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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몸에서 나시다 (마 1:18-25)

첨부 1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몸에서 나시다 (마 1:18-25)


I. 동정녀 몸에서 나시다

제가 어릴때 다니던 시골교회에 여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추석이나 설날 명절이 되면 저는 제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교회로 피난을 갔습니다. 전도사님과 떡국 끓여먹고 하루종일 성경읽다가 찬송부르고 찬송부르다 기도하곤 했습니다.
초등학생이 성경을 읽다 보면 궁금한게 참 많았습니다. 궁금한걸 전도사님께 여쭤보면 전도사님의 대답은 언제나 단순하고 쉬웠습니다. 

“전도사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는데 그게 진짜예요?”
“얘,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물위를 걸어도 안빠지는게 당연하지 않니? 
 물에 빠지면 그게 이상하겠다. 얘.”
“전도사님, 도시락 하나로 정말 5천명을 먹였을까요?”
“얘,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먹일 수 있어야지. 
 못먹이시면 그게 이상하겠다. 얘.”

“전도사님, 진짜 예수님은 처녀몸에서 나셨을까요? 
 마리아는 처녀몸으로 예수님을 낳았을까요?” 
“얘,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꺼면 그 정도로 오셔야지 
 처녀 몸에서 나시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겠다. 얘.”

전도사님의 대답은 정말 단순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진리였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대답이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은 한 생명이 탄생했다는 고귀함을 찬송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 땅에 위인 한 성자가 태어나서 공휴일로 맞이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날이 아닙니다. 역사상 꼭 한번 있었던 천지창조에 버금갈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 정도는 의심없이 믿어야 정통성 있는 신앙인이다. 
이게 정통신학이다. 정통 교회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몇 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1) 성령의 영감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2)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입니다. 50%쯤 사람이고 50%쯤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히 100% 하나님이면서 온전히 100%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3) 십자가 사건을 단순한 희생 사건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대속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죽었다든지,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죽었다든지, 예수님이 정치적인 압박을 받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든지 이러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4) 육체적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 천군천사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 예수님 재림할 때에 우리 성도들도 육체로 부활한다는 믿음입니다. 

5) 재림신앙입니다. 한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어서 이 사회를 어지럽혔습니다만 시한부 종말론 못지않게 나쁜 사상이 무종말론입니다. 영원히 종말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이 땅에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고 살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6) 동정녀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저는 시골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이사장님이 풀무원의 원경선 님이었습니다. 그분이 한번씩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면 가끔 하시는 말씀이 젊은이들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 삶속에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 진다. 구약을 잘 읽어보면 애기 못낳는 할머니들이 애기낳았다는 얘기고 신약은 애기 낳을 수 없는 처녀가 애기 낳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 100세 때에 사라 90세에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난자 생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내년 이맘때에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사라가 킥킥 웃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시는게 있네. 그때 여호와께서 능치 못하실 일이 있겠느냐. 태어난 아들이 이삭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잉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천사가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삼손입니다.

한나가 기도로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늙은 제사장 사가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듣고 내가 늙고 아내도 늙었는데 무슨 아이를 갖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사가랴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살아야 했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라는 얘기이지요. 세례 요한이 태어나게 됩니다.

언제나 기독교와 교회는 비난에 직면하여 있고 또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만큼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한 교리도 없습니다. 

믿음없는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는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종교라고 2000년동안 비판받은 교리가 동정녀 탄생입니다. 많은 이단의 공격 중심에 섰던 교리가 동정녀 탄생 교리이지요. 이것을 믿으면 예수가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걸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무수한 공격을 퍼부어 댔었지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습니다. 

한편 동정녀 탄생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모든 생물은 암수의 만남으로 생명이 번식합니다. 소위 유성생식입니다. 그런데 하등 동물 가운데 핵분열이나 세포분열로 번식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이를 무성생식이라고 합니다. 특히 최근 과학에는 세포 하나로 생물체를 복제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생물은 전기 충격으로 임신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격에 의해서 임신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결혼 관계없이도 자손이 태어날 수 있다고 과학이 증명했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면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끝까지 신비로 남아 있어야 될 교리입니다. 예외로 남아 있어야 할 교리입니다. 생물학적인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반복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수학을 배울 때 탄젠트 포인트가 있습니다. 원과 직선이 만남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유사이래 동정녀 탄생은 탄젠트 포인트입니다. 영원과 시간의 만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한과 유한은 한번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도 오직 예수 안에서 한번밖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부활도 탄젠트 포인트입니다. 창조도 탄젠트 포인트입니다. 오직 한번. 이것은 진리요 믿음의 고백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II. 증명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일부이긴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서도 마리아가 처녀였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아예 동정녀 탄생을 기독론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는 것은 이원론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동정녀 탄생을 교리화하는 것은 기독교가 처녀성이 결혼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혼이 결혼보다 순결하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순결한 결혼관계, 결혼생활을 악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은 동정녀 탄생을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형상으로 아담의 핏줄을 통해 이땅에 태어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의 피가 전혀 흘러 들어가지 아니한 새로운 혈통, 새로운 구원의 가문을 하나님은 만들기 원하셨던 것이지요. 

동정녀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난자를 빌리신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세포분열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몸, 자궁을 빌린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피가 예수님에게 전혀 흘러들어갈 수 없는 절묘한 방법이 동정녀 탄생이었습니다. 

과학적인 기록이 아닌 히브리서 10:5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얘기합니다. 
벧전1:19 “예수님의 피는 보배로운 피”라고 증언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어떤 설명의 대상이나 증명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일 될 뿐입니다. 그냥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지지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믿었는데 처녀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했다. 
이게 안 믿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얘, 그게 아니면 더 이상하다 얘.”
하나님이 영원전에 살아계시고 오늘도 살아계신다. 그냥 믿어지잖아요. 
믿으면 알게 됩니다. 이걸 증명하고 알아서 믿겠다는 것은 성경을 못 믿는 것입니다. 

III.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마태 1장 족보는 낳고 낳고 40명을 낳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 주어가 달라지고 동사가 달라졌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태어나는 그 분이 주어로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 예수가 나시니라” 이 말씀을 받아 오늘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요셉이 이렇게 낳았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로 25절 말씀은 16절 말씀의 긴 설명입니다. 확대된 각주라고 합니다. 요셉을 들러리로 세웠던 16절과는 달리 18절 이하는 요셉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깊은 신학적인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에 의해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요셉가문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구약 다윗 왕가에서 메시야가 온다고 예언했는데 어떻게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가 다윗 왕가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신학적인 이유가 바로 본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18절 시작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여기서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약혼식은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혼식은 양가 친지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간단하게 의식을 갖추는 것이지만 이때부터는 결혼과 꼭같은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약혼기간은 6개월에서 1년정도 보내게 됩니다. 한 집에 살지는 않습니다. 육체적인 관계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허나 약혼기간엔 양가를 서로 오고가기도 하고 함께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약혼관계는 오직 이혼이나 죽음에 의해서만 종결될 수 있습니다. 이 약혼기간 중 남자가 죽으면 과부로 취급을 받았고 이혼을 하면 이혼녀로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약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게 되면 구약에서는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신22:20-21) 신약에서는 이혼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요.

바로 이런 묘한 상황속에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일생에서 가장 꿈에 부풀어 살아야 했던 이때 서로 정절을 지키며 서로 신실성과 약조를 시험하는 이 때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당했던 고통은 작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지도 몰라. 세간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어떻게 감당하지? 얼마나 여러 가지 갈등이 오고 갔겠습니까?

이때 요셉이 취한 행동이 이어지는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충분히 사랑하는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을 느낄 수 있고 분노를 터뜨릴 수 있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9절 “그의 남편 요셉은” 약혼 기간인데 요셉을 남편이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일이 옳은 결정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신지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셉은 서둘러 결정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요셉아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네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야. 마리아는 아들을 낳을 거야. 그리고 이름을 예수라 하라. 네가 아는대로 예수란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 아니겠니? 그가 메시야가 된다. 이 모든 일들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까지가 1:19-2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19절-22절)

이왕 알려주실 바에는 임신하기 전에 좀 알려주면 좋았잖아요. 하나님은 당황할 때 찾아오셔서 그냥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탄생하기 전에 천사에 의해 계시된 메시야의 이름은 3-4가지로 나옵니다. 

① 예수 ② 임마누엘 ③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알려준 메시야의 이름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합쳐보면 예수는 임마누엘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사가 알려준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다 보면 구약 예언의 성취문이 10번 정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성취,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한 그분이 구약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고 그분이 신약의 문을 여셨고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역사 속에 꾸준히 살아계셨고 오늘 우리 가운데도 살아계시고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일점일획도 빈틈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건이 예언 성취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언 성취문 가운데 첫 번째 성취문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IV. 임마누엘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7:14의 인용구입니다. 여기서 우릴 주목시키는 몇 단어가 있습니다. “보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감탄사입니다. 구약을 인용해서 신약에 옮길 때에, 이쪽 본문에 있는 것을 이쪽으로 옮길 때에 “보라”라는 말은 본문의 내용과 별로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빼고 갈 것 같은데 언제나 이 말을 제일 앞에 두고 다음 내용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라 - 신구약 성경에 보라라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 간섭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급박하게 개입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이 어떤 사건과 문제에 동참하고 간섭하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실 때에 “보라”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생각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들어오십니다. 마리아가 파혼 당하고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이 가정, 이 사랑이 깨어지고 불행하게 되도록 지켜만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입입니다. 

성경적인 논쟁을 일으키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여기 “처녀”라는 말인데 마태가 구약 이사야의 말씀을 잘못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히브리어 “처녀”라는 단어를 알마(Almah)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알마란 단어는 처녀나 유부녀나 상관이 없는 단어입니다. 그냥 결혼할 수 있는 적령기에 있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알마란 단어를 그냥 젊은 여자라면 될 것인데 왜 처녀라고 번역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볼 필요가 있고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5은 분명히 “동침하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서의 이 “알마”는 처녀도 되고 유부녀도 되지만 관사를 살펴보면 어떤 특정 여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동정녀 가운데에서도 유일한 한 사람 누구인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도 이 일은 징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잉태하사 동정녀 몸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신비를 이 아침 우리는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당신은 동정녀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비웃는 자들을 심판주 그분은 심판할 것입니다. 이 현대세력의 위기가 바로 초월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뭐라고 해석합니까? 성육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던 원과 직선이 만나는 유일한 점이 예수였다는 것이지요. 인류 역사상 꼭 한번 있었던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여정에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몸안에 있었듯이 그분도 그분의 어머니 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죽어 무덤속에 갇히듯이 그분도 무덤속에 갇히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여정속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기쁜일을 만나고 복된 일을 만날 때에 예수님은 우리로 더불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고 상처를 만나고 온갖 문제에 시달릴 때에 나혼자 시달리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그 문제 한 가운데 개입하셔서 “보라” 찾아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는 여기서 참 재미있는 한 단어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흔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번역한즉” 이 말은 히브리어로 되어있는 임마누엘이란 단어를 당시 공통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그 머리위에는 세 나라 말로 명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번역한즉 예수는 모든 민족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마태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는 바로 너를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 가운데 나시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몸이었으나 번역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복음은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번역하여 전달이 되어져 구원의 문은 열려졌습니다. 그 풍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번역되어 우리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번역하여 믿지 않는 가족에게도 내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 VIP들에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오늘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내가 숨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 오직 하나님 한분 예수님 만이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서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험한 이 세상 승리할 수 있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와 임마누엘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온 땅의 창조주되셨던 그분,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는 그분, 천군천사들이 시중들던 그분이 천군천사와 함께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그 심판주가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친밀성입니다. 마른 풀을 씹던 소들도 아기 예수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이 달려와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학자들도 아기 예수께 달려와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도 예수에게서 용서받았습니다. 사회에서 따돌림 당한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이 만져주심으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임마누엘.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예수가 오늘 이 땅에 나시니라. 

V. 그 이름 예수

마태복음 1장 예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시작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하고 그 마지막 1장 25절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천국 앞에 가서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죄도 많고 하나님 앞에 충성도 못했고 부족한 점도 많은데... 천국문이 안 열리거든 예수님~ 하고 부르세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너처럼 못된 성질머리가 지옥에 안 떨어지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노? 누군가 조롱하면 예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님 때문이예요. 통과! 

천국문에 섰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늘밤에 불의의 사고로 숨을 헐떡거리걸랑 다른 기도 다 못해도 예수님을 부르게 하세요. 여러분의 부모가 믿음이 신통치 않고 무식해서 성경도 몰라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끊임없이 예수님의 노래를 부르세요. 귀에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세요. 예수 찬송을 들려주세요. 예수 이름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송명희는 예수 이름을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그 이름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이름을 부르면 우리 입에는 천국 향기가 넘칩니다.
예수 그 이름을 들으면 우리의 귀는 달콤해 집니다.
예수 그 이름을 들으면 우리의 마음엔 행복이 넘칩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들으십니다. 
예수 그 이름에 마귀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예수 그 이름에 우리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예수 그 이름에 지옥의 문은 닫히고 천국의 문은 활짝 열려졌습니다. 

♪ 예수 놀라운 이름  아름다운 영광의 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은혜로우신 생명의 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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