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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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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 3:1-16)
  

들어가는 말

다음 주일은 우리 교회에서 성탄절 기념 세례식을 갖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치러야 할 의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 18세가 되면 성년이 되었다는 성년식,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약혼식,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는 결혼식, 이 세상을 영원히 사별하는 영결식, 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 날을 기억하며 갖는 추도식 등.

여러분,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의식 두 가지가 있는데 아십니까? 
주님이 명령하신 의식이라고 하여 성례라고 합니다. 
그것은 세례식과 성만찬식입니다. 
세례에 대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성만찬에 대한 명령입니다. 
눅 22:19-20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우리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세례식과 성만찬식을 때마다 시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니고데모란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거듭나야지.”
니고데모가 반문합니다. 
“거듭난다니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이란 희랍어로 ‘아노덴’인데 그 뜻은 ① 다시 태어남, ② 내적으로 태어남, ③ 위로부터(교육이나 지식이나 경험 등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세례란 내적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결혼식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간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의식이지요? 
그런데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식을 자꾸 미루거나, 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결혼식? 그게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말한다면 그 관계를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잖아요?
우리는 결혼식을 통하여 남녀 간의 사랑이 더 견고해지고, 더 책임적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란 의식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책임적이 됩니다.

그러면 세례란 무엇인지 그 의미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두 번째 출생(중생의 씻음)이라고도 합니다.
옛날의 세례식은 주로 사람을 물에 푹 잠그는 침례를 행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어서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사지냄을 뜻합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육적인 출생은 이것으로 죽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과거의 사람은 이것으로 죽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진노의 자식은 이것으로 죽었습니다.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쫓아가던 육적인 사람은 이것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린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죄를 물리치고 죄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진노와 형벌의 자식이 아니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육적인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이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신비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with Christ)!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는 것이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죽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과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사는 의식입니다. 

호흡이 끊어진 적도 없습니다. 
심장이 멎은 적도 없습니다. 
땅속에 장사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적이란 것입니다.
또 병약한 몸이 건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침침하던 시력이 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숨이 차오르던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적이란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롬 6: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합하여’란 말씀이 많이 나오지요? 
‘그와 함께’란 말씀도 있지요? 
이 말씀들은 신비적 연합을 뜻합니다. 
롬 6:8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례를 이미 받으신 여러분! 
세례를 받으실 여러분! 
이 신비한 영적 진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2) 세례는 하늘의 기업(천국)을 약속받은 보증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에 등재하지요? 
호적에 이름이 오르면 그는 국민으로서 자격을 얻습니다. 
그는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됩니다. 
그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국가에서 입학통지서를 보내줍니다. 
그 아이가 커서 군대에 갈 나이가 되면 국가에서 입영통지서를 보내줍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입학통지서가 안 오는 아이가 있어요. 
군대에 갈 나이가 됐는데도 입영통지서가 안 오는 청년이 있어요. 

왜 그럴까요? 
호적에 이름이 올라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적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으면 국민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 나라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습니다.
이 이치를 영적으로 적용해보세요.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자격을 가지려면,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의 호적인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런데 어떤 사람만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까요?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자입니다.
콥틱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물’을 세례라고 해석합니다.
세례를 구원의 외적인 표시로, 성령을 구원의 내적인 표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할례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듯이 세례로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세례식은 내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이 땅에서 우리가 잡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보기를 했습니까? 
조회를 해보았습니까?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내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아는 보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 영적 의미를 깨달으면 세례야말로 문자 그대로 성례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할 성례입니다. 

3) 세례는 죄 씻음 받음을 뜻합니다.

딛3: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원래 물이란 것은 더러운 것을 씻어 내립니다. 
찬 274장에도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세례는 내 죄가 씻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존 웨슬리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공로로 원죄와 원죄의 죄책을 씻는 것이다. 신자는 세례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고, 죄의 사면을 받고, 하늘의 씻김(heavenly washing)이라는 영원한 축복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씻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왜 그렇게 감격합니까? 
저도 세례 받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의 친구는 세례 받을 때에 아주 엉엉 울었습니다. 
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그렇게 감격해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셨다.’는 용서받은 감격으로 그렇게 떠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제일 잘 알잖아요!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내가 하나님 사랑 받겠다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들이밀 수 있는 존재입니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이마에, 우리의 볼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우리의 갖가지 추악한 죄를 씻어 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어거스턴이 암브로시우스 감독한테 세례를 받을 때 그는 젊은 시절 불륜의 씨앗으로 맺힌 자기 아들을 데리고 세례대 앞으로 나갔습니다. 
어거스틴은 결혼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가 누구라는 것을! 
부끄러웠겠지요?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아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것을 숨기고 세례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감격스럽게 세례를 받고 아들을 앞세우고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회중들 가운데 어거스틴을 죄인이라고 지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웃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란 그 어떤 죄이든지 용서하는 용서의 표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의 물줄기가 씻어 내리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아무리 파렴치한 죄라 할지라도 씻어 내립니다.
세례를 준비하시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이마를 타고 내리는 물은 물이 아니라 여러분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린 예수님의 피임을 믿으십시오!

찬송가 3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합창

4)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들어왔다는 공개적인 선입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지역에서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종교집단의 일원이 되고자 할 때에는 꼭 세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막1장에 보면, 예수님도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세례식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중심으로 한 특정한 집단에 들어가는 의식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면 우리는 3가지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① 가족의식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지만 서로를 항하여 ‘형제’라고 ‘자매’라고 부릅니다. 
‘형제자매’란 한 가족일 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입니다. 
가족은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습니다. 
가족은 한 핏줄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습니다. 
형제끼리 다투고 형제끼리 미워하면 그 집안은 제대로 된 집안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가족의식이 강한 교회입니다. 
꼭 가족의식을 가지십시오!

② 주인의식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공동체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주인의식과 손님의식은 다릅니다. 
주인은 일이 잘 되면 내 일이니까 진정으로 기뻐하고, 일이 잘 안되면 내 일이니까 책임을 집니다. 
손님은 일이 잘 돼도 내 일이 아니니까 별 기쁨이 없고, 일이 잘 안되면 불평하고 책임을 추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교회에 하루를 머물다 가더라도 꼭 주인의식을 갖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래야만 보람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③ 지체의식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고전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지체의식이란 고통도 함께 기쁨도 함께 하는 의식입니다.
손가락에 작은 가시라도 찔리면 편안히 잠을 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욱신거리고 까칠 거리고 신경이 쓰여서 그냥 잘 수 없지요. 
온 몸 전체가 자지 못하고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게 바로 지체의식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교우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세례를 받으실 교우 여러분.
이제까지 세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 교우 여러분.
세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보이는 물질적 표적(visible material sign)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은혜(invisible spiritual grace)를 누리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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