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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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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창 11:1-9)


성경을 읽다가 가장 마음 아프고 속상한 구절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한탄하셨다는 말씀입니다.(창6:6)
오죽하셨으면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과 인류를 멸하셨겠습니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도 노아와 같은 의인이 있어 다시 인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시고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남겨 두셨지만 노아의 후손들까지도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는 범죄를 하나님께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노아의 후손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은 흩어짐이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짐은 하나님의 형벌인 동시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생존의 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흩어짐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이 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망과 실패와 불행의 원인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원인이 욕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람을 낳느니라.”(약 1:15)

인간의 죄 된 욕망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의식적으론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높아지려하고, 커지려하고, 많이 소유하려하고, 강해지려고만 합니다. 성경은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하여지고, 커지는 것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무조건 낮고, 약하고, 가난하고, 작은 것을 훌륭한 것처럼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이 성경의 바른 가르침과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 목사님이 두 벌 옷이 없으시고 통장이 없으셨다는 점을 부각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 홈페이지에 한 목사님의 훌륭하심을 무통장과 무소유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잘못하면 멀쩡한 목사들을 많이 훌륭하지 못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욕심 많은 나쁜 목사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벌어진 고액연봉논란에 휘말려 어려움을 격었던 까닭도 바로 그와 같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교회 홈페이지에 제 연봉이 1억 2천 몇 백 만원에 달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수도 없이 많은 비난의 글들이 올라왔었습니다. 그냥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답변만 올렸으면 되었을 것을 제가 엉뚱하게 답을 올려서 문제가 커졌었습니다. 제가 올린 답은 ‘교회가 그만한 연봉을 안 주어서 못 받았다. 나는 그런 연봉 교회가 주면 받는다.’였습니다.

연봉을 작게 받으면 훌륭하고 연봉을 많이 받으면 훌륭하지 않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것은 연봉이 많으면 훌륭하고 연봉이 작으면 훌륭하지 못하다는 세상적이고 속된 논리와 구조가 똑같은 오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장 측 장로님들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되어 강의를 하다가 ‘부자가 되려고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난해야만 훌륭한 목사라고 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장로님이 강의 중 질문을 하셨습니다. 웬만해서는 목사의 강의는 거의 설교적인 성격이 있어서 강의 중 질문을 하여 강의를 중단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강의 중 질문하신 일이나 어투로 보아 상당히 흥분이 되셔서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머리 둘 곳 없이 주리고 목말라 하셨던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 목사들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의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숨도 안 쉬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네 그 때는 장로님들이 없으셔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조금 강하게 한 마디 더 했습니다. ‘지금처럼 장로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우리 목사들 머리 둘 곳 없이 주리고 목마르게 산다면 장로님들 벌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일부러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말구유에서 태어나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방에서 태어나시려고 방을 찾아 이 곳 저 곳을 헤메셨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매정하고 완악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매정함과 완악함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을 엉뚱하게 미화하고 모든 사람들의 삶의 수준을 말구유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는 생각과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영락교회에서 고등부 학생들에게 설교할 때 고3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느닷없이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를 웨쳤습니다. 질문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역시 숨도 안 쉬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아니다.’
너무 쉽게 대답을 하였더니 아이가 싱거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뭔가 저하고 논쟁을 좀 하려고 왔던 모양인데 논쟁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멍해 있는 아이에게 제가 오히려 공격적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 공부 못하지?’ 아이가 당황했습니다. 쉬지 않고 공격적인 멘트를 날렸습니다. ‘난 공부 잘 하는 놈이 그런 질문하는 거 한번 도 본적이 없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가 신념 때문이냐 핑계 때문이냐?’ 아이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핑곕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제 말의 뜻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정말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 해에는 대학진학에 실패하였지만 다음해에는 제법 괜찮은 대학에 잘 입학을 하였습니다. 대학에 진학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대학에 진학을 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실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나태와 게으름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니이체라고 하는 철학자가 ‘하나님은 죽었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자기가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죽인 이유를 하나님은 연약한 것을 소중히 여겨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초인의 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니이체의 철학과 사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무조건 나약한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제가 니이체를 추종하는 사람이 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높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로 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꺼져 가는 등불이 되거나 상한 갈대가 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횃불 되기를 원하시고 누구도 쉽게 꺽을 수 없는 백향목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고지론을 주장하여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되고 성공하는 것이 무조건 죄악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이 그것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잘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조건 ‘대학이 인생의 전부입니까?’를 제게 물었던 미숙한 학생과 같은 수준의 철학으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을 합리화하고 살아서 모든 세상의 고지와 성공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어 준다면 세상은 얼마나 생지옥 같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 고지론에도 위험성이 있고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고지를 변호한 후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욕심으로 고지를 정복하고 그 힘과 능력으로 낮고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섬기지 않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고지를 도구화 하지 않고 목적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지와 성공과 강함과 부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도전하라고 선동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세 제자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이 너무 좋아 그곳에 머물려고 하는 세 제자를 데리시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으로 변화산 고지를 정복한 후 그곳에 머물지 않고, 산으로 내려와 다시 낮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병들고 약하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으로 충만해 진 초대교회는 사탄의 핍박으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흩어짐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버려 두셨습니다.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승천하시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였습니다. 그때는 모이고 뭉쳐서 크게 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힘 있고 강해진 교회를 하나님은 흩으셨습니다. 모일 때가 있고 흩어질 때가 있는 때문이었습니다. 성령 받고 강해지기 전에 흩어지기 부터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고 강해 진 후에 그것에 맛 들여 흩어지지 않고 계속 모이기만 해도 안 됩니다.
흩어지지 않고 계속 커지고 강해지고 높아지려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돈도 어느 정도 벌었으면 흩어야 합니다. 돈이 많이 벌리면 벌릴 수록 그것을 무조건 쌓아두려고만 하지 말고 흩고 나누어만 합니다. 다 흩어도 안 되고 다 쌓아만 두어도 안 됩니다. 다 흩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러나 정말 무섭고 악한 것은 무조건 쌓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쟁적으로 높이 쌓기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하나님을 삼는 것이며 돈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어느 정도 성장하였으면 흩어야만 합니다. 교회도 욕심으로 키우면 바벨탑이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로 바벨탑을 쌓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를 살리시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흩으실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드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이미 그와 같은 작업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가 되면 가만있어도 높아지고, 부해지고, 강해집니다. 그럴 때가 되면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약해지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작정 강해지고, 무작정 높아지고, 무작정 부해지다보면 추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전하게 착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내려오는 훈련을 하여야만 합니다. 흩고 나누는 훈련을 하여야만 합니다. 낮을 때부터 내려오는 훈련을 하여야 하고, 아직 가난할 때부터 흩고 나누는 훈련을 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 높아졌을 때에도 내려올 수 있고, 정말 부자가 되었을 때에도 건강한 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그 바벨탑 쌓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제가 오죽하면 교회로 바텔탑을 쌓는다는 표현을 하겠습니다. 저는 대형교회가 무조건 다 바벨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대형교회는 바벨탑이 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이미 우리 주위에는 바벨탑이 된 교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바벨탑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성입니까? 세상적인 성공입니까? 출세입니까? 권력입니까?
바벨탑이 되어 굳어지기 전에 끊임없이 그것을 흩고 나누는 훈련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요즘 십오조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것이 저희를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가난하다고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목사가 너무 터무니 없이 부자가 되어 돈으로 바텔탑을 쌓는다면 (요즘은 아주 일부분의 목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는 아직 작은 교회입니다.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흩고 나누는 훈련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학교 건축이라고 하는 큰 산을 넘어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학교를 짓기 이전에 먼저 말라위 그물리라에 학교 지을 돈을 먼저 헌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가 만일 수적으로 많이 커지게 된다면 높은 뜻 숭의교회 처럼 또 나누고 흩어서 교회로 바벨탑을 쌓은 우를 범치 않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낮아지고 흩어짐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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