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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요일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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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웰트 스코트(1771-1832)는 죽음 앞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성경'뿐이라고 말했다합니다. 그는 평생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합니다. 그가 임종 시에 사환을 시켜 책을 가져 오라 하였다합니다. 하인은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가져올까요?' 그는 대답했습니다.'책이라면 한 권밖에 또 무엇이 있느냐?' 하인은 스코트씨가 처음 저술한 책을 말하는 줄로 생각하여 그 책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스코트씨는 죽음 앞에서 힘을 다하여 '어허 참, 책이라면 성경 말고 또 무슨 책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하였다합니다. 실제로 스코트씨는 임종 시 성경을 읽으면서, 감격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의 책이라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까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을 통하여 인격적인 성령이 역사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교양서적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고 있으나 역사 서적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법이 있고 미래에 대한 예언도 있으나 성경은 문학 서적이 아니고 법률 서적도 아니며 장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말론적 서적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은 지고의 도덕과 윤리를 담고 있으나 도덕과 윤리의 지침서도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며,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후에 그 기록 목적을 밝히는 자리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 서신을 쓴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성경의 기록 목적을 밝힘에 있어서 믿어 영생을 얻게 하고 영생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 3:16)합니다.

그러기에 요시아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왕하 23:3)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경주일을 맞아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본분을 알게 하는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고 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인생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면서 경외하고 말씀을 순종할 리는 만무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경외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어느 것보다 우선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의 증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과 역사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가 곧 생명의 길임을 알게 합니다.
종교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큰 두 가지 요구 사항입니다. 이 경외와 순종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드리는 영광이며, 상대적 존재가 절대자 앞에 드리는 찬양이며,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 자에게 바치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절)고 하시니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아는 것은 최상의 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결실이며, '사필귀정'에 대한 진리의 확증이며,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빛의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7-1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세상에서의 삶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의존적 존재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돕고 도움 받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애써 무시합니다. 이기주의적이고 혼자의 만족만을 누리려고 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세상에서 남을 위하여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주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만족만을 위한 삶이 인생의 본분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명확히 지적합니다. 그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고 했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극적 장면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주님은 친히 자신의 몸을 대속 물로 바침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한 미국 노인이 백만 장자가 되었다는 분은 웨이만 프리슬리 씨로, 일리노이주 나탄다 읍에서 우체부로 20년 동안 봉직하다가 은퇴한 사람이었다합니다. 그는 은퇴할 때 받은 보잘 것 없는 연금과 은행 예금 1,100불밖에 손에 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82세인 그가 현재 벌어들인 수입은 700만 불,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약 80억원 정도가 된다 합니다. 은퇴한 그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백만장자가 되었을까요? 그는 조그마한 읍의 우체부로 있을 때부터 나무와 꽃과 동물을 사랑하고 이런 취미에 대해 이웃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눠 주는 일을 무척 즐겼다합니다. 그런데 그는 은퇴한 후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합니다. 이웃 사람들의 이런 소원을 안 그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여행단을 조직해서 마이애미로 갔다합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소상하고 친절하게 잘 인도하고 지리를 설명해 주었던지 해변 관광 후 사람들이 다른 관광도 시켜 줄 것을 계속 요구했다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식으로 여행사를 세우게 되었고, 해가 거듭될수록 이 여행사는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서비스, 신뢰를 인정받아 전국에 지사를 둘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합니다.
  
선행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증표입니다. 성도들이 선행으로써 믿는 자의 본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풍성한 복을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함이 인생의 본분임을 가르쳐 주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졸은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시인은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시 139:3-5)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험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수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야 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 34:7)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 34:17)고 합니다.
  
우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알아보시고 얼른 천사를 보내시고 도와주십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갈등으로 갑자기 집을 떠나게 됩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는데, 한참 가다가 지쳐서 빈들에서 돌베개 베고 잠이 듭니다. 그때 꿈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깹니다. 그때 그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탄성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 후 20년 동안 타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늘 지켜보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 결과 거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6장),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3장) 하나님은 그들을 주목하시고 보호하셔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 생일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졸라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온다고 했는데, 다른 아버지들은 다 허락하는데 아버지는 뭐냐 이겁니다. 하도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허락합니다. 아이는 좋아라고 눈보라를 헤치며 친구 집으로 갑니다. 힘들지만 겨우 겨우 도착합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때 눈보라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살금살금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요, 보호하는 시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그 모든 어려움에서 단련하신 후에 더 좋은 인생으로 복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는 말씀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늘 살펴보시고 그들이 선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성을 갖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숨어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찾아내시고 불러내셨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려고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도망갑니다. 니느웨와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집어탄 겁니다. 배 밑창에 들어가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나 곧이어 풍랑이 일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실토하고 바다에 던져집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를 삼켰다가 사흘 만에 토해냄으로 무사히 육지로 귀환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펴보신다는 말이 수없이 거듭 되풀이됩니다.
하갈은 사라의 질투로 쫓겨나 광야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너무나 감격하여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속인 외삼촌에게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렘20:12).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샅샅이 다 살피고 보시고 계시며 우리의 앉고 섬을 아시고 먼데서도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신다'거나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의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계시다는 든든한 마음으로 그의 감찰하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삶만을 주관하시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삶에도 밀접하게 관계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그의 삶을 섭리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복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고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할 때 길을 지도하여 주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정함과 속임수, 권모술수를 동원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삶은 일순간의 만족과 기쁨만을 보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따르지 말라"(잠3:31)고도 하십니다. 악의 흥왕함, 잘못된 길의 성공은 사상누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명을 위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지만 결국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마7:14). 어렵고 힘들고 인내가 필요한 길이므로 누구나 손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인내와 성실로써 그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그러한 삶의 마지막이 풍요한 삶과 생명임을 보증하신다고 가르치는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고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생을 위한 기본 요건이 됩니다. 생명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통해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합니다.

1517년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당시 헌금이나 고행을 통해 공덕을 쌓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구교의 입장에 반대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근거로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참된 의란 인간의 행함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인간에게 주심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와 거의 동시대에 종교개혁을 지도한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거역할 수 없는 믿음의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선택 속에서 인간의 행위가 완전히 배제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고 합니다.
이러한 인생이기에 항상 죄의 종노릇만 하며 악만 행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합니다.  만일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풀 수 없는 죄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 학자들이 선다 싱에게 물었다합니다. '신약에 있는 예수의 피로 구원되었다는 말을 선생님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선다 싱은 이렇게 대답했다 합니다. '내가 버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일이오. 어느 날 나는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셨다.'라고 말씀을 전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질문을 하더군요. 그 때 한 신사가 나서면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참말입니다.'라고 말했어요. 처음에 나는 그가 기독교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기독교인도 아니었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그가 산 속을 걷다가 비탈에서 미끄러져 크게 부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렸다는군요. 마침 그의 아버지가 그를 발견해서 급히 병원에 데려갔으나 그 땐 이미 거의 죽어 있었답니다. 의사가 그를 보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자 기가 막힌 아버지는 의사가 붙들어 '얘는 내 외아들인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사정했다고 해요. 아버지의 애원에 못이긴 의사는 누구든지 피를 내어준다면 살릴 수 있다고 말했고 그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자기 피를 빼서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고 그는 살아났습니다.' 이 버마 사람처럼 나는 산에서 떨어져 영의 피를 잃어 버렸소. 살아날 가망은 이미 전혀 없어 죽음에 다다랐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나에게 부어 주셨소. 그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라오. 누구든지 그 마음을 기쁘게 바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실 때 그의 마음에 '새로운 영'을 주시고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선물을 어떻게 받고 유지할 것인가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이러한 선물이 인류를 위하여 예비 되어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친절히 안내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구원을 받은 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은 만일 그 길에서 낙오되거나 벗어났을 경우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각오를 가다듬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적 구원도 중요하지만 미래적 구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했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요 사도였던 바울도 버림이 될까 염려하였습니다. 이는 주를 따라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우며 힘든 것인가를 반영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일찌감치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한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칭찬과 위로를 듣게 될 것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는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도우 실 것입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바울은 자신을 치면서까지 진리에 복종시킨다고 했는데 성도들도 이런 단단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전투적인 삶을 통해 주어지는 상급이야말로 귀하고 값진 것일 것입니다. 히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승리자들도 바로 이러한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후에 우리들도 그러한 이름 가운데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소련에서의 일이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차 안에서 무신론자와 한참 동안 변론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펴서 읽어 주었지만 그 무신론자는 성경을 빼앗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그 목사님의 서재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으니 세례를 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허락을 하면서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온 낯선 여행객은 "저희 동네에는 예수를 믿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면서 웬 물건이 날아와 가슴에 부딪히고는 떨어졌지요" 그것은 성경이었고 농부는 그날부터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으나 세례 줄 사람이 없어 수소문하여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은 바로 그 목사님이 무신론자에게 빼앗긴 성경이었고 그 무신론자가 내던진 성경이 바로 이 농부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낸 것입니다. 성경이 영생을 알려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까? 성경은 마땅히 삶 하나하나에 기쁨과 소망이 되며 변혁을 가져오는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생명을 위한 말씀의 소망 때문에 근신하고 인내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성경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성경 주일을 맞으며 인생의 본분을 알게 하는 성경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성경 영생을 알게 하는 성경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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