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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비유 (마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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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마 13:1-17)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17)

오늘 말씀은 자주 들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오늘 말씀은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심판을 선언하는 저주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예배드리시는 우리 모두가 다 깨닫는 사람이 되고 옥토 밭이 되어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놀라운 말씀을,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4가지 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4가지 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은 씨앗에 대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씨앗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씨앗이 뿌려지는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딱딱하게 굳어진 길가 밭 같이 교만한 마음은 아닙니까? 뿌리 내릴 수 없는 돌밭은 아닙니까? 온갖 염려와 유혹에 사로잡힌 가시떨기 밭은 아닙니까?
 
“왜 동방교회가 멸망했는가?” 라는 책자가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었고, 그 터키에는 계시록에 나타난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등의 아름다운 교회들이 모두 터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이 들어와 다스리면서,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아름다웠던 교회들이, 그리고 그 교회가 있던 도시들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1949년 중국 내 기독교 신도 수는 84만명 이었습니다. 새로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종교에 대해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시작했고 국가종교사무국을 설치해 종교 정책을 감독·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나서 중국의 문을 열어보니 2010년 현재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기독교 인구는 2천3백5만 명으로 늘어났고, 오히려 '기독교인 1억 명說' 이 신빙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처음부터 제도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시작하고 성장시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가정교회에 모이면 의례히 성경공부부터 시작했으며, 말씀으로 서로 권면할 줄 알았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교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며칠을 투자합니다. 30분 설교하시던 한국 목사님들이 혼이 난답니다. 중국교회는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열매를 맺는 교회와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교회는 천국과 지옥만큼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 밭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우리는 다 이런 복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절) 하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11절) 하십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신다구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놀랍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1-2)‘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이방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곁으로 와서 비유의 말씀을 듣는 이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다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혹시라도 이 사람들이 천국 들어가게 될까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2절) 이 사람들은 없는 자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운명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특히 문제는 13절입니다. 다 같이 1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절)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 사람들은 다 길가 밭이요, 돌밭이요, 가시밭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조용기 목사님 설교하고 예수님 설교하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행운아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천국 못갑니다. 다 지옥 갑니다. 왜냐면... 그 마음이 길가 밭이요, 돌밭이요, 가시밭이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절) 
 
노아의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면서 살았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안 할 수 없지요.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멸망이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씀과 무관하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일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그 마음이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강퍅할 대로 강퍅해져서, 롯의 집에 찾아온 외부 사람들과 남색 하고자 온 성의 남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장인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완전히 길가 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서 결국 그날 밤에 유황불로 멸망을 당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었을 때, 니느웨 사람들처럼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요나 선지자의 전도를 듣고 온 성읍이 다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고넬료라는 사람의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33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고넬료 가정의 모든 식구들과 친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대개 성도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선 자리를 지지해 줄 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도의 굽은 것을 펴기 위해서 아픈 것을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하면 ‘목사가 나를 쳤어!’ 라고 말합니다. 주일 설교가 끝나고 목사님에게 한 신자가 이렇게 항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신 설교 말씀 나를 두고 하신 거지요?” 이렇게 항의하는 신자에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네 물론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한 것은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성경 원리에 틀렸으면 얼마든지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나 성경 원리에 입각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졌다면 순종을 하십시오. 성경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당신 행실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랬더니 묵묵부답이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신자입니다. 희망이 보이는 신자입니다. 보통은 더 공격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14-15)‘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느냐.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이사야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과 같고,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대가 이사야의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사야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6;1-3)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천사조차 여호와 앞에서 ‘두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우고’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합니다.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맨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요, 발을 가리는 이유는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냐??? 이사야가 활동하던 그 시대가 거룩을 잃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은  유대 나라의 10대 왕입니다. 52년 동안 유대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의 전반기는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와 복을 많이 받고, 전쟁만 하면 승리합니다. 그의 지위와 명성이 올라가고 열국 가운데 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솔로몬 이후 가장 부강하고 잘사는 시절이 바로 웃시야 시절일 것입니다.     동시에 웃시야의 시대는 타락이 극에 달한 시대입니다. 부강하고 잘살게 되자 웃시야는 타락합니다. 가장 큰 타락은 교만(驕慢)입니다.  

성도여러분, 교만 중에 최고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교만이 극에 달하면서 성전 안에 들어가 제사장을 제치고 향단을 분향을 하려고 했습니다. (대하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하나님께서 그를 강성하게 하니까 그 보답이 율법을 어기고, 제사장을 무시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제사장이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할바니 왕은 성소에서 나가소서." 하자 제사장에게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그 순간 나병이 발하여 성전에서 쫓겨나고 왕의 자리도 아들 요담에게 내주고 별궁에서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이사야의 시대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1-14) 하나님이 싫다, 싫다, 싫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예배 뒤로는 온갖 악을 행하고 자신의 탐욕에 빠져 삽니다. 

(사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교회의 본질적인 위기는 예배의 거룩함,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에 탐욕과 거짓과 인간적 술수로 가득합니다. 교회가 먼저 거룩함을 상실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한 말이 뭡니까?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0-14)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세례요한의 말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8-9) 이들은 찍혀서 불에 던져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외쳐야 될 말씀이 세례요한의 결론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4가지 밭의 비유에서 인용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외쳐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와 눈이 감겨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그들이 듣지 않습니다.  웃시야 왕의 아들 요담 그 아들 아하스 왕이 대표적입니다. 요담이 16년을 통치하였으니... 웃시야 왕의 손자인 아하스 시대에는 이미 나라가 거의 망합니다. 16년도 되지 않아서 웃시야 시절 빼앗은 모든 것을 도로 빼앗기고 겨우 수도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 싸움에서 지켜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하스왕은 당연히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앗수르 왕에게 찾아가 도움을 구합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입니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왕의 귀와 눈이 막힌 것입니다. 
 
왕 뿐이겠습니까?  백성들도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6)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짐승도 제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 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심판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완전히 실망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듣고 돌아 올까봐 아예 그들의 귀와 눈과 마음을 닫으십니다.  이미 심판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거나 풍자적인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이 고침을 못 받도록 하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야 하니 이사야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이렇게 외쳐야 합니까?  

6장 11절에서 13절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90%가 사라질 것이요, 그 나머지 10%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심판의 예언대로 북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하고, 남 유다는 앗수르에게 다 빼앗기고 과수원의 원두막처럼 예루살렘 주위 일부만 살아남게 됩니다. 남은 그루터기는 먼 훗날의 일이고 이사야와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하면 가차 없이 심판을 내리는 분이십니다. 어떤 때는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해주시고 축복하신다는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4가지 밭의 비유를 왜 말씀하십니까?  그 시대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과 마음 밭이 꼭 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5년 쯤 지나서 로마의 티도장군의 공격으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히 훼파되고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700년 전 이사야시대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웃시야 시대처럼 부강하고 잘살지 않습니까? 세계 10위 안에 드는 나라입니다.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부패하고 타락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모릅니다. 목회자의 성추문, 세습, 돈 문제, 교회안의 권력싸움... 이런 것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국교회, 한국사회를 보시면... 정말 비통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4가지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4가지 밭의 비유는 저주의 말씀이요, 심판의 예언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시려고, 돌이켜 구원받을까봐 일부러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옥토입니까? 옥토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사실 우리처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는 듣고 깨닫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 하여야’ 하겠습니다. 길가 밭, 돌 밭, 가시밭의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 밭을 기경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이 결국 심판 받아 나라가 사라진 것처럼,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결국 심판을 받아 지도에서 나라가 사라진 것처럼, 우리나라, 우리 교회가 심판을 받아 똑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을 잃어버린 목사들... 그래도 상관없이 오직 물질적 축복에만 마음을 쏟는 성도들로 가득합니다. 삶에 정직함이나 거룩함이 상실되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교회가 심판받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아시지요?  축복이 아니라 거룩이 우리의 기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도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옥토가 됩시다. 마음 밭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서 열매를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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