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국은 마치…(1) (마 13:1-50)

첨부 1


천국은 마치…(1) (마 13:1-50)

예수님은 복음전파 과정에서 비유譬喩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 많습니다. 비유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의 설명에 있어서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입니다. 원어(파라볼레, )의 뜻도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비유란 화자話者가 강조하려는 요지要旨를 청자聽者에게 일상의 낯익은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하므로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13:34). 한편 4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비유는 32번이나 나타납니다. 

복음서에 중복된 것을 포함하여 마태복음에 15번, 마가복음에 4번, 누가복음 19번, 요한복음에는 포도나무 비유 한 번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전파운동을 씨 뿌리는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본문 13장 3절에 『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라고 했습니다. 

『 씨 뿌리는 자 』(호 스페이론, )에 정관사 호( )는 대표단수로 어떤 계층의 사람들 전체를 말합니다. 즉, 농사를 짓는 농부 전체를 가리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편 126편 5절에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1절에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Ⅰ. 길 가의 밭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4절에 『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본문 13장 19절에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라고 했습니다. 

길 가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됩니다. 이 길은 일반 길이 아니고 밭고랑 사이에 난 길입니다. 이 길은 여러 사람들이 여러 번 왕래했기 때문에 밭 전체로 볼 때 상대적으로 단단해진 곳입니다. 

이 비유는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도저히 말씀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생후 습득한 과학지식(학문)에 의존하는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처음부터 영생에 대해 무관심하고 경솔한 자들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하는 말은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 복음의 씨앗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바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무성의하게 듣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다는 것과 오직 복음을 순종하고 희생적 마음으로 듣는 자들에게만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복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비록 세상 과학적 학문을 통달했을지라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Ⅱ. 흙이 얇은 돌밭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5절에 『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본문 13장 20-21절에 『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석회석 지층이 많습니다. 유럽지역에도 석회석 지층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는 식수에는 석회성분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석회석 지층에 얇게 덮인 흙인 것을 감안할 때 그곳에는 뿌리가 깊게 탁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예측 가능합니다.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적인 현상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피부적이고 경박하며 깊은 영적사색을 원치 않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때그때 감정과 형편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어려움이나 핍박이 올 때 무너지고 마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인 회개 없이 복음에 대해 좋은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기 좋아했던 사람입니다(막 6:19-20). 그러나 그는 심령 깊숙한 곳에 회개가 없었습니다. 결국 여인의 꾐에 빠져 세례 요한을 죽이도록 내어준 것입니다. 

바로도 모세의 이적을 보고 어느 정도 마음의 동요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출 8:28; 9:27).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강퍅해져서 재앙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의 마음을 악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본래의 악한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연단 받지 못하고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13:6). 인간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본래의 악한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의 악한 마음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목사의 설교를 한번 들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故 정암 박윤선 목사는 말했습니다. 


Ⅲ. 가시떨기가 있습니다. 

본문 13장 7절에 『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본문 13장 22절에 『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라고 했습니다. 

『 가시떨기 』라는 말은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시를 악에다 비유했습니다. 

① 악을 행하는 자에 비유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6절에 『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미가서 7장 4절에 『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② 이스라엘의 대적에다 비유했습니다. 
민수기 33장 55절에 『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3절에 『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고 했습니다. 

에스겔 28장 24절에 『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면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리라 』고 했습니다. 

③ 저주에 비유했습니다. 
창세기 3장 18절에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이라고 했습니다. 

④ 황폐한 것에 비유했습니다. 
이사야 9장 18절에 『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기운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의역하면 호흡을 막아 질식시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상태를 외적으로 도움 받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밭은 문제가 없는데 그 밭에 영적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잘못된 다른 씨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씨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외부적으로 신앙적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영적 담대함과 영적 혜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신이 천지만물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말씀이 막혔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막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호흡을 막았다는 것은 곧 나와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막았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시편 25편 1절에 『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6편 4절에 『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나쁜 환경이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날이 가까올수록 더해가는 이 세상의 상존하는 신앙생활의 악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제입니다. 


Ⅳ. 좋은 땅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8-9절에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본문 13장 23절에 『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좋은 땅의 "좋은"(칼로스, )이라는 말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좋은 땅에 대한 영적 의미는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 앞에 복종하고 희생적인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서 생깁니다. 인내의 덕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6장 10절에 『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 다음은 그 말씀을 순종하여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귀 있는 자라고 규정을 지은 것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열매를 맺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복음의 능력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흑백논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3장 11절에 『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먼저 복음 전하는 전도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본문 13장 15-17절에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많은 선지자와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보고 기뻐하고 환영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9절에 『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서 있는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의 지식인들의 지식의 가치는 인간의 삶에 전제가 되지 않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날 과학지상주의자들은 인간들의 행복지수를 인간의 육체적 노력이 적게 들면서 많은 것을 누리게 되는데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좀 더 편리하게 살려고 하는 편의주의便宜主義(근본적인 처리를 하지 않고 임시로 둘러맞추는 방법)가 팽배澎湃(물결이 맞부딪쳐 일어나듯이 사물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남)해져 가고 있습니다.
더 나은 육신의 편의를 위해서 자주 바꾸는데 현대인들은 익숙해졌고 학습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사조가 신앙세계를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편의주의 사고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자리 잡으므로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 정암 박윤선 목사님은 좋은 환경은 성령의 일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금요철야기도회를 새벽 4시까지 했습니다. S.F.C.동기수양회도 4박 5일 동안 했는데 지금은 3박 4일로 줄였습니다. 
주일 11시 예배도 옛날에는 12시 40분이 되어야 마쳤는데 지금은 12시에 마칩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편하게 하려고 하고 조금 부담되거나 어렵거나 힘들면 피하거나 생략해 버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인내하는데 약합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에 인내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역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신·불신자들을 막론하고 현대인들은 철저히 이기주의자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가렛 하딘(Garrrett Hardin)이나 일리노 오스트럼(Elinor Ostrom) 같은 사람들은 이기주의가 가져오는 "공유의 비극"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공유의 황폐화를 역설했습니다. 

이기주의는 반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병폐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그의 「인간 본성론」속에서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악의에 찬 말을 던졌습니다. 
결국 희생적 대속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오늘날 성공의 비결은 자꾸만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모든 분야에서 성공합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비롯해서 사회전반에 걸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복지, 예술에 이르기까지 새(New) 것의 절대욕구가 상대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내 몸에 독생자의 씨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수태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씨를 접종받고 그 씨를 다른 곳에 접종시키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씨가 되고 영생의 씨가 되고 신앙의 명가를 탄생시키는 축복의 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