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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내로써 시험을 이기는 성도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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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써 시험을 이기는 성도 (약 1:2-4) 

 
오늘은 시험을 만났을 때 성도들이 가져야할 신앙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노라면 여러 종류의 시험이 다가옵니다.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시험은 그 출처에 따라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귀가 가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시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마 4:3). 마귀는 시험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시험하되 하나님께 범죄하게 할 목적으로 시험합니다. 범죄케 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망하게 만들기 위해 시험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는 하와에게 다가와서 시험했습니다.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네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습니다. 뱀이 무슨 수로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한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보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어머니인 하와를 꾄 뱀은 곧 마귀를 가리킵니다. 이 때 뱀은 마귀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말을 건넨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여 범죄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마귀는 거짓말로써 하와를 꾀었습니다. 뱀은 마치 하와의 편인 것처럼 가장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것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마귀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변경시켰습니다. 그러자 간교한 마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새빨간 거짓말로써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신용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자.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이에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이리하여 인류의 조상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우리를 시험할 때. 하와에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만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성도들의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그 다음은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마귀가 강제로 우리의 손발을 움직여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고 악한 생각을 넣어 줄뿐입니다. 마귀가 넣어주는 의심과 악한 생각을 내 것으로 삼고  죄를 짓는 것은 우리 각자의 결정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험이 다가올 때 그것이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의심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인 줄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써 단호하게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의 정욕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르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칠 때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선포하기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노략한 물건을 보고 탐내어 그 중에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몰래 감추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은 아이 성을 치러 갔다가 큰 참패를 당하였고, 곧바로 아간의 죄가 발각되어 그와 그의 온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정욕에 눈이 어두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로 인해 범죄하였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다윗의 집안에 재앙이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땅 판 돈의 절반은 감추어 두고 절반만 가지고 사도들에게 바치면서 그것이 땅 판돈 전부라고 속였다가 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들이 땅을 팔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 땅을 판 돈 가운데 얼마를 바치든지 그것도 그들의 자유입니다. 각각 자기들의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침으로 존경받는 성도들을 보고는 자기들도 그런 대우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땅 판 값의 절반을 드리면서 전체를 바치노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다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하셨습니다. 또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정욕과 탐심을 경계함으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읽어보면, 마귀가 욥을 시련할 때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서 그처럼 혹독한 시험을 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고보서 1장 13절로 14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다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실 목적으로, 다시 말하면 악한 의도로 시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시험은 전혀 악한 의도가 섞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이 우리를 범죄케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보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합당한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이르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이 당한 시험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가혹한 시험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그 시험을 이겨냄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다가올 때 지레 겁을 먹고 물러가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북한은 기독교 신앙을 엄금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킵니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는 이슬람 국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집트에는 2천년 역사를 간직한 콥트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기독교 전파를 금합니다. 다만, 조상 적부터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기독교 신앙을 허용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기업체에 취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콥트 기독교인이 자영업을 하거나 사회의 하층민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권면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서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으려면 시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올발라야 합니다. 곧 다가오는 시험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신앙의 기준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의 위대함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어떤 고난도 기꺼이 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화로운 신분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26절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로 인해 받게 될 영광스런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애굽의 모든 보화와 특권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사노라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납니다. 여기서 시험을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혹을 의미하지 않고 시험 당하는 사람을 강하고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시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되 죄 가운데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고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둥지를 높은 절벽 위에 짓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날개에 태워서 공중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새끼들을 날개에서 떨어뜨립니다. 날개짓에 미숙한 새끼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면 어미가 잽싸게 밑으로 내려가서 넓은 날개 위에 새끼들을 받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이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어린 새끼들의 나는 실력을 시험하고 훈련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 역시 악한 의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주려는 데 선한 목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하신 목적으로 시험을 가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동선수와도 같습니다. 코치가 연습을 강하게 시킬수록 더 실력 있는 선수가 됩니다. 선수는 훈련이 힘들지만 자신의 향상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감당합니다. 금을 정제하는 사람이 금붙이를 모아다가 도가니에 넣고 열을 가합니다. 금이 녹아서 물처럼 되도록 뜨겁게 가열합니다. 그 과정에서 불순물이 분리되고 드디어 정금을 얻게 됩니다. 

욥은 그 무서운 시험을 당하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기에 욥기 23장 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에게도 없어져야 할 찌끼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 시기, 탐욕, 나태함, 등등 없어져야 할 것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없앨 수 없습니다. 

마치 의사가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진 환자를 치료할 때 한꺼번에 수술하고 한꺼번에 약을 투여하지 않고 한번에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은 우리의 교만을 꺾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어떤 고난은 우리의 정욕을 없이하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연속적으로 다가온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우리의 인격이 더 고상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연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징계조차도 우리에게 유익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은,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를 말해 줍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이유는 첫째로,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 결과로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시험 대신에 “시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시련은 헬라어로 “도키미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연단을 받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추방하고 우리 성격 중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태워버려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순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련을 당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베풀어주셔서 모든 시련을 능히 견뎌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거든 평소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인내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인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인내를 통해서 하나씩 터득하게 되고, 또 인내로써 시련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를 선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시련을 겪으면서 지치고 피곤하게 될 때에 우리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고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면 극복하지 못할 시련이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은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인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알아 둘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인내”는 수동적으로 고난을 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시련을 영광되고 위대한 것으로 변하게 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성도가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기거나 화염에 싸여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교하는 성도들의 얼굴은 공포심에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이교도가 어느 순교자에게 “너는 죽어가면서 어떻게 미소를 짓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내는 위대한 영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고 하였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은, 인내의 힘을 끝까지 발휘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인내를 잘 하다가 시련이 중첩되고 쉬 끝날 것같이 보이지 않을 때 중도에서 인내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욥의 인내는 우리에게 귀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욥은 어찌나 환난이 중첩되었든지 살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그의 인내가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인정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욥은 말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고 했던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그로 인하여 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처럼 완전무결하게 될 수는 없지만,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한 것처럼 주님을 닮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험과 시련이 다가올 때 오늘 살펴본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귀를 막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전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믿음의 인내로써 시련의 밤을 이겨내심으로 주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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