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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깊은 믿음으로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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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믿음으로 (딤전 1:12-17)

중세기 말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가 수도원에서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토마스야,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 제게는 주님 한 분 외에 다른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만 제게 계시면 저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솔로몬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저는 아직 어리고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제게 이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이런 솔로몬의 기도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솔로몬의 기도보다 더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믿음이 아퀴나스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제게는 주님 한 분 외에 다른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만 제게 계시면 저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무엇을 먹든 간에,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작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믿음이었지만 그 믿음이 자라고 깊어져서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큰 믿음, 더 깊은 믿음으로 자랄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 고백은 사도 바울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부끄러운 허물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고백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허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픈 과거,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용기도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처를 건드리는 아픔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로부터 당할 모욕과 창피함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허물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드러낸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허물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되고 치유 받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통로가 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허물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추어질 때에는 창피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으로 고백되어질 때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이 머물는 자리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정말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감추고 싶은 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로 그 일입니다. 
  
지금은 자신이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어리석게도 이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단의 괴수인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마땅히 처단되어야 할 위험한 무리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을 죽이는데도 앞장섰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8: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아예 교회를 뿌리 채 뽑아버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예전에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사도 바울에게는 큰 상처입니다. 지금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생각해보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짓이 없습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세워주셨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나에게는 부끄러움이 되지만, 그런 부끄러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큰 감사의 조건이 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갈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당연히 감사가 없는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좀 더 큰 믿음, 더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 죄와 허물로 얼룩진 지난날의 내 모습을 감추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분명 우리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요 아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복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증거된다면 드러냄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되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더 깊고 큰 믿음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는 고백 속에는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아는 사도 바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날의 내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춰내 무시하고 멸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을 보는 눈이 밝아지고 명확해집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의 허물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춰내기보다는 내 죄를 먼저 깨닫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운 죄인인데, 누구를 향해서 ‘당신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선 부끄러운 자신-죄악으로 얼룩져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죄인인 자신을 보는 데서부터 믿음은 시작됩니다. 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때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인됨을 더욱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나 자신에게서 죄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지금 나는 영적인 소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원래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의인이고, 종교적인 열심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지요,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지요, 훌륭한 학문을 공부한 최고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니까,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처음에는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하듯이 책망하고 비판하고 있는 보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어떤 사도들에 비해서 자신이 모자란다거나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린도후서 11:5)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도 신앙의 연조가 깊어가면서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었고, 은혜를 깨달을수록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한다.”고 말하던 그가 은혜가 깊어지면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린도전서 15:9)라고 말합니다. 사도라고 불리는 것조차 벅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3:8절에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라 칭함받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성도들보다 더 작고 보잘 것이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생애 말년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15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선언합니다. 더 이상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없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깊이 낮추면 낮출수록 그의 믿음은 더 깊어져만 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기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며 살 때에 그가 복음을 위해서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할 때 그가 남긴 인생의 족적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뿐입니다.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끔찍한 일밖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 인간적인 자부심을 갖고 살 때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의 괴수’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깨닫고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자, 이제는 자신을 낮추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게 됩니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낮아질 때에 그는 세계 역사를 바꾸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나를 비우고 낮아질 때, 그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내게 더욱 크신 분으로 다가오시며, 작아진 내 모습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풍성히 더해 주셔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거지도 있고, 창녀도 있고, 도둑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한 제자가 스승인 프랜시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짓는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그러자 프랜시스가 대답합니다. “사실은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못나고 더 나쁘고 더 죄가 많은 사람이라네.” 제자들이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아니 선생님처럼 믿음이 깊고 큰 인격자가 어찌 저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프랜시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저 사람들에게 부어주셨다면 저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을걸세.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과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뿐이라네.”

진정 깊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사람이 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해질 때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가 내 스스로 부족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해 집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며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도 부끄러운 자신을 불러주셨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평생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늘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그의 노력이 그의 믿음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다 거짓말쟁이요 이단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서 깊은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사울에게 보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사울 만나러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을 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러주셨는지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9: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사도 바울이 수없이 많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선한 본을 보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을 보이는 삶이 되지 않으면 복음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 이웃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개를 보면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것 같애.” 그런 말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내 이웃에게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욕 먹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0년 주기로 인구주택 총조사를 실시합니다. 지난 2005년도에 마지막 총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861만 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불교가 1072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천주교 인구가 514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인 1995년도 총조사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수치가 나왔습니다. 1995년에서 2005년 10년 사이에 불교 인구는 약 40만 명이 늘었습니다. 천주교는 무려 220만 명이나 늘었습니다. 그런데 그 10년 사이에 우리 기독교인은 오히려 14만 여명이 줄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학적 분석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살기가 좋아지면 종교인구가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졌기 때문에 기독교 인구가 줄어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똑같은 상황에서 천주교와 불교는 숫자가 늘었는데도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부끄럽지만,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에 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에 비쳐진 우리 기독교의 자아상이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종교라고 생각할까요? 세상 사람들이 바라본 기독교는 거룩한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이익과 명예에 얼룩진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 찬 욕심꾸러기들입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요즘 뉴스에서 들려오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부끄러운 것들뿐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기총이 권력 나눠먹기와 금권에 물들어 있고, 서로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이전투구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 세습은 이제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는 모습이 많이 사라지도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선한 일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장애인이나 사회적인 약자를 돕는 일은 교회가 단연 최고로 많이 합니다. 사회복지시설의 거의 80%가 기독교와 관련된 단체나 기독교인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교회를 곱지 않게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너무도 세상을 닮아버렸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심방하면서 종종 남편이나 가족 가운데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대부분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서 신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초신자들이 실망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도 그런 사람입니다. 이 안 목사도 그렇고, 우리 모두도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 빛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언행으로 살았던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들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욕을 먹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세상에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우신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 선포하며 살고 계십니까? 먼저 믿는 우리가 잘 믿어야, 바르게 살아야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믿고 바르게 믿어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들을 복음에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하신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눈 덮인 벌판을 걸어갈 때에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여러분,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는 우리의 후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우리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따라올 발자국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의 모습이 예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은 신중해야 합니다. 늘 말씀 위에 바로 서서 세상과 믿음의 후배들에게 본이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 우리의 믿음과 삶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야 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거룩한 절기에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져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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