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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2)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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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2) (마 25:14-30)

기독교인들이라면 주님의 재림을 믿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역사와 시간 속에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시면 내가 살아왔던 삶, 또 인류의 모든 역사는 그분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는 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지금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이 좀 더 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세상이 끝난다고 하면서 집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가든지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주님 앞에서 언제 역사의 종말이 와도, 언제 내 개인의 종말이 와도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대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절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란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종”들은 지금 우리 성도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거할 곳을 예비하기 위해 부활 승천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을 불러서 자신의 소유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충성하며 이득을 남겨야 할 은사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남겨야 하는 이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속적인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는 곧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 달란트를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성도의 필수사항인 것입니다. 이 충성이 없이는 이 땅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충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를 맡기신 주인의 의도를 아는 종만이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득을 남긴 두 종은 주인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맡기신 이유가 주인이 타국에 간 동안 방탕한 생활로 잠자는 자가 되지 않고 늘 깨어있게 하기 위함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인이 다시 올 때까지 장사하며 주인을 기다리게 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주인을 의식하며 충성하는 삶 가운데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게 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주인을 알았기에 주인의 말씀에 오직 순종하며 충성할 뿐이었습니다. 일에 충성하는 한 사단이 이들에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에 충성하는 한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일에 충성하는 한 주인의 명령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일에 충성하는 한 잠자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몰랐고, 주인의 의도도 몰랐기에 달란트를 받자마자 땅을 파고 주인이 다시 올 때까지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알았습니다. 인색하며, 인정이 메마른 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을 정도로 못된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며 원금이라도 보관했다가 돌려 드리는 길을 택하여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 주인의 의도대로 충성하며 이득을 남긴 종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21절과 23절에서 동일하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종은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26절에 보면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엄히 책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각각 능력대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충성하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십니까? 달란트에 대한 충성만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도는 늘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받은 은사를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삶이 그러한 삶, 깨어있는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득을 얼마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 속에서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달란트와 사명은 우리로 이 땅에서 주님 오실 때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와 같습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은 한 달란트 받은 자와 같습니까? 

그런데 가슴 아픈 일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한 달란트 받은 자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익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 정도가 아니라 패역한 종이라는 책망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혹 영적인 잠에 빠져버린 상태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런 잠에서 깰 때입니다. 달란트를 맡기신 주님을 기억하며 충성할 때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깨어 충성할 때입니다. 

여기서 “충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원어에는 “피스토스”라는 단어로 “믿음직하다”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에서는 “충성”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진실”로, 표준번역에서는 “신실”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충성”이란 “믿음이 가득찬 것, 믿을 만한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신실하고 믿음직스럽게 감당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본문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칭찬 받았다는 것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책망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충성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 말이 “반역”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원래 “게으름”의 반대말은 “부지런함”이어야 하는데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여기에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한 것입니까? 그가 한 달란트를 낭비하였습니까? 탕자처럼 자기의 정욕대로 낭비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한 달란트를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돌아와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한 달란트를 그대로 땅 속에 묻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주었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라고 준 것이지, 그것을 땅에 묻어둔 채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신나게 살라는 부름입니다. 신령한 삶, 영적 승리를 위한 고단한 삶으로의 부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의 제자들의 삶이 쉬울 것이라고 편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처음부터 좁은 길이었습니다. 충성은 댓가, 절제,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것들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충이요, 악입니다. 이 게으름이 대적해야 할 치명적인 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게으름에게 질 수밖에 없으며, 충성의 열매는 맺혀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문제가 있다면 저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나는 열심이 부족합니다”, “나는 신앙경력이 부족합니다”, 또한 “나는 이러한 재능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저마다 달란트가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겠지만,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는 이룰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받은 것을 묻어 둔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47년 위스콘신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물리학자 첸드리스카 박사가 시카고대학으로부터 ‘겨울방학 동안 고급물리학에 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 다시 연락이 오기를 ‘수강생이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아 강의를 취소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학생이 적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강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고 두 시간 떨어진 거리인데도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그 해 겨울, 계속적으로 두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흐른 후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됩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이고, 또 한 사람은 '충도 리' 박사로 중국계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열정을 다한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달란트를 받은 자로서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미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땅에 묻어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한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통하여 내가 최선을 다하게 되면 그것은 불어나 두 달란트, 세 달란트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또한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에 내가 최선을 다해서 섬기겠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필요하며, 하나님 나라에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비교하여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비교하여 내가 다른 사람보다 적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 될 때는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최고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라'고 부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이루기 원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게으름을 버리지 아니하면 영적거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전쟁 중 게으름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게으름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맞서 싸워 물리쳐야 할 영적인 대적입니다. 

여러분, 게으름과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영적인 게으른 환경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봉사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빼앗고, 비전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환경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 영적 모임에 나가는 것, 말씀을 듣고 배우며 섬기는 일은 힘이 들것이라고 유혹하는 모든 생각의 게으름에서부터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게으름의 유혹을 이기고 싸우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축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는 최고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복을 받습니다. 충성할수록 하나님께서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더해 주십니다. 필요한 물질과 여건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 안에 임하는 천국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4:1절에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로 일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오직 충성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앙이 막역한 기다림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주신 사명을 충성으로 감당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셨던 사명을 돌아보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산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주어진 재능대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변치 말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작은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반듯하게 세우는 일에 앞장서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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