을 놓고 볼 때 감사할 제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옷과 먹을 음식, 잠잘 집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위기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셨고 건져주셨습니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못 죽어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감사할 제목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습니다. 우리야말로 아홉 명의 나환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감사도 모르고 뿔뿔이 제 갈 길을 간 아홉 명의 나환자가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놀랍게도 우리보다 훨씬 더 비참한 환경 속에 있는 이들이 더 감사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가 목숨만 건진 것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린 분이 그래도 건강을 잃지 않고 가족들의 사랑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사마리아인과 같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진정한 감사는 남들이 볼 때 전혀 감사할 처지가 아닌 가운데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빌립보교회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보내 계속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격려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거절될 때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이 모자라고 힘들고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 성숙한 감사는 남들이 볼 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야말로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님이 다스리신다는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KTX와 같은 초고속열차를 탈 때 순방향쪽 좌석에만 먼저 타려고 합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열차가 달려가는 앞쪽을 보지 않고 지나간 뒤쪽을 보면 풍경을 보는 것도 그렇고, 특히 멀미가 나는 사람에게는 더 고역입니다. 하지만 역방향으로 앉는다고 해서 아주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좋은 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에는 역방향이었지만, 반대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 갈 때에는 역방향이 순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역방향좌석이 마냥 역방향좌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역방향이 순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역경중에도 감사하면 역경이 순경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절망중에도 감사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를 구원하는 감사를 동반한 믿음> 

이렇게 감사하지 않아도 될 조건 속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와서 감사했을 때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 다함께 19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무나 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말이 참 중요한데, 희랍어 원어에는 “SOZO”로 되어 있습니다. “SOZO”는 “위험에서 건짐 받아 이전의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to rescue from danger and to restore to a former state of safety and well-being)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10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입니다! 다른 9명의 유대인 나환자들도 병에서 고침은 받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왜요? 믿음과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0명이 다 똑같이 치유를 받았지만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은 사람은 사마리아인 혼자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영혼과 육신 모두를 구원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감사를 동반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감사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해줍니다. 10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각기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병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을 뜬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제일 먼저 감사의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감사의 눈을 떠서 세상을 새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못 본다. 사물을 보되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본다.”(We do not see things as they are. We see things as we are.)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있지요. 천사의 눈에는 천사가 보이고 악마의 눈에는 악마가 보이겠지요.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인격이 어떤가에 따라 세상이 그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눈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바꾸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면 신기하게도 세상이 변합니다. 편견이 아닌 공평한 눈으로, 미움이 아닌 사랑의 눈으로, 오해가 아닌 이해의 눈으로, 불평이 아닌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여기 9명의 나환자들은 몸은 고쳤지만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치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 때문에 나병을 고쳤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눈을 떠서 치유의 근원이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자기가 고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근원이요, 새로운 생명의 은인이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와 절을 하고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고서도 도무지 감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9명의 나환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에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은혜가 나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제 저는 마르틴 루터가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제 몸과 제 영혼을, 그리고 제 몸과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일체의 능력까지도 저에게 주셨고 여태껏 보존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양식과 의복, 가정과 가족, 날마다 일할 터전과 그날그날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하시고 모든 악에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제가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을 순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선과 자비 때문에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야말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고, 섬기고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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