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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민 14: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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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민 14:20-45)


지난 주중에 대통령 후보자 3인의 텔레비전 토론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후보가 발언하는 도중에 "남쪽 정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본인도 순간 '아차' 싶었는지 즉시 "대한민국 정부"라고 다시 말하기는 했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그 후보가 평소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을 자신의 진정하고도 유일한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나라 정부' 대신에 '남쪽 정부'라는 표현이 실수로라도 나올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런 말은 그 후보가 평소에도 '북한'을 자신의 조국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대한민국 역시 항상 '북한 쪽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후보는 그저 몸만 대한민국에 있고 국적만 대한민국 국민일 뿐이지 그 마음은 오로지 북조선인민공화국에 있고 김정은 독재자에게 충성을 하고 있는 '종북좌파'임에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로 버젓이 나와서 국민 세금으로 충당되는 선거보조금 26억 원까지 공짜로 받아먹고 있을 뿐 아니라 1퍼센트도 못 되는 지지율을 가진 주제에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에서 온갖 저질스러운 막말을 해대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나라의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저는 그저 억장이 무너집니다. 

비록 자신의 몸은 대한민국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북한의 독재자를 추종하고 있다면 당연히 배신자요 매국노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몸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 있을 뿐 그 마음으로는 당신을 떠나 있는 반역자들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징벌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우선 20절부터 25절의 말씀을 보면 "20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22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열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보고를 듣고 완전히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아닌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곧 그 백성들을 다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려" 하셨지만 모세가 그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당장 전염병으로 몰사당하는 벌은 면했지만, 그 대신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유리하다가 죽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벌을 내리시는 이유를 가리켜 그들이 '나를 시험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멸시한'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몸은 '광야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었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않았던' 반역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비록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멸시하고 불순종하는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경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1. 매사에 걸핏하면 원망 불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본문 26절부터 30절에 기록하기를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원망"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나를 원망하는,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그 원망하는 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 등 네 번이나 '원망'이란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서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또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살펴보면 약 열 번에 걸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홍해에서 위기를 당했을 때, 마라에서 쓴 물을 대하게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를 비롯하여 여행길에 조금 피곤해질 때 등등 그들의 일상사에서 무슨 일만 닥치면 거의 반사적으로 원망과 불평을 내뱉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일 년 몇 개월 동안 그들의 입에서 나왔던 그런 온갖 원망의 말들을 다 듣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대놓고 직접 원망했던 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원망은 대부분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토했던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네 집문 앞에서 울면서 했든지 아니면 자기네 장막 안에서 저희들끼리 중얼중얼했던 불평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는 자기네가 하나님께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혼자서 내뱉은 불평이었든지 가족과 친구끼리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나눈 불만이었든지 아니면 모세와 아론 앞에서 터뜨린 원망이었든지 간에 그 모든 말들을 바로 하나님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는 말로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27절과 28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란 엄청난 구원을 받은 후에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 기적적인 광야생활을 두고 그 무슨 이유에서든지 원망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겼던 그 원망의 버릇,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원망의 악습이 끝내는 바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한 죄로 직결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그처럼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걸핏하면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버릇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된 중생의 삶을 살고 있는 신자라는 사람이 일상사에서 조금 짜증나는 일이 있다고, 조금 힘겨운 것이 있다고 원망의 말을 함부로 내뱉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자가 살아가는 생은 바로 하나님께서 장망성으로부터 '출애굽'시켜 주셨고 날마다 '일용할 만나'로 먹여 주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은혜로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고, 죽겠다."라든지 "이래 가지고는 못 살겠다."라는 말들을 함부로 사용하는, 아니 너무 쉽게 쓰는 악습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 하고 잘 따져 보면 결코 죽니 사니 할 문제는 아닌데도 툭하면 그저 '못 살겠다. 죽겠다.'라는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불신자라면 몰라도 적어도 신자의 입에서는 절대로 함부로 나올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말과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커 가면서도 맨날 울고 보채기만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런 자녀를 보는 부모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혹 하늘 아버지 앞에서의 내 모습이 날마다 바로 그런 못난 자식의 꼴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을 두고 걸핏하면 짜증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버릇이 우리 자신에게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자녀를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보다도 훨씬 더 귀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심각한 죄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악습을 버리고 그 대신에 사사건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자세를 익힘으로써 날이 갈수록 하늘 아버지와 더욱 친근해지는 그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내세의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31절 이하 38절에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37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하여 그 얼마나 불신앙적인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는지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그 가나안 땅이 자기의 "유아"들, 즉 자기의 자녀들이 "사로잡히게 될"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해 가면 자기 자녀들도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악한 부모가 되었던 이유는 바로 31절 하반절에 있는 대로 그들 자신이 그 가나안 땅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교회를 세우면서 여기까지 진행해 온 최종 목표는 오직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복지(福地)에 꼭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가나안 땅이 그냥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점령해야 할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오히려 혐오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나안 땅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술 더 뜬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36절과 37절에 반복하여 기록된 대로 "그 땅을 악평한 자"들로서 바로 '열 정탐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네들만 가나안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그 땅에 대하여 온갖 나쁜 소리를 다 늘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잃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당신께서 약속해 주신 가나안 복지를 '싫어'하고 그 땅을 두고 오히려 '악평'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당신을 "거역"하는 자요 "멸시"(23절)하는 자라고 책망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최고의 약속인 '천당 복지'를 두고서도 그처럼 불신앙적인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를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키우면 자녀 교육에 큰 손해나 날 것처럼 여기는 교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를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석시키면 학교 공부에 큰 지장이 생겨 대학진학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자녀가 SFC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해 보이는 과외공부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계산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자녀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겠다.'고 약속해 주고 계시는데, 부모들은 '그러다가는 내 아들딸이 사로잡혀 죽겠다.'라고 난리를 치는 형국입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천당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교육이요 축복인 줄을 모르는, 실로 답답하고도 무책임한 부모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신앙생활을 좀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 중에 '내가 왜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는가?'라는 따위의 제목으로 글을 쓰는 자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딴에는 교회생활에 대하여 온갖 문제를 제기하며 비판들을 늘어놓기 마련이지만, 정작 진짜 문제는 그 본인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의 핵심에 해당되는 '구원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을 분명하게 가지지 못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라는 이름표는 달고 있어도 그 심령이 천당을 믿지 못하면 결국에는 그처럼 자기만 신앙에서 파선할 뿐 아니라 '온 회중으로 원망케 하는 사람' 즉 다른 사람까지 신앙을 잃도록 기독교를 '악평'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교회'야말로 '광야교회'의 최종 목표입니다. 
바로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 지상교회 안에서 함께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당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몸은 교회에 다니고 있어도 실상은 '악한 회중'일 뿐입니다. 
'광야교회'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가나안 복지'에 대한 소망을 잃어 버렸던 자들은 결국에 가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시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을 잊지 말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약속 이 '천국 소망'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따르지 않는 것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입니다. 

39절부터 45절의 말씀에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38절 이전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고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34절)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 떨어지자 그들은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난" 그들은 마치 진심으로 회개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습니다. 
우선 그들은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고 자기네가 저지른 죄를 인정했는데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서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그 가나안 땅을 이제 와서야 공격해 들어가겠다고 늦어도 한참 늦게야 '열심을 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배가 이미 떠난 후에 그것을 쫓아가서 타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모세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는" 죄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벌도 달게 받아야 마땅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못 들어가게 하신 가나안'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이라고 자기 멋대로 부르면서 쳐들어갔으며 그 결과는 당연히 참패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저 입으로만 '회개'하고 있었지 그 마음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음을 여지없이 보여 줍니다. 
즉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는 대신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는'(22절) 불순종의 죄만 가중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아무리 전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인이 거하는 산지로 올라간다 해도 그것은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는" 무력한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지사일 뿐이었습니다. 

회개한다고는 하지만 그 회개하는 방법을 자기네들 마음대로 정하는 교인들이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너무 오래 교회에 나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다시 교회에 못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장결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자기가 예배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그게 정말 부끄러운 '범죄'인 줄 안다면 당장 이번 주일부터라고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매 연말에 '자원봉직서약'을 할 때가 되면 "작년 한 해 동안에 직분을 받아 놓고도 제대로 충성하지 못했으니 올해는 아예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하는 교인들도 꽤 있습니다. 
물론 자기 딴에는 '겸손'하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그 얼마나 모순된 핑계입니까?
지난해의 불충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여기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에 다시 한 번 더 주시는 기회를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갑절로 충성하는 것만이 참된 회개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불순종해 놓고서도 다시 한 번 똑같은 불순종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일 뿐입니다. 
지난날의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시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을 깨닫고, 늘 입술의 회개기도를 신행일치의 열매로 보여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으로는 분명히 '광야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처럼 고질적으로, 치명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 있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하나님을 끝까지 '온전히 좇았으며' 그 결과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오직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몸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마음이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좇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사건건 원망하는 버릇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 악습은 범사를 두고 감사드릴 줄 아는 마음으로 바꾸어져야만 합니다. 
  
조금만 힘든 일, 어려운 일이 닥쳐도 유달리 쉽게 시험을 당하고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심령 속에 그 무엇보다도 천당 구원의 확신을 굳게 간직해야만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판단, 내 고집만 내세우는 유아독존적인 고질병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신앙과 행실의 유일한 기준인 '성경 말씀'을 청종하며 순종하는 신행일치의 삶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려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교회의 머리 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교회'에 속한 '교인'의 수는 일백만 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서 그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키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신앙인'은 겨우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니었습니까?
  
지상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천상교회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몸은 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천당이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곳'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란 곧 '하나님중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만 함을 기억하면서, 걸핏하면 하나님을 시험하고 멸시하며 불순종하는 '악한 회중'에 결코 빠지지 말고 늘 '하나님을 감사와 소망과 순종 가운데 온전히 좇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신앙인이 됨으로써 저 영광스러운 '천국의 회중'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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