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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오실 그분이 맞습니까? (마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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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분이 맞습니까?(마태복음 11:2-6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교회력 대강절(待降節)은 성 안드레 기념일로 지키는 11월 30일이나 이날에 제일 가까운 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11월 27일보다 이르게 될 수 없고 또 12월 3일보다 늦을 수도 없습니다.

‘어드벤트(advent:내려오다)’라는 어의가 말해 주듯이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이 절기를 지키게 된 것은 A.D. 4 세기경으로 추측되며, 이 대강절은 오늘날에는 4주간에 걸쳐 네 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이는 그레고리 1세 때(A.D.590년 경) 정하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전에는 2주간 혹은 6주간으로 지키던 때도 있었습니다. 

‘헬라 교회’와 ‘모자라빅 교회’ 그리고 ‘브르로시우스 계통의 교회’에서는 40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들은 11월 15일부터 대강절을 지킵니다. 이들은 사순절과 같은 날짜를 가지는데 뜻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 종교회의(A.D.524년)에서는 대강절 중에 결혼을 금하였고, 도루스 회의(A.D.567년)에서는 대강절 중에 성직자의 금식을 명령하였으며, 마숀 회의(A.D.581년)에서는 성도들이 이 기간을 엄숙히 지킬 것을 작정하였습니다. 이 대강절의 의미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밝히 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었던 바로 그 분(요1:1-2)이 인간의 몸으로 오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간절하게 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고 바랐던 것처럼,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3) 또한 '강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자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와 복종으로써 겸손하게 자기의 심령을 살피고 주님의 자리를 마음속에 마련해야 합니다.

4)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처럼, 신자도 재림하실 주님의 길잡이로서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할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절기의 색깔은 자주색을 사용합니다.

대강절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회개의 때요, 자신을 성결케 하는 기간입니다. 동시에 대강절은 부푼 기대와 설렘을 주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마치 '세례 요한이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던 때'에 해당됩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은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렸고 선구자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이'(요 3:31), 혹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였고(요 1:29), '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요 1:27)고 하였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요 1:34).'라고 선포하면서, 최고의 겸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요(마 3:11), '세상을 심판하실 분'(마 3:1)이라고 하면서 메시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례 요한은 분봉 왕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과 그의 모든 악행을 책망하고 비난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는데(14:3, 4)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마카이루스' 성에 약 일 년간 감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예수님께 제자들을 통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중심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은 신뢰에서 견고해 집니다.' 세례요한의 신앙이 감옥에서 잠시 흔들린 것처럼 세상에 사는 동안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고통이나 좌절을 당한 사건이나 일 때문에 신앙이 흔들림이 있다면 성탄의 사건이 역사에서 분명하게 증거 되는 귀한 절기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견고하게 바로 세워야 합니다. 

또한 성탄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대강절에 마치 동방박사나 양을 치는 목동들이 주님을 만난 것처럼 체험 있는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헌신하던 안나나 시므온처럼 주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간증이 있어 더욱 신앙이 견고함으로 바뀌어 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1. 메시아 기대와 실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왔고, 들에서 자랐으며, 양떼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기에 별명이 [광야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산 사람입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으로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이 외침은 독설에 가까운 심판의 선언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이런 세상은 속히 멸망하고 새 세계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자란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사회를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광야 생활은 바로 이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발이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요한의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그의 메시지가 비판적이요. 독설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예비하는 메시아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썩어 빠진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에 이하에 보면, "요한이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위로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사도 요한이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거나 메시야의 명패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휘황찬란한 빛을 가진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 분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고 증거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이렇게 증거하고, 심지어는 요한과 안드레를 비롯해서 자기 제자 서너 명을 예수님께 양보까지 합니다(요1장).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처럼 기쁘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로 큰 자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실망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오실 그이'란 시편 118편 26절의 "야웨(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요, 

말라기 3장 1절의 너희가 구하고 사모하는 자가 임할 것인데 그분은 바로 "언약의 사자"이며, 

요한복음 6장 14절에서는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11장 27절에서는 마르다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했습니다. 

즉 '오실 그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런데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1) 아마, 메시아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2) 메시아를 심판주로만 생각했는데, 자비의 모습만을 보이고 있는 예수님께 대해, 요한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3) 또한 유대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실 정치적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던 당시, 일반의 기대와 요한의 예언이 합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4)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소개하여 인계시키려고,

5) 요한의 구원을 예수께 부탁하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해당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기대한 메시아인 예수가 나타나셨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예언하였던 대 심판의 재난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세력이 물러가기는커녕, 그 세력에 의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모든 불의한 세력들을 때려 부수고, 의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듣는 소식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저 변방(邊方)인 갈릴리 지역에서 바리새인들을 피해 다니며 병든 자들이나 고쳐 주고, 몇 가지 기적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에 반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가장 미련함은 인간의 가장 지혜로움보다 뛰어 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를 향해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신앙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우리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오늘 우리도 요한과 같은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시면 이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이 당장 바뀌고,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오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실 것이라고도 기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오시면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안정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기대가 만족하게 응답되어 본 적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그런 기대를 가졌다가 요한처럼 실망을 맛보기 일수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세상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과거와 똑같이 오늘날도 여전히 악이 흥하는 것 같고 고난과 범죄와 사랑과 미움이 계속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한 번이라도 전쟁이 적게 일어났으며, 하나의 감옥이라도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또는 하나의 국가라도 진정으로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달라지기는커녕 어떻게 보면 더 악해지고 더 불행한 세계가 되지 않았는가?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전쟁은 더 일어나고, 모든 세계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가? 이렇게 볼 때 과연 예수는 우리가 기대한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기대를 갖고 기다릴 때는 오히려 절망을 맛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으로 그가 역사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속에 그의 뜻대로 역사 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 부정을 통해서 나의 기대와 욕망을 완전히 비우고 빈 마음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 속에서 깊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주관이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한 후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어 물었습니다.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하였는데?? "기다리오리이까?"의 단어를 살펴보면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애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질문은 한가하게 노변(蘆邊)에 앉아 토론하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일생을 바쳐 증거 한 메시아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에게 있어서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어지는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요한은 보람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생애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요한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이 질문을 예수님께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자기가 일생을 바쳐 증거 한 메시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 시점에서 그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증거하고 기대했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진짜 메시아가 아니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기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려지는 결론 앞에서 그는 자기의 생애 전체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절망 가운데서 완전히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빈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400백 년 동안 긴 영적암흑기가 계속되던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자이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증거 한 그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메시아임을 믿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보여 주시려는 메시아상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것을 따지려고 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어떤 답을 주시든 받아 드리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이제 동터 오는 새벽 차분하고 빈 마음으로 새것을 받아 드릴 준비를 갖추고 이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과거 자기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간직해 온 자존심과 고집이 깨어지는 고뇌의 밤을 거치지 아니하고는 어렵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젖게 할 만큼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11:4-5절에"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1:1절에 있는 말씀의 자유스러운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사61:1-3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었습니다(사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 세계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 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습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야 직을 적절히 선포하셨습니다. 메시아는 반드시 이사야가 증거 한 일을 하실 것이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내가 그런 일을 하는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하신 말씀의 서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마태복음 11:1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극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칭찬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곧 이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록 세례 요한이 나를 위한 훌륭한 선지자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천국은 세상에 있는 세례 요한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극찬과 세례요한의 부족함에 대한 말씀을 동시에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은 세상에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도 작은 완전치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우리 자신들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대망 사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대망 사상 즉, 메시아와 메시아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들이 경험한 모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메시아가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선 좌절합니다. 

또 어떤 때는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때로는 믿었습니다. 큰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아! 굉장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다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그 믿음을 저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 큰 유감이 있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들은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었다 가도 곧 그 믿음을 저버립니다. 기뻐하다가도 절망합니다. 자기 식의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백말을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대 장군, 모세와 같고 다윗과 같은 겉치장이 화려하고 그 업적이 용맹한 정복자를 그들은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아니하므로 메시아를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으로 감격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 어떤 사건을 만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버리셨는가?' 하면서 믿음을 저버리며 원망을 합니다. 

꼭 종잇장을 뒤집듯이 조석으로 변덕이 심합니다. 왜 이렇게 시원찮은 휘청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것없는 일을 해 놓고도 칭찬해 주지 아니한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 작은 일을 하고서도 천국에 상이 클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기회만 있으면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에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강절이 참회(懺悔)의 기간이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강절은 결코 어린이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 뛰는 그런 절기가 아닙니다. 보라색이 상징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심을 깨는 기간입니다. 진정 겸손한 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빈 구유와 같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될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대답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오실 그이가 진짜 당신입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거기에 직접적인 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감옥 속에서 제자들을 보내어서 까지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절망과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요한이 알기를 원했던 것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약 사백년 동안 긴 영적암흑기가 계속되던 때, 사람들의 마음은 악(惡)할 대로 악해져있고, 말씀에 대한 무지로 가득한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잘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했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불안과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하신 내용을 보면,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교훈한 것은 들은 대로 전하고, 행하신 표적은 본 대로 전하고, 체험한 것은 경험한 대로 전하라.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전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게 된다고 하라. 앉은뱅이가 걷는다고 전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다고 전하며,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하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기원전 700여 년에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인 동시에, 그 예언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 18절에는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고 했고, 이사야 35장 5∼6절에는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으며, 

이사야 42장 7절에는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니 환호성을 지르고,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던 자들이 주를 찬양합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 산 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참된 기쁨의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고 있는 이 나라는 곧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혁명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심판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저주와 보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치유(治癒)와 생명과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히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놀라운 변혁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 세계를 하루아침에 평화롭게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의(義)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선을 이루도록 힘쓰게 만듭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와 세계 속에 많은 문제와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치유와 생명의 역사들이 진행되며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것은 더욱 깊은 악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이 사회를 낙원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 편리한대로 예수를 이해할 때 예수로 인하여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인내로 복음의 사역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옥에서 꺼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마도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고, 새로 태어난 감격을 안고 죽음을 마지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자유하게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혼을 과거의 망령에서 풀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1) 먼저, 성도 개인은 약해도 서로 뭉치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분열하고 나뉘는 것은 죄악이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반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불신하게 하고 성도들로 낙심케 하는 아주 악한 죄악입니다. 이제 교회는 사탄이 좋아하는 더 이상 분열하고 비방하고 당파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 이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집니다.

2) 또한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해야 합니다.

어느 시인은 '늙지 말아라, 성숙해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늙는 것과 성숙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늙는 것은 허무와 쇠퇴와 하락을 의미하지만, 성숙하는 것은 보다 충실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신앙의 연조만 있고 성숙이 없으면 내 고집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숙을 방해하는 모든 불필요한 요인들은 제거해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되게 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버리십시오. 될 일도 안되게 하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주기 쉬운 급한 성격과 혈기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양심조차 굳게 만드는 자기의 고집과 자존심을 버리고, 창녀의 욕망 같은 방탕과 무절제와 정욕을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풍요한 복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으로 채우시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충성과 헌신으로 채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고 믿음의 기둥을 박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평생, 9천 편이나 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되었는데도, 그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믿었으며, "신체장애라는 괴로운 조건이 오히려 거룩한 봉사의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녀의 찬송시 중, '446장'에는 이런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곧 부러질 갈대 같은 '화니 크로스비'는, 남의 실수로 평생 맹인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도 나 피곤치 않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8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이제 우리는 굳게 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이고, 메마른 땅을 달리는 외로운 순례자일지라도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질그릇 같고, 바람에 곧 부러질 갈대 같을 지라도 우리는 터에 굳게 박혀있는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맙시다. 십자가의 기둥, 믿음의 기둥에 의지하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기둥을 잡고 나아가게 되면 그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 기둥에 여러분의 신앙이 튼튼히 박혀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시편 139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만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앞에 계시고, 뒤에도 계시며, 내 안에도 거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내 아래에 계시고, 내 위에 계시며, 내 왼편과 오른편에도 계십니다. 그분은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나에 대해 말을 하는, 모든 이의 입술 가운데 계시며 나를 지켜보는 모든 눈동자와 나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귀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비가와도, 강풍이 불고, 폭풍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강절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이 아닙니다. 문제들을 앞세우며 그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오히려 우리는 절망만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난관이나 고통이나 문제가 있을수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비우며, 주님께서 오셔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요한의 질문은 바로 자신의 잘못된 아집(我執)을 깨고 이제 새롭게 주님 역사 하시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자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며,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본문 6절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 관으로 인해 참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이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아온 성도 여러분! 진정 겸손함으로 돌아가며 통회 자복하면서 자신을 비워 주님을 영접하고 그가 들려주시는 복음을 듣고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고 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기쁨으로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로 주님을 대신하여 하나님나라와 교회 부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헌신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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