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들의 전쟁 (출 8:25-31,10:10-11)

첨부 1


우리들의 전쟁 (출 8:25-31,10:10-11)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책이든 영화든 싸우는 얘기를 좋아합니다. 
저 같은 경우 5권으로 되어 있는 삼국지를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열 번은 족히 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중에서 2권‘한니발 전쟁’은 한 다섯 번쯤 읽은 것 같습니다.
재미로 치자면 싸우는 얘기, 전쟁 얘기보다 더한 게 없기 때문에 그런데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사실 우리는 평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때로는 싸움이나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치러야 될 싸움, 치러야 될 전쟁을 피하게 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이란 꼭 눈으로 보이고, 뭔가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만 전쟁이 아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무기도 없이 싸우는 전쟁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굶으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지요?
그건 그냥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마귀와 벌이는 한 판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험 당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봤다면, 겉으로는 별 이상을 못 느꼈을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란 형체가 보이지 않는 존재요, 사실 마귀와의 전쟁은 내 정신 속에서 내 스스로 벌이는 갈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전쟁이 치열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꼭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화염이 여기저기서 터져야만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거대한 전쟁터에 들어서서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그냥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진짜 적과 대치하면서 전쟁을 치르는 전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뭐가 전쟁인지, 또 어떻게 그 전쟁을 치러야 승리할 수 있는지, 얘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함께 전쟁을 치르고 함께 승전가를 부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30년 동안 애굽(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더없이 고단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라면 지금 자기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언제 올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오직 기대할 것은 그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가 자기들을 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울부짖음이 드디어 하나님께 들려졌습니다. 
그러자 지도자 모세를 보내주시고 애굽을 탈출케 하셨지요. 
그런데 애굽을 탈출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진 전쟁 끝에야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던 것입니다.   

오늘의 전쟁은 애굽왕 바로와 모세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3500년 후까지로 쭉 연장을 시키면 그것은 우리와 사탄과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철부지들의 소풍놀이가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피하면 여러분의 말년엔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전쟁을 피하면 여러분의 삶은 술 취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애굽을 탈출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명령이고 반드시 승리해야 할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말하지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겠으니 우리 민족을 내 보내 달라! 

그러나 바로는 출애굽기 5:2절에서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잘라 말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한 백성을 절대로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바로 왕이 고집을 피우면 피울수록 그에겐 비참한 패배와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싸움은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즉 우리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마귀 또한 만만치 않지요. 
쉽게 자기 땅을 내주지 않습니다.
작전을 교묘하게 이끌어 갑니다.   
오늘 우리는 사탄과 네 차례나 전쟁을 치르는 이스라엘을 볼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 전쟁은 곧 우리가 치러야 될 전쟁이기도 합니다. 

먼저 꼭 기억하실 게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알아차릴만한 저급한 작전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마귀는 고단수의, 아주 교묘한 작전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전쟁은, 모세가 “우리가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 “ 선언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애굽탈출의 시작이었지요? 
그런데 바로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멋들어진 타협안을 제시하지요. 

오늘 본문 8:25에서 바로가 뭐라 그러지요?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 그럽니다. 
애굽을 떠나지 말고 이 애굽 땅 안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겁니다. 
"애굽을 떠나지 말고 이 땅에서 예배하라! 예배는 드려라. 그러나 너희 신분은 노예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무슨 얘길까요? 
"교회는 나가라. 그러나 너는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지 말아라!" 그겁니다. 
이 작전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가장 큰 작전입니다.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네 가치관, 네 정신, 네 삶은 세상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아라!" 그 얘긴 겁니다. 

여러분 !
마귀가 공격하는 요충이 어딘지 아십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공격한다는 거예요.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예수 팔 생각을 넣은지라!" 
먼저 마귀가 정복한 것은 가룟 유다의 생각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작전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예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지 세상에 속한 자연인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그들의 삶은 언제나 세상 중심입니다. 
세상에 박힌 말뚝을 뽑지 못하고, 언제나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때때로 사탄의 병졸 놀음을 합니다. 
기독교인을 비난하기도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하고, 예수 잘 믿는 사람 박해도 합니다. 
또 이런 사람은 사탄의 CF 모델로도 사용됩니다. 

"저 사람 좀 봐라. 주일엔 가서 예배 드리고, 평일엔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도 저렇게 멀쩡하게 잘 살고 있지 않느냐!"   

애굽을 떠나지 못한 사람, 세상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 
이런 사람은 종교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 종교적 형식은 있을 수 있고, 교회에서 하는 일은 있는지 모르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 살아도 요즘 잘 쓰는 속어로 '찝찝'합니다. 
또한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만 당당하지 못합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실상은 세상, 애굽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에게 나직하고 감미롭게 속삭이지요? 
"아무런 부담없이 종교인으로 지내! 그러다 보면 예배도 드리고, 구원도 받고, 그러다 죽으면 천국도 갈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의 이 타협안에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8:26에 모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같이 읽어 볼까요?)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표현은 점잖지만 그 속뜻은 단호합니다. 
"애굽 사람은 짐승을 섬기는 사람이요, 우리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백성입니다. 당신과 우리는 가치관이 다르고, 주권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르고, 입맛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그 요구는 불가합니다!"   

"변화받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 No!,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세상도 즐기고 신앙도 즐기라? No!,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세상은 공동우승도 있고 무승부도 있느니라?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승부도 없고, 공동우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모세처럼 그렇게 단호한 대처로 첫 번째 전투를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작전에 실패한 사탄이 두 번째 작전을 들고 나오지요? 
물론 무조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역시 매력적인 타협안을 들고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의 작전은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타협안입니다. 
그래서 헛갈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두 번 째 타협안이 뭐지요? 

(8:2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가래요. 수용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다음 말이 뭡니까?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 좋다! 예수 믿어라! 그러나 너무 유별나게 믿지는 말아라.”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좋다. 그러나 열성분자처럼 믿지는 말아라. 티 내고 예수 믿는 것 꼴불견이더라. 예수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주일 날 가계 문 닫고, 예배시간마다 은혜 받았다고 찔찔 짜고, 저녁예배, 금요기도회, 성경공부, 새벽기도회까지 야단법석 떠는 것, 그것 별로 좋지 않더라!” 

이게 사탄과 벌이는 우리의 두 번째 전쟁, 두 번째 유혹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세상에서 우리를 교회로 풀어주는 듯한 유화정책을 쓰지만, 그러나 자기가 쥐고 있는 고삐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단호해야 합니다. 
"사탄아! 네 말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해 봐라" 외쳐야 합니다. 

"열심을 다해 믿어라!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 그렇게 믿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똑같이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발목만 담가놓고 찰싹거리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주제가가 있지요?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또 무릎까지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응답도 곧잘 받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슴까지 담그고 삽니다. 
감동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자기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온 몸을 담그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온전히 맡겨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지요?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마귀는 오늘도 또 우리를 협박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아. 멀리가면 너 빠져 죽어!” 
바로 왕은 우리를 속이고 있어요. 

"내가 너 밥 먹여주고, 집 주고, 옷 입혀 주는 거야.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 광야에서는 예배만 드리고 곧장 애굽으로 돌아오는 거야.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교회 가서는 예배만 드리고, 사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는 거야. 예수 믿는 사람도 타협하며 그렇게 사는 거야. 너 혼자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지 마!"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해지는 겁니다. 
왜 우리 한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무력해졌을까요? 
예수는 믿되 멀리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왜 교회가 세상을 바꾸지 못할까요? 
바로의 타협안에 넘어갔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왜 천만이나 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도 세상이 이렇게 어둡습니까? 
세상에서 멀리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교인이 되어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인텔사의 애드류 그로브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더라!" 

우리 속담에도 "미친 놈이 곰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마귀를 때려잡는 겁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고, 복음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찰 때,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일은 불가능해질 겁니다. 
그러나 우리교회 안에, 세상으로부터 멀리 가려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교회는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할 것입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사탄의 유혹 앞에 우리 주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깊은 은혜의 바다로 뛰어 들어라! 내가 너의 삶을 책임져 줄게!"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집니다. 
애굽에 묶어 두려던 시도도, 너무 멀리 가지 말라던 타협안도 거절되자, 이번엔 세 번째 타협안을 가지고 나오지요? 

10:11절입니다. (다같이)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 나니라" 

"온 가족이 함께 나가는 것은 곤란하니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남자만 가래요. 무슨 말입니까? 
너 혼자만 가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을 꺼꾸러뜨리려는 사탄의 저 집념을 보세요. 

한 두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사탄이 아닙니다. 
이 집념은 도대체 누구한테 있어야 옳은 겁니까? 
마귀에게입니까? 우리에게입니까?   

우리 중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탄은 세 번째 전쟁을 걸어온다는 겁니다.  

그때도 사탄의 작전은 아주 그럴싸한 타협안입니다. 
“좋다! 열심히 믿는 것, 내 말리지 않을게! 그렇지만 너 혼자만 해! 신앙은 자유니까 괜히 남편까지, 자식까지, 이웃까지, 공동체가 어떻고... 그러지 말고 너 혼자만 열심히 믿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는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소위 '공동체'운운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동체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 공동체를 통해 경배 받으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여러분! 
아벨을 죽인 가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듣기만 해도 끔찍한 그 말을 기억하세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기 가족이면서, 또 자기가 죽여놓고도 하는 말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나 우리는 단호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다!' 
"내가 내 공동체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습니다. 내가 내 공동체를 지키는 자입니다. 또한 나는 이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고, 공동체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외쳐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 혼자 가라!"는 사탄의 소리는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데리고 함께 애굽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비엔나 감리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이런 삶을 살라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까지 예배만 드리고 가셨던 분들! 
이제는 모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교회 깊숙이 들어가면 상처받는다. 밖에서 맴맴 돌아라!" 
이건 사탄의 소리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 때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힘들 수 있어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은혜 받는 생활이요, 그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 아버지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 하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신념이 있지요. 
"교역자와 교회,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말입니다.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거기에 임마누엘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너 혼자 믿어라! 아니요! 우리는 함께 믿을 꺼요! 너 혼자 열심 내라! 아니요! 우리 공동체는 함께 성령의 불 가운데 달려갈 거요!" 

그렇게 외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우리와 사탄과의 대리전쟁 격인 모세와 바로왕의 전쟁을 보고 계십니다. 
애굽을 탈출하는 것, 즉 세상적인 것과 결별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 전쟁',‘너나 열심히 예배하라'는 바로의 유혹 앞에 모세와 이스라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아내도 어린아이도 두고 갈 수 없소" 그러지요 
그때 바로는 네 번째 타협안, 마지막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출10:24 (다같이)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양과 소는 두고 몸만 가라는 겁니다. 
양과 소는 뭘 뜻하는 것일까요? 
당시에 양과 소는 재산이었고,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양과 소를 두고 가라는 이 얘기는 무슨 얘기일까요? 
예배를 드리되 물질로까지 예배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바로의 유혹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양과 소!  

물질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겁니다.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유혹인 거예요. 
여기에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물질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애굽을 탈출하던 날 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명령을 떠올려 보시지요. 

출12:11 "너희는 유월절 양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여기서 다른 것은 다 이해가 쉬운데 '지팡이를 가지고 출발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팡이를 의지하고 광야로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웬만한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거의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바로 양을 모는 지팡이였던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가라는 뜻은 애굽을 빠져나갈 때 양을 몰고 나가라는 겁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재산입니다. 
또한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거듭날 때 물질도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는 물질도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겁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는 우리의 물질관도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시고, 거기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어 먹이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지 않도록 해 주셨어요. 
그럼에도 왜 양을 몰고 나가라는 걸까요?   

기억하십시오!
신앙인에게 물질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생존을 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가치관이 분명하지 않을 때 두 가지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물질관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는 금욕주의적인 물질관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풍요를 원치 않으신다고 빈궁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는 자들의 소유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물질적 사명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물질을 더 소유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재물 얻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능력 얻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또 한가지 잘못된 물질관은 물질애착증, 물질집착증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온갖 관심이 물질에 있습니다. 
세상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라면 신앙도 유보합니다. 
교회 안에서 물질 때문에 늘 시험 듭니다. 
물질이 왜 필요한지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양을 몰고 나가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물질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통해서, 하나님 사역의 승리가 있도록 물질을 쓰는 겁니다. 
복음전파를 통한 아버지 나라의 확장을 위해 내게도 넉넉한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물질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물질이 적으나 많으나 근심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이 많건 적건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이제까지 물질을 쫓아가던 피곤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물질이 나를 따라오는 편안하고 기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 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께서 먹여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부어주시는 복으로써 물질이 필요합니다. 원하시면 주께서 흑암 중에 보화와 은밀한 곳의 재물을 내게 주실 줄 믿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바로와 모세 사이에 서 있습니다. 
바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교인이 되라! 그러나 세상적 가치와 욕망을 포기하지는 말아라!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너무 열정은 내지 말아라! 
예수 믿는 것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신앙은 개인적인 거야! 너 혼자만 믿어! 
그래 다 좋다! 열심히 믿어도 좋아! 그렇지만 물질은 잘 붙들어! 교회는 네 주머니에 관심 있어.조심해! 물질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여러분! 
이 유혹들 앞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라도, 먼저 마귀와의 이 유혹 앞에 한 번 치열하게 싸워보기나 하셨습니까? 
아예 싸움도 않고 초장에 항복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주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치관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하고 있습니까?
애굽입니까? 광야입니까? 

언제까지나 얕은 물 가에서 찰싹거리면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졸여서 못가시겠습니까? 

싸워야 합니다! 
사탄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선언해야 합니다. 
"아니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하니이다!"   

변화된 그리스도인 한 명은 만 명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한 교회는 만개의 교회보다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시대를 뒤집고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는 한 명을 세우는 교회! 그게 우리교회여야 합니다.   

더 이상 모세와 바로 사이에서 어느 줄에 설 건가 엉거주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줄에 서서 광야로 나가기를 기뻐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치러야 할 싸움을 피하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맞서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싸울 것을 싸우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승리의 기쁨으로 저와 여러분과 교회가 함께 하나님께 영 광 돌리는 귀한 역사가 계속 일어나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