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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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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마 6:9-13)


인간은 특별히 두 가지 영역에서 동물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된 존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인간다움의 증거는 "우리가 생각할 줄 알고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산다면 인간다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오셨습니다.  내가 당한 모든 시험을 아시는 아버지, 내 모든 짐을 다 받아주시고 안식을 주시는 아버지 집에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까지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듣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앞에 모든 짐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아버지 앞에 모든 문제를 다 말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응답 받은 감격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이번 한 주간도 승리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은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평가를 합니다.  옛날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오래 다니면 월급이 올라갔습니다.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회사를 오랫동안 다닌다고 해서 대접하고 월급을 더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월급을 더 주는 세상입니다.  오늘과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건강한 것도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것도 능력이고, 남들보다 많이 아는 것도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건강의 능력, 돈을 버는 능력, 지적인 능력, 예술의 능력 등의 이야기는 하지만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능력이 있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건강의 능력이 있으면 건강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비한 힘을 말합니다.  이러한 신비한 힘을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느냐?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할 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불가능하던 것도 가능해 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꿈을 꿉니다.  일반적으로 꿈이라고 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되고, 장차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이다 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치한 꿈입니다.  꿈에도 차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높은 차원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는 꿈이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내다보는 꿈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지평을 꿰뚫는 그런 아름다운 꿈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꿈은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꿀 수 있는 꿈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위대한 꿈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누가 내 옆에 있습니다.  그 사람만 옆에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흥분하게 됩니다.  그 사람만 옆에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즐거워집니다.  사는 맛이 납니다.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말할 수 없는 힘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그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행복하게 합니다.  더불어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생긴 것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다이나마이트가 옆에 있는 것처럼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는 영적인 능력의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며 잔잔한 변화를 일으키는 영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무한한 능력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 말을 많이 하면 수다쟁이가 됩니다.  자고로 수다쟁이는 시끄럽습니다.  덕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면 능력자가 됩니다.  그는 겸손하게 덕을 이룹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해서 능력자로, 겸손히 덕을 세우는 자로, 헌신자로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산마루턱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주님에게서 어떤 영광스러움과 거룩함, 신비로움을 느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고 일어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고 싶다는 기도의 갈증이 생겨났습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본 것은 기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모습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 우리에게 설교를 가르쳐 주십시오."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병자를 고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왭니까?  그들은 기도만이 예수님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설교를 하시기 전에,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어떠한 일을 하실 때마다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후에 위대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도가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임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는 하되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받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응급 처치 상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건물마다 불이 났을 때를 대비해서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 소화기 밑에 보면 "응급시에만 사용하시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내게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만 무릎 꿇고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속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어떻게 시작을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이 기도가 시작됩니다.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이 혼자서 모노 드리마를 하는데 제목이 주기도문입니다.
혼자서 모노 드라마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니까 마이크로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왜 불러?"  그러니까
"아이 나 지금 주기도문하고 있어요.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어, 너 나 부르지 않았니?"
"그러면 다시 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너 나 또 불렀니?"
"아이, 나 주 기도문 하는데 왜 자꾸 방해하십니까?"
"아, 너 그러면 정말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러면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을 어떤 종교에서의 의식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암송하는 일에 급급하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까?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구하여 얻기만 하는 행위이기 전에 앞서서 본질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임재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불렀고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 분은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는 그 분과의 만남 속에 그분과의 대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적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도생활 다운 기도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나름대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 문화적인 경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현대 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컴퓨터의 클릭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 번의 클릭으로 내가 원했던 정보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까지 가서 컴퓨터를 켤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즉시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스마트폰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라는 것도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살아 계실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본질적인 기도에 대한 회의를 갖습니다.  이것은 이런 시대적인 경향과 컴퓨터의 영향이 적지 않게 기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식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컴퓨터식 주기도문.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옵시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트.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컴퓨터와 차별화 되는 특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본질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인격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깊이는 기다림의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는 기도하는 대상인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칭호가 "여호와, 야훼" 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너무 거룩한 이름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멀리 계신 하나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거룩하신 하나님, 이런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아람어에 의하면 아버지라는 거창한 존칭이 없습니다.  대신 아주 간단한 애칭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아빠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아람어로도 "아바"입니다.  아바, 아바.  그래서 아빠란 뜻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단순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특별히 우리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를 때 어떤 행복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빠가 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이 "아빠"하고 부르며 나올 때 그는 행복해 하시며 기뻐하시며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버지와 아저씨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달라고 구합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아닙니다.  달라고 해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 실존주의 작가 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현대인을 그의 작중 인물들을 통해 묘사하면서 자주 이 단어를 썼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 보겠다는 마음을 감히 갖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려워 보이고 멀리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왜?" 하고 다가오시는 아버지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기도란 그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섭리를 펼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초점이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있습니다.  기도란 본질적으로 단순히 내 소원을 만족시키고 내 욕심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필요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차별화 되는 특성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일, 거기에 일차적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잊어버리고 우리의 필요에만 몰두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적 수준의 기도로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인의 신앙이 기복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만 기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기도해야 되지만, 우리의 기도 속에 관심이 오직 나의 필요 밖에는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단순히 내 생각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기도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세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던지면 깨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험난한 이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 문이 열리고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하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설교를 꼴 수백 번도 더 들었습니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기적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살면서도 기도의 응답을 한번도 받 지 못한 기적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이상한 기적의 사람들이 오늘 언양 영신교회 교우들에게서는 없기를 바랍니다.

장작이 잘 타는 비결은 산소입니다.  굴뚝을 열어 놓아서 바람이 잘 통하면 산소가 당겨져서 불이 잘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을 끄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숯을 어떻게 하면 잘 끌 수 있습니까?  물을 붓는 것보다 더 잘 끄는 것은 거기에다 조그만 함석 같은 것을 덮어버리면 불은 꺼져버립니다.  활활 타오르는 참숯을 드럼통에 넣어서 뚜껑을 덮어버리면 불은 꺼지고 시커먼 숯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건강하고 뛰어나도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건강, 영적인 힘은 기도에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은혜만 받고, 기도는 안하고 그냥 나가면 안 됩니다.  산소가 부족하면 사람 몸 전체에 부작용이 생기듯이, 기도는 산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호흡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한 우리들이겠습니까?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내 사업을 잘 경영할 수도 없고 인간 관계가 아름다울 수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하려고 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기도 없이는 제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국가와 민족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을 이루고 싶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문제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삶에는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이 연속되는 것입니까?  왜 모든 인생의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이렇게도 괴롭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왜 실패가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까?  더 말할 것도 없이 기도의 문제입니다.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으니 내 삶 안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위태로운 모험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 없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초라하게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당당한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기도를 통해서만 그런 인생을 살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넉넉해질 수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초라하게 사십니까?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십니까?  왜 그렇게 비굴하게 사십니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들의 삶이 넉넉해지기를 축복합니다.  힘있고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나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자녀를 위한 기도는 자녀들에 대한 확실한 투자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교인된 여러분들은 교회의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를 위하는 가장 값진 사랑은 목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이 또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투자이기도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것도 귀중하고 헌금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과 후대들이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지금 대통령 선거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선택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잘못된 지도자의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수 없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미얀마라는 나라를 보십시오.  1960년대 당시 버마라고 불렸던 지금의 미얀마는 부국이었다.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 된 리콴유가 "버마만큼 잘살게 해주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6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버마식 사회주의와 폐쇄 정책을 고수하면서 역주행이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미얀마는 1인당 GDP 800달러의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 앞에서 다시 도약할 수 있느냐, 아니면 여기에서 주저앉아버릴 것이냐는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힘이 없는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나라가 조선 말기에 뼈아프게 경험했던 사실입니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국민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나라 없는 국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면서 거친 세계 경제적인 거친 풍랑을 헤치면서 이 대한민국호를 잘 항해해 나갈 수 있는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두고 두고 존경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내일부터 대통령 선거일 때까지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합니다.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저녁이나 새벽에 교회로 오십시오.  피곤함과 쏟아지는 잠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전으로 나오십시오.  서로를 격려하면서 함께 기도하러 재단을 두드리십시오.  함께 기도하고 싶은 성도의 영적 무기력함을 깨우십시오.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뜨겁게,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필립 얀시가 '크리스챤 잇 투 데이' 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읽으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당신이 불행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을 추방하십시오.  신을 거절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거절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나의 연약성을 내가 안다면,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깨닫는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호흡할 수도 없는 존재,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 따라서 그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쓰임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가는 그 보람 속에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배우십시오.  기도란 바로 나의 도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는 설레이는 모험,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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