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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능히 당하며 누가 능히 서리요? (말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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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능히 당하며 누가 능히 서리요? (말 3:1-5)


선지자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가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말라기 2장 1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도 시치미를 뗐습니다.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좋게 보신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감싸 주시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었습니다. 정의가 실종된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살 길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능청스럽게 변명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바로 그들에게 선지자 말라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사자는 먼저 주님의 길을 준비할 것이고 그 준비가 끝나면 주님이 갑자기 임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이 임하시는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선지자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 하나가 정의입니다. 주님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으십니다. 불과 잿물은 깨끗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 앞에서 녹지 않는 금속은 없습니다. 잿물에 깨끗하게 씻기지 않는 옷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깨끗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입니다. 정의는 심판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공의를 세울 것입니다. 선지자는 심판의 대상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바로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직결됩니다. 선지자는 그런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말라기가 외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귀담아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러 선지자들이 비슷한 말을 외쳤지만 정의는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또 심판도 임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와 심판은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또 풍족한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외치는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 까닭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지만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여기서 느닷없이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선지자가 왜 갑자기 십일조를 언급했을까요? 정의와 심판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십일조를 말했느냐는 말입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정의와 십일조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총체적인 사건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정의와 심판은 십일조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십일조입니다.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는 핵심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고발했던 것입니다.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짜 중요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일종의 종교세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할까요? 오늘 이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따른다고 해서 구약의 말씀을 무조건 폐기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그 말씀이 말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선지자 말라기가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려고 하는 신앙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십일조의 기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근본 취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십일조는 두 가지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필요이고 다른 하나는 구제에 관한 필요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고 다만 종교적인 일만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지파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과부나 고아, 또는 나그네를 위해서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정의, 특히 경제 정의를 세우기 위한 제도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미 선지자 말라기는 주님이 임하실 때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심판의 대상도 밝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그 심판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경제 정의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일용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근로자들, 노숙자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생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품삯을 떼어먹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경제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손해를 볼 수도 있고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경비 절감, 특히 인건비 줄이는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억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신앙 양심에 벗어나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이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습니다. 제도가 바르지 않으면 개인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은 세금 징수입니다.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고 수입이 적은 사람에게서 적게 걷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하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 정책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그 옛날 선지자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적 약자들의 슬픔과 아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지자 말라기가 말한 그 주님이 이미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무서운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무서운 심판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선지자 말라기가 분명히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말라기 4장 2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씀에 순종하여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주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에 “잘 했다!” 칭찬 듣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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