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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 전 3:1-3,11 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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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 전 3:1-3,11 고후 4:16-18)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거리엔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있습니다. 원래 나뭇잎은 물과 이산화탄소와 햇빛이 주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나무에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온도가 낮아지고 햇빛이 약해지면 영양분을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나뭇잎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함께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나무는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 영양분을 아끼느라 나뭇잎을 떨궈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나뭇잎들은 나무로부터 버림받아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낙엽입니다. 사람들은 낙엽을 밟으면서 낭만을 이야기 하는데 낙엽을 밟을 때는 낙엽들이 이렇게 나무로부터 버림받고 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밟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복제양 둘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이렇게 다루고 장난쳐도 되는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교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서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머리가 흰 어른들이 많이 앉아 있었습니다. 눈은 거의 반쯤 감긴 채 앉아 있습니다. 순간 생각나기를 이분들에게 이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참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노년의 인생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따라 보니까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는데 염려되기는 이 젊은이들이 이 설교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설교를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생깁니다. ‘그래도 한번쯤은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 볼 기회가 있어야 하겠다.’ 하는 생각에서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가을은 봄에 비해서 쓸쓸하고 음산합니다. 봄과 여름은 젊은이의 계절입니다. 봄과 여름이 되면 온 산하가 약동하고 새싹들이 돋아나고 꽃이 핍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은 노년의 계절입니다. 어쩐지 쓸쓸합니다. 낙엽이 떨어집니다, 마지막 잎사귀, 죽음의 계절같이 느껴집니다. 

인생도 노년이 되면 쓸쓸하고 허전하고 어쩐지 낙엽처럼 버림받은 기분이 됩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인간도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역할을 하고 소명을 이루다가 마침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간을 잘 관리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정신이 확 깨게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때 

1절을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 8절까지 14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사례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탄생과 죽음 / 죽임과 살림 / 건설과 허묾(2-3), 울음과 웃음 / 슬픔과 기쁨 / 던질 때와 거둘 때 / 포옹과 절제(4-5), 소유와 상실 / 보존과 포기(6), 찢을 때와 꿰맬때 / 침묵할 때와 말할 때 / 사랑과 미움 / 전쟁과 평화(7-8)등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때입니다. 즉 하나님의 때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사람이 볼 때 우연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를 알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문  

또 한 가지는 의문입니다. 9절에서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유익이 있으랴?”고 묻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례들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례들을 보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성경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게 되면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느끼고 알고 깨닫고 이 일로 인하여 자신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노력하고 수고합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한때 “하면 된다.”라는 적극적 사고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정신은 지극히 불신앙적인 표현입니다. 인간주의를 선언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상반된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평안과 은혜와 형통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반대로 아픔과 죽음과 상실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한편에서는 태어나고 결혼하고 칠순잔치 하고 장례식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형통한다고 좋아하고 일이 잘 된다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실패하여 울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이런 평안과 은혜와 죽음과 상실의 때를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의 때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인간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소한 일이나 인간사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와 목적에 상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사의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때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관찰  

10절을 보면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내가 보고 알았다”는 말입니다. 보니 수고뿐입니다. 보고 깨닫고 알고 느끼고 보니 헛수고뿐입니다. 고로 본문은 이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행동하고 취할 태도 2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뻐하라, 선을 행하라, 먹어라, 마시라, 수고하라”(12-13)입니다. 

이상은 인간이 호흡을 지속시키게 하는 자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로 만끽하라, 기뻐하라, 수고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감사하며 먹고 마시는 것이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라”(14-15) 는 것입니다. 

성경 필자는 내가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 그 말입니다. 뭘 깨닫고 알았느냐 하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과정을 알거나 변경시키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장13절에서 말씀하기를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엊그제 한해가 시작되었는데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몇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아무리 아쉬운 일이라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때 국가 조찬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영원을 준비하라“는 제목으로 빌리 그램 목사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 후 “영원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더 말씀을 듣고 싶다”고 말하는 대통령에게 목사는 “다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통령은 암살당해 죽습니다. 

시간은 한번 흐르면 그만입니다. 다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5분만 뒤로할 수 있었으면“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또 하나는 시간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시간은 흐르면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갑니다. 젊음을, 순수함을, 힘을, 다리의 힘을, 곧은 허리를, 기억력을, 아름다움을, 팽팽하던 피부를 빼앗고 어느덧 주름살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배우들이 젊었을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것이 영원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천국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천국을 약속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오늘과 영원의 징검다리인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2가지 준비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노화 준비(aging)”입니다. 노인이 되는 길은 어둠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시에 빛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어둠으로 가는 길은 노년에 당하게 되는 따돌림에 얽매이는 삶입니다. 노년이 되면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고립감을 느끼고 외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때 자기상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상실은 가장 큰 파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인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에는 빛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노년에는 영성훈련을 통해서 현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영성 훈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노년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노년이 되면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돈에 집착하고 그래서 자녀들과 갈등이 심화되기도 합니다. 

또 교회에 와서도 갈등을 조장하여 매사 불평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히 노년에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지기 위해서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노년에 위로받고 우울증이나 각종 질병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노년을 빛으로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죽음 준비입니다. 꼭 노인만 먼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나 다 준비할 일입니다. 그런데 노년이 되면 가장 두려운 것이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죽음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삶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120살을 살면 그것이 복입니까. 그래서 노년에 준비할 점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죽음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너희에게 로 보내라(요16:7)” 고 하였습니다. 예

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선물을 가져다주는 죽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년 영성훈련  

때가 되면 겨울 준비를 해야 하듯이 노년에는 특히 영성훈련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영성준비라 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노년에는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평불만을 많이 하고 때로 분노하기도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공동체에서 불화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영성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적인 훈련입니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 내면을 충실하게 익히고 채우는 일입니다. 나의 내면의 상태가 열악하면 매사가 불만족해집니다. 자꾸 자식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위를 원망하게 됩니다. 환경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노년의 인생이 자꾸만 추해집니다. 나의 내면의 세계를 가꿈으로서 나로 하여금 불평이 아니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즉 나의 내면의 상태를 풍성하게 말씀과 은혜로 채워 나가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외적인 훈련입니다. 이것은 단순성의 삶입니다. 용서하기 입니다. 평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으려면 용서를 통해서 미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기억하기 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만들었던 나쁜 기억들과 흔적들을 지워나가는 일입니다. 나의 삶에 오점들을 지우고 너그럽게 대함으로 나의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동체훈련입니다. 공동체에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남기는 일입니다. 공동체에 귀중한 선물을 남기는 일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영적으로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불필요하게 고집하게 되면 공동체에서 동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에는 지혜가 있어 합니다. 못들은 척,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노년에 크게 배려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년에 귀를 어둡게 하고 기억력을 흐리게 하고 걸음걸이를 느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내 자신이 삶을 절도 있고 절제하게 만드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선용하여 조용한 시간에 영성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노년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인생을 축구경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25세까지는 연습시간입니다. 50세까지는 전반전입니다. 75세까지는 후반전입니다. 90세까지는 연장전입니다. 90이 되었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승골은 대부분 후반전서 터지니까 말입니다. 더 극적인 것은 연장전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때로 연장전에서 골이 터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승부차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십시오. 무엇이나 성숙한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 모습이 곧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습이고 세상에 향기를 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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