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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 (창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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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 (창 5:21-24)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언제나 좋은 분이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하나님의 더 큰 세계를 향하여 입을 크게 여십시오.  틀림없이 주께서 새 날을 맞을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미국의 갑부였던 카네기의 전집을 보면, 그의 재산 목록 1호가 벽에 걸린 아주  남루한 그림 한 장이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이냐?  왜 저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하느냐?"  그 그림의 내용은 그 안에 썰물이 되어 다 빠져나가고 아주 거의 다 파선되다시피 한 초라한 배 한 척이 모래 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쓰러져 가는, 닻도 다 떨어져 모래판에 나뒹굴어 있는 절망적이고 아무 희망이 없고 아무 꿈도 없는 그 배의 맨 밑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면 떠오르리라!"

카네기는 이것을 붙잡았습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면 떠오르리라!"  그렇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믿음의 때가 오면 떠오를 것입니다.  반드시 믿음의 때가 오면 나는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내 입만 바로 열고 있으면 내 가정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 교회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이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대단히 혼탁하고 어렵지만 반드시 믿음의 때가 오면 떠오를 것입니다.

서해안에 가보십시오.  아무리 잘난 배도, 아무리 귀한 배도 썰물이 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밀물이 밀려드니까 삽시간에 배가 뜨고 쓸모가 없어 보이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이 됩니다.  저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나 나라나 교회나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의 때를 한 번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허락하신 복의 때가 한 번은 펼쳐질 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사람들이 일어나서 성령이 철철 넘쳐야 됩니다.  때마다 시간마다 일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감이 철철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밀물의 때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우리들에게 밀물의 때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분을 신실하게 잘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동행입니다.  '동행'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동행에는 바람직한 동행이 있고, 그렇지 못한 동행도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동행을 생각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습니다.  수년 전 우리 가슴에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파문을 던지고 우리 곁을 떠나갔던 영화 워낭소리가 생각이 납니다.  팔순의 노인과 마흔살의 소와의 감동적인 동행, 그 동행의 실루엣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었습니다.

언제 죽어 넘어질지 모르는 늙은 소, 거기에다가 늙어서 도축을 한다고 해도 제 값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주변에서 하도 닥달을 하기에 할 수 없이 이 소를 팔기 위해 우시장에 갔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소가 팔리지 않기를 원하는 듯 사람들이 싼 가격을 말하자 팔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안도하면서 그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침내 이 늙은 소가 노인을 보고서도 일어서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하자 수십년 동안 마치 소의 족쇄처럼 달려있던 워낭 줄을 끊어줍니다.  그리고 일생을 통해 자신의 분신처럼 살며 동행했던 늙은 소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잘 가거라!"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외국에 소개하기 위해서 영화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Old partner"라고 했습니다.  비록 사람과 소의 동행이지만 우리는 한 파트너로 한 세월을 동행했던 아름다운 이미지가 남아 있는 영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의 본문에 보면 또 다른 동행의 에피소드, 인간과 하나님과의 동행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소위 에녹의 사건입니다.  창세기에서는 그가 무려 300년의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년도 아니고, 30년도 아니고, 300년을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떻게 사람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을까?  여러분,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재림을 하신다면, 혹은 지금 이 순간 재림을 하신다면 우리는 그냥 올라가야 합니다.  어쩌면 에녹의 이야기는 종말의 시점에 일어날 사건의 한 그림자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300년이 아닙니다.  그가 죽음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올라갔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의 사건을 훗날 히브리서에서 기자가 해석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것은 300년의 세월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이 땅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의 기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저 천국으로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믿음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복을 경험하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동행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만남입니다.  만남이 없다면 결코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동행은 만남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어려움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지만 정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위 '명목상의 교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름뿐인 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진솔한 체험이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워지는 사건, 그래서 인생이 뒤바뀌는 사건을 가리켜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회심의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사건이 우리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나야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제가 다니던 교회의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모릅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가 교회에 왔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모릅니다.  죄 사함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남이 없는 동행은 없습니다.  부부가 만났기 때문에 수십년을 하루같이 동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오늘까지의 시간들 속에서 정말 예수님을 만났던 그 황홀한 경험의 순간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만 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만남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보다 의미 있는 동행으로 계속되려면 반드시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의 동행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도 소통입니다.  만약에 이 소통이 단절되면 부부의 동행도 끝이 나고 맙니다.  실제로 이 소통이 없어서 부부의 동행이 중단되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요즘 정치권에서 다음 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마다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도 바로 소통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들이 국민들과 가장 잘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통하지 않으면 통합니다.  처음의 통은 소통한다는 '통할 통(通)'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통은 괴로워한다는 '아플 통(痛)'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통하지 않으면 통합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결국 고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 물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교제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 무슨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교제할 수 있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나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내 마음과 생각을 아룁니다.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하다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내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소통이 안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전혀 말씀을 읽지도 않고,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면 그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는 열심히 들어줍니다.  그런데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이 고민인지 절대로 자신을 오픈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의 말씀은 더러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가르침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없는 사람, 기도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풀어놓는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불통의 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일 수 없다고 오늘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불통인 사람이 참된 성도의 모습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름뿐인 성도의 자리에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행복을 누리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소통 속에서 저와 여러분을 보시고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향해서 그의 미소를 흘려주시는 모습이 바로 동행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셨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셨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소통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생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참으로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 인격이 동행할 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뜻을 따라 가야 하는가, 아내의 뜻을 따라 가야 하는가?  이것이 언제나 부부 사이에서 갈등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뜻이 같이 않은데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런 고민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따라와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 나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아시는 분,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내 고집, 내 생각, 내 철학, 내 판단만이 내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고 결정합니다.  내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없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챤이라는 사람이 좁은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만나게 되는 재미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이라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거만이라는 사람입니다.  단순이라고 하면 좋은 이미지의 사람 같지만 그러나 존 번연은 여기에서 단순의 의미를 좋지 않은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해서 자기 마음, 자기가 느끼는 대로 행동을 합니다.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도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유머로 '단무지'라고 합니다.  '단무지, 단순, 무식, 지랄.'

또 하나 거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순례자 크리스챤에게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왜 너의 생각을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 분의 뜻을 따른다고 하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라고 합니다.  당당해 하고 거만해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오이지'라고 합니다.  '오이지, 오만하고 이기적인 지랄 같은 사람.'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집사님은 단무지입니까, 오이지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의 동행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 고집을 꺾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 판단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결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중의 기도, 최고의 기도, 가장 위대한 기도는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드렸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고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선배인 사도 바울도 우리들에게 진정한 성도의 헌신을 촉구하면서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다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그분의 완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그 뜻 앞에 자신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이 장에서 에녹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의 영웅들의 장에 에녹이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던 요인은 그가 바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에녹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은 거기에서 끝이 나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녹은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걸어가면서 하나님과 부단히 소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 그 뜻을 알아갈수록 그 뜻이 귀한 것임을 깨닫고 에녹은 기쁘게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나를 지으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나 같이 부족한 인생이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축복, 그 보람, 그 영광이 바로 동행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서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나를 지으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온전한 동행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줄 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동행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과 가장 자연스럽게 동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동행의 미학입니다.  아니면 동행의 숙명입니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피차 닮습니다.  그 동행이 오래되고, 그 동행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닮음의 질적 깊이는 더해 갑니다.  동행은 닮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부부입니다.  부부, 닮습니까, 안 닮습니까?  닮습니다.  숙명적으로 닮습니다.  신기하게 나쁜 것까지도 닮습니다.  부부는 서로가 좋은 점을 닮아야 하는데 나쁜 점을 빼다 닮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선을 거기에 두고 집중하다 보면 그 집중이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닮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을 닮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을 닮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행은 위대한 것입니다.  동행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아름다운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닮습니다.

하나님과 일평생을 동행하던 어느 날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았을 것입니다.  "에녹아, 오늘은 말이야.  먼 여행을 떠나야 돼.  아주 먼 여행을 말이야.  단단히 준비하고 나를 따라오렴."  그리고 그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요?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날 "그만, 오늘은 영원한 집으로 가자"라고 하시면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에녹은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그가 가능할 수 있었다면 한 장의 편지를 이렇게 남겼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내 인생은 아름다웠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간 후 동네 사람들은 아마도 에녹을 생각하며 비석 하나를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비석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 에녹, 여기서 떠나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와 히브리서의 결론이 하나님과 줄곧 동행하다가 간 사람, 그리고 하늘로 올리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 에녹 여기서 떠나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도 그런 동행이 사모가 되십니까?  하나님과의 이런 소통이 사모가 되지 않으십니까?  최근에 놀라운 말씀의 은혜가 내 마음 속에 다가오고 있습니까?  기도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까?  혹시 기도의 강이 메마르지는 않았습니까?  말씀 앞에 아무런 감동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습니까?

어느 듯 금년의 마지막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빨리 흘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심판의 날, 결산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의 결산의 날, 심판의 순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내 인생 속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참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결단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밖에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것 같지만 영원한 저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 땅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여기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저 건너편에 미국이 있고, 브라질이 있듯이 이 세계 밖의 저 위에 영원한 한 나라가 있습니다.

에녹은 이사 가듯이, 여행을 떠나듯이 영원한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를 진실로 믿는다면 이 땅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좋은 것은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다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최고의 기쁨, 최고의 기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 동행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약속 받고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죄인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나라에서 동행하게 될 우리가 이 땅에서도 그분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길을 혼자서 걸어가며 혼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나 혼자 내 힘으로만 감당하려고 하다가 지치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주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고, 쉬자고 하시면 쉬고, 달려가자고 하시면 달려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기적 가운데 하나는 죄인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어갈 때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에녹처럼 우리도 하늘나라로 옮기움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와 섬김과 헌신에 대한 진지한 의미를 남기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함이 없이, 부끄러움이 없이 주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 후회 없이 아름답게 저 영원한 나라로 영원한 동행을 위해서 우리의 삶의 새로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동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기서, 그 영원한 동행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럴 때 부끄러움 없이 그분 앞에 서기 위하여 오늘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셔서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인생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인생이 그분과의 영원한 동행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어차피 여행자입니다.  그렇다면 여행을 즐겁게 하십시오.  여행은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즐겁습니다.  문제는 누구와 동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동행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동행자를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면서 즐거운 인생 여행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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