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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눅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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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눅 19:8-9)

[누가복음 19장 8-9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우리가 참 힘들어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상처를 주고받는 문제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관계로 얽힌 이 세상에 살면서 어쩌면 “상처”란 치욕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훈장처럼 자랑스러운 흔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나누려는 것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받은 상처를 처리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의 문제와 실수, 상처는 절대로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 가운데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붙들 수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가장 많이 들은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의 직업은 세리장이었고, 그의 삶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지만, ‘외로움’이라는 무거운 짐을 늘 안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 외로움의 문제는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상처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도 하고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로 추측하기에는 그의 외모 혹은 직업 때문에 오는 상처는 그가 가진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아픈 부분이었던 것이죠. 
그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으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한 것이죠.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났다고 그에게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를 용납해 주셨을 때, 그가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용납하게 됩니다.

용서를 구하십시오!

오늘 본문 8절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상처가 치유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먼저 그의 상처가 훈장이 되는 순간입니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모았던 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놓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서 그의 상처가 이제는 상처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를 상처로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주님 앞에 서서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용서를 구하고 상처가 치유를 받은 사람. 그 사람은 더는 상처 입은 사람이 아닌,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지요. 
“여러분의 상처가 사명이 되도록 하라!”

오늘 그런 일이 삭개오에게서, 아니, 삭개오가 주임 앞에 섰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처 때문에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말씀을 묵상하는 중의 “서서”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몇 가지 성경을 보니까 영어 단어로는 "stood" 혹은 "stoped"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고민했겠죠. 그런데 그 고민이 “주님 앞에 서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받았을 때,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주님 앞에 서서”입니다.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서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를 보게 됩니다. 대개 상처를 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받은 사람의 아픔은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지요.
사람들은 참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사실 상처는 상대적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상대방도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의 기준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여름 제가 시드니에 갔을 때입니다. 
공항에서 내리는데, 찬란하게 해가 뜨고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조금 차를 타고 더 가보니까 그 위에 또 하나의 무지개 “쌍무지개”가 뜬 것이죠.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드니가 나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그다음날 저를 초청한 교회에서 얻어준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소위 'bay side'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말입니다. 그림 같은 경치에 또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서운한 생각이 들더군요. 
어제 제가 호주에 왔다고 뜬 것이 아니라 ‘매일’ 뜨나 보다. 
어제 누군가도 무지개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상처와 섭섭함이라는 것이 참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누군가 당신 때문에 아프고 힘들어한다면, 그 사람의 아픔이 먼저 떠오르나요? 아니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정당성이 떠오르나요.

물론 삭개오가 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출신을 가지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경멸하는 것인지 모호함 가운데서 더욱 큰 외로움 따돌림이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 앞에 서기 전 그가 받은 상처를 다른 상처로 되돌려주는 것이었죠.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그가 받은 상처보다, 그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것이 “예수님 앞에 서서” 주었던 상처와 받았던 상처를 해결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남을 속였던 일들, 아니 속았던 일들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누군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 때문에 손해 봤던 일을 생각하면, 내가 정직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쳤던 일들이 얼마든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날 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용서를 빌고 손해를 배상하고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인생을 살 것인가?

혹 여러분 중에는 정직하지 못함으로 배우자를 속이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모른다고 속이며 속고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아니면 아픔이 있더라도 상처를 도려내고 새 살이 돋아나도록 할 것인가? 를 말입니다.

먼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상처로 갚으려 하지 않나요?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본성을 반영하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가 아는바, 본성대로 행하는 일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방식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라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이 포기하고 내버려 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하려고 애쓰라!”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하나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독교 역사를 바꿔놓은 사람입니다. 그가 돌아 맞아 순교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아픔이지만, 그 가운데 보여줬던 그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음 가운데 그의 마지막 기도가 무엇인가요?
혹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주여, 이 원수를 꼭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셔서 저들 자손 대대로 망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스데반의 기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저주를 선포한 것이 아니죠.

어쩌면 그의 기도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울'이 위대한 '바울'이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사도로 불림을 받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고통 가운데 절규하며 기도하던 스데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처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려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는 것이죠.

저는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가장 무서운 것이 “분열의 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분열이 무서운 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분열시키는 편에서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을 비난하므로 악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던 때, 호주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목사님 요즘 분당 우리교회에서 이찬수 목사님이 설교한 것 때문에 이슈가 되었습니다. 10년 후에는 교육관도 팔아 사회에 환원하고 작은 규모로 교회를 해체한다는.”

이 이야기는 얼마 전 이찬수 목사님과 제가 만나서 이야기하며 함께 고민하던 내용이었습니다. 분당 우리교회가 학교를 빌려 예배드리며 아이들 교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육관을 구매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찬수 목사님에게 앞으로 분당 우리교회가 한국 교회에 좋은 모델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교회가 가야 할 길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는 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그런 목회를 하게 하신 것이 참 독특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당 우리교회가 만나교회보다 교인은 많지만, 저보다 훨씬 힘든 목회를 합니다. 그 교회의 처지에서 보면 만나교회의 예배당이 무척 부러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만나교회의 모습을 놓고 고민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우리 윗세대 분들의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아주 큰 교회는 아니지만, 예배당과 많은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영상과 음향시설 교육환경을 가진 전통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교회를 통해 어떤 일을 원하시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갈 길은 어디인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분당우리교회와 만나교회가 화목하며 함께 만들어갈 꿈을 꾸고 나아가는 것이 이 땅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언젠가 사랑의 교회가 건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오정현 목사님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이미 그곳에서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 교회가 건축을 하기로 했을 때, 제 마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가 될 수는 없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가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 교회는 아니지만, 그 교회가 가는 길을 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축복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서로 비난한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면 누가 가장 좋아할까요?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다른 길을 가는 누군가를 축복하고 화목하려고 할 때, 서로에게 있는 상처기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제가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염려가 됩니다. 왜 김병삼 목사가 예를 드는 교회들은 다 큰 교회들인가?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는 고민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중의 하나는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올해 시작한 MMP를 하면서 우리와 함께 가는 작은 교회들이 힘을 얻는 모습을 봅니다.
상처는 건드려서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싸매고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해야 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 후반부의 말씀을 보세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읽은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구쟁이들이 괜스레 지나가는 기차를 향하여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차의 유리창이 깨어지기도 하고, 타고 있던 승객들의 머리가 깨지는 등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습니다. 그럼에도,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은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좋은 생각을 해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철로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가 지나갈 때 이렇게 아이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저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더불어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돌멩이를 던지지 마라."라는 말로는 장난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을 흔들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분열의 영으로 상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낼 수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입니다.
삭개오가 주님 앞에 서서 그의 삶을 결단했을 때, 그의 결단을 삶으로 옮기기로 하고 그의 재산을 내어 놓았을 때, 어떤 ‘단서’ ‘조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재산의 절반이 누군가를 위해 쓰일 것이고, 그가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면 ‘네 배’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로마서 12장 18절 말씀을 보세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이 “할 수 있거든” 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는 사랑을 모든 사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 되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고백이 왜 위대합니까? 그가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제는 상처 가운데 살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참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남성 4중창으로. 
성 프랜시스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의 기도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구원의 기쁨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상처가 훈장이 된다면’이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오늘 본문 가운데 삭개오에게 주어진 가장 빛나는 훈장이 무엇인가요? 본문 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말씀이 영어성경을 보면 좀 순서가 다릅니다.
'because'라는 단어 때문인데요. 우리 성경에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그래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선언하고 계시는데, 여러 영어 성경 번역에서는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이 이르렀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이 세리장이었지만, 그가 유대인의 자손이라는 것이 변할 수 있는 일인가요?
단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많이 비교했던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지요. 율법을 아는 자와 율법을 지키는 자가 다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다윗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다윗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나요?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단지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 받지 못하면,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없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겼던 다윗에게 찾아온 죄책감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 그가 휘둘렀던 권력으로 여자를 취했고, 그 남편을 살해했으며, 그 죄를 감추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죄를 감추려고 해도 피폐해진 그의 영혼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진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고백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상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 가운데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삶의 자세를 실천하도록 제안하고 싶습니다.

먼저, 누구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아파하든,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괴로워하든 그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토해내라!”
상처는 아무리 위장하고 포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려내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을 때, 깨끗하게 씻고 가지 않으시나요?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X-Ray와 MRI, CT 앞에서 감추어진 질병이 드러납니다.
치과에 이를 치료하러 가면서도 깨끗하게 닦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감추어진 질병, 치석 썩은 것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무리 포장하고 감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중의 20대 초반에 10여 명의 엄마로 사는 케이티의 삶을 소개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단기 선교로 갔던 우간다의 아이들을 보고, 도저히 그냥 살 수 없어서 대학을 다니지 않고 우간다로 돌아와 아이들의 엄마가 된 케이티에게 수없이 많은 일이 상처였습니다. 
그 땅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는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무기력 때문에.

특히 세상에 태어난 지 몇 달이 지났어도 몸무게가 2kg을 넘지 못한 아이의 죽음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간 아이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삶이 꼭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아니 그 아이의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게 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살리게 되었죠. 너무나 허무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가슴의 상처를 안고 오열할 때, 하나님은 케이티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그 상처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조셉 스크리븐이라는 젊은이는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 와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여성과 약혼을 합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결혼식에 오던 중 약혼녀의 배가 침몰하면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스크리븐은 큰 충격 속에 학교도 그만두고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너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호수에서 잃었으나, 나는 하나뿐인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잃었다. 그것은 하나를 잃음으로 모두를 사랑하기 위함이다.” 
그때 그는 주님의 깊으신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래서 쓴 찬송시가 바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가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상처로 잃은 것을 생각하지만, 그 상처로 얻은 것이 참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로 아픈 경험을 많이 하지만, 그만큼 그 아픔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부러우신가요?
나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시나요?
아니요! 우리는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단지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놔 보시지 않겠습니까?
좀 버겁고 무거워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을 맡아 주시는 주님 앞에 말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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