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광의 소망 (골 1:27)

첨부 1


영광의 소망 (골 1:27)   

“가장 큰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절망이란 죄는 신도 용서하지 않는다.” 어떤 시인이 썼어요. 희망은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사는 것도 아닙니다. 판도라 상자 속에 마지막 남은 것이고요. 헬라어나 영어로 같아도 우리말은 소망이라고도 씁니다. 희망이건 소망이건 두 차원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은 세상 차원입니다. 돈 벌고 사랑 존경 받고 잘 되는 것이지요. 영적 차원의 소망은 영원히 잘 되는 것이고요. 영적 차원은 세상에서도 잘 되게 만듭니다. 반면에 세상 차원 희망으로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도 보장 받지 못합니다. 희망하는 대로 되는 경우가 없어요. 영원한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고요. 

1. 세상 희망은 속인다 

나치 수용소나 포로수용소의 경우를 봅시다. 어디서나 사람은 절망할 때 간단히 죽습니다. 감기나 설사도 쉽게 걸리고, 일단 걸리면 그냥 죽어요. 보통 때에는 그럴 수 없지요. 거기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게 터무니없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도 한계가 있어요. 계속 무자비한 상황이 오면 결국 절망하고 말아요. 

월남전 미군포로들이 좁은 닭장 감옥에 갇힙니다. 처음에는 절망 안하려고 낙관적으로 봅니다. “모든 게 잘 될 거야.” 고문과 학대가 처참합니다. “성탄절에는 석방되겠지.” 안 됩니다. “부활절엔 나가겠지.” 계속 그러다가 지치면 절망이 됩니다. 그러면 쓰러져요.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려 해도 점점 상황은 악화만 됩니다. 

더 버티는 사람은 누군가요? 쉽게 나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 타협해 적응합니다. 기대를 안 하니까 절망도 덜 합니다. 이들은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상황이 열리는 대로 당할 뿐입니다. 어디나 이렇게 포기하고 사는 이들 많아요. 의식부터 노예로 사는 겁니다. 

희망을 유지하더라도 죽음으로 끝납니다. 결론은 분명해요. 좋은 일이 오리라는 희망이 살아있게 하지만 그 희망 자체가 생명이 없어요. 혹시 희망한 걸 얻어도 잡을 수가 없어요. 결국 세상에 있는 희망은 그림자요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게 지혜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수록 속는 겁니다. 잡을 수 없는 안개를 쫓는 겁니다. 

소련 우주선이 처음 외계로 나갔을 때 조종사가 말합니다. “여기 우주에도 신은 없습니다.” 그 말 맞아요. 육신 눈으로는 어디를 보아도 해결책은 없습니다. 하늘에서 해결이 사람 모습으로 옵니다. 마구간에요. 살아있는 희망이 거기 빛납니다. 인류가 가진 희망은 거짓입니다. 어둠뿐인 이 세상, 희망은 희망의 세상에서 옵니다. 


2. 참소망은 예수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71: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62:5) 이 소망이 성탄절에 아기로 오셨어요.  
  
어떤 청년이 계속 자살을 시도했어요. 처음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점점 자살충동에 사로잡힙니다. 이걸 보아도 저걸 보아도 다 자살의 이유입니다. 아니, 계속 명령이 들립니다. 세상은 절대로 진공도 아니고 중립도 아닙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라고 했어요. 도와달랍니다. 기도로 영접시키자 달라집니다. 

불을 켜면 즉시 어둠이 사라지듯 예수를 모시기만해도 소망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는 확실한 그리고 영원한 소망입니다.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그 안에서 능력이 나와 삶을 비춥니다. 뭐하러 예배에 자꾸 오라고 하나요? 화초들은 태양을 쪼여야 건강해집니다. 살아있는 소망이 일어나도록 해야지요. 
  
예수가 왜 살아있는 소망인가요? 믿기만 해도 소망이 일어나요. 자세히 보면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만이 생명이요 부활입니다. 세상에 희망 두면 속는 겁니다. 거긴 힘이 없어요. 예수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 약속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도 그와 똑같이 만들어준다고 약속하십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 천국보다 더 바랄 소망이 있나요? 

LA 크렌쇼교회 프라이스목사가 말해요. “모든 낙심과 약함을 거부한다. 나는 예수 안에 있다. 내 이름은 영원한 생명책에 있고 내 안에는 성령이 계시다. 모든 영적 지원이 오는데 왜 낙심하랴. 상황이나 병이나 기분에 눌리지 말자. 내 안에는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가 계시다. 그가 영광의 소망이다.” 그러니 세상에서도 잘 됩니다.  


3. 영원을 소망하라 

영원히 예수처럼 부활하는 게 소망의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잔가지 희망들은 더욱 강하게 이루어집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약속을 가지고 소원하세요.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개역 시21:2)” 소망은 소원을 갖게 만듭니다. 

한나는 소망합니다. 성전에 나와 통곡하며 말합니다.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아들만 얻으려는 게 아닙니다. 영적 차원의 소망입니다. 하나님 일, 곧 영원한 일을 하는 아들을 얻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차원의 소원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예언자 사무엘이 나옵니다. 그가 아직 어릴 때 약속대로 성전에 바칩니다. 헤어지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사무엘상 2장에 나옵니다. 그러한 세상의 욕심을 넘어선 차원 높은 소망은 세상 복도 크게 얻습니다. 아이 못나던 여자였지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해 주십니다.  

원하는 대로 좋은 것을 요구하세요. 하지만 한나처럼 목표를 높게 잡으세요. 땅에서 육신만 잘 먹고 잘 살려하면 세상 차원의 희망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내 영혼을 위해서 소망해 보세요. 신자는 영생과 부활이 약속되었습니다. 더 나은 영생과 부활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도 잘 되게 하십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부끄러운 수준이 아닌지요? 내 안에는 영광의 소망이 계십니다. 그를 의지해서 왕으로 영원을 가진 신으로 소원합시다. 그러면 신적인 능력이 나와서 소망하는 것을 끌어옵니다. 또한 나도 그 소망하는 것을 향해 성장하게 됩니다. 어떠한 어둠도 아픔도 극복할 능력이 나옵니다. 영원을 소망하세요. 

묵상을 위한 질문: 영원한 소망 예수를 항상 느끼는가요? 그를 의지해 무엇을 소망하나요?
(김기홍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