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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성경속의 두 이야기 (눅 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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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의 두 이야기 (눅 24:1-6)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동시에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대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밤새워 이 성경을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호랑이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지가 들어 있는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이야기 좋아하시는 하나님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참 좋아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오셔서 아담과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이야기 하는 동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때 무슨 대화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 세상, 너희들, 새와 물고기에 대해서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밤과 아침이 어떻게 오는지, 애벌레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밤에는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그 많은 별들이 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도 하나님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어제 하와와 싸운 이야기, 동물들과 신나게 노는 이야기, 새들과 이야기를 나눈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몹시 행복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에덴입니다.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눈 장소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의 관심사이고 인간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관심사와 같습니다. 

이야기 속의 신학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학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어려운 신학의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학에는 항상 어려운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난제는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설명하곤 합니다. 

이 삼위일체 신학은 설명을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원래 삼위일체는 난해하지만 중요한 신학이고 중요한 교리입니다. 원래 신학이나 교리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 이 삼위일체의 신학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납득이 되어야 그 다음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어려운 삼위일체 신학을 이렇게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부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면 말씀 그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토록 좋아하시는 대화의 상대자 인간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해결방안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 죽어야 할 인간을 살리려고 말입니다. 그렇게 오신 분이 성자 예수입니다. 

그 예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해서 승천하였다가 다시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늘 가까이에서 함께 하고 대화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렇게 오신 하나님이 성령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에게 말을 걸으시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 식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그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인간과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또한 인간의 타락과 불순종까지 그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야기와 거역하는 인간들을 달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그리고 때로 말을 듣지 않으니까 벌을 주시는 이야기, 벌을 주시다가 인간이 불쌍해서 은혜를 주시고 눈물 흘리시고 사랑하시는 이야기 등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세상 창조 이야기를 기록하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혼나는 이야기, 가인이 제사 드린 후 동생을 시기하여 죽이는 무서운 이야기,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이야기,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요셉이 이집트로 가서 온갖 고생하고 성공하는 이야기, 모세가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구출하는 이야기 등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이야기들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이야기들 속에는 모두 신학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오늘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뜻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속의 두 이야기

이렇게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독립된 이야기들이며 또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구약의 이야기와 신약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만 이 두 이야기는 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이야기들을 대별하면 두 가지 이야기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의 출애굽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신약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기 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그 뜻이나 의미로 들어가 보면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이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고통 받던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시키신 이야기입니다. 여기 “히브리”라는 말은 “하비루” 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소외된 계층”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떠돌이, 나그네들, 거류민”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 학대당하며 살던 하비루들을 모세를 통해서 건져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하비루들이 해방 받음으로서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이 누군지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억압당하던 자신들을 구원하신 신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하비루들은 그 이후 자손 대대로 이 출애굽 이야기를 나누고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구원받고 해방 받은 날이 유월절 명절입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비루들이 해방 받은 날입니다. 구약성경은 그 중심이 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출애굽 사건은 중심이고 뼈대이고 기둥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해방 사건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말할 때 그 중심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의 핵심은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비루들은 그 후 계속해서 자자손손이 역사를 두고 이 출애굽 사건과 그 사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그 출애굽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하나님이 거론되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이 주는 신학입니다. 

다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구약 성경의 중심이 출애굽 사건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고통당하던 백성들에게 예수께서 함께 고통당하시며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 사건입니다. 그 당시 고난당하던 유대백성들을 “오클로스”라고 부릅니다. 애굽에서 고난당하던 민족을 히브리 즉 하비루라고 부릅니다. 소외계층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시대 가난했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예수시대에 고난 받고 소외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클로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후 하비루들이 날마다 출애굽 이야기를 하며 살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후 백성들은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이야기 하며 살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묶어 놓은 책이 4복음서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사람들은 모이면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하였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모이면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별개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 신약교회는 이 두 이야기를 유산으로 전승받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교회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별개로 하지 않고 함께 묶어서 이야기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모이면 출애굽 이야기와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믿고 동시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들입니다. 오늘 교회의 존재 이유도 출애굽 이야기와 십자가 부활 사건을 말하고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메시지

그러면 이 이야기들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와 구원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죄와 구원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잠시 에덴동산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죄를 지었지만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누군가가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십자가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죄를 지은 인간이 지불하여야 할 대가를 대신 지불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 이것이 성경의 주제이고 십자가의 본질이고 모든 신학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인간만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회복은 자연과 생태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과 생태계는 인간과 공동의 운명체입니다. 인간이 복을 받으면 자연과 생태계도 복을 받습니다. 인간이 심판을 받으면 자연과 생태계도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회복되고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창조론이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구조는 아주 단순한 구조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책망과 벌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다짐도 합니다. ‘다시는 죄를 안 짓겠습니다!’하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을 약속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중심은 상처와 치유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건들도 나옵니다. 그리고 곧 회복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상처받고 에덴을 떠납니다.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시기심으로 동생을 죽이고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채 방황합니다. 아벨은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회복도 치유도 하셨습니다. 

아담 부부가 죄를 짓고 버림받은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곧 찾아가 죄 없는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치마를 해 입혔습니다. 동생을 죽이고 누군가 자기를 죽일지 몰라 두려움 속에서 살던 가인에게 다가가셔서 보호표를 달아주시며 누구든지 이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아벨은 죽었으니까 그것으로 끝이다 하신 것이 아니고 아벨의 피의 호소 소리를 들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상처 입은 인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쫓겨난 하갈과 그의 아들이 광야에서 죽어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시편을 보면 탄식자들의 호소가 가득합니다. 개인의 호소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아픔의 호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호소들을 다 들으시고 그리고 응답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성경에는 상처와 치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기 상처받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나 자신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관심, 치유, 회복,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은 모두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들려주시려고 그렇게 애잔하게 자세하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면 그것이 모두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고난 받는 사람은 곧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거역하였습니까. 거역한 순간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수 그들에게 치마를 해 입히셨을 때 그들의 심정,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날 때 아담 부부의 심정,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의 심정, 그때 동생 아벨 앞에 서 있는 초라한 가인의 심정, 요셉이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애굽에서 살아갈 때의 심정, 야곱이 남을 짓밟고서라도 내 뜻을 이루려고 애쓸 때 도대체 야곱은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야곱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가족을 속이고 야밤에 도주할 때의 심정, 타향살이 20년 동안 야곱은 무슨 심정으로 살았을까. 

이 심정들이 과연 누구의 심정입니까. 그 심정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나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모습이고 나 자신입니다. 그들의 실패와 아픔은 곧 나의 실패와 아픔이요 그들이 모두 실패와 아픔 뒤에 은혜를 입음도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는 죄의 용서입니다. 허물과 용납입니다. 상처와 치유입니다. 죽음과 생명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살림 받음입니다. 사랑, 평화, 정의, 자유, 해방, 화해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축복, 성공, 부흥, 성장, 승리 이야기도 모두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에는 상처받고 죄 지은 나를 치유하시는 모습도 나오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상처받는 심정도 그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담 부부가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고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처음 그 소식을 들으셨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를 보냈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절규하십니다. 

그 절규를 들으시던 하나님은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절규하고 있을 때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군인들이 조롱하는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의 심정은, 죄를 지은 인간이 뉘우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실 때의 하나님의 심정은 또 어떠하실까요. 하나님의 심정은 허물 많고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렇게 죄가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아 새 사람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예수께서 오셔서 어루만지시고 품으심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감격스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는 구원과 회복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사명은 세 가지를 말해야 합니다. 하나는 출애굽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신학입니다. 성경은 모두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비루들이 매일 출애굽을 말하며 하나님을 말 했듯이 오클로스들이 매일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말했듯이 오늘 우리는 매일 출애굽과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그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를 고백하고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숭고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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