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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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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18-25)

오래 전에 본 영화 캐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늑대와의 춤을’을 보던 날 관객들은‘주먹 쥐고 일어서’ ‘머리 속의 바람’ ‘발로 차는 새’등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름이 너무 재미있어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남북전쟁 시절 북군 장교로 복무하던 주인공 존 던버 중위가 모닥불 주위에서 외로운 늑대와 친구 삼아 춤을 추는 것을 본 인디언들은 그에게 ‘늑대와의 춤을’이라는 인디언 식 이름을 주었습니다.  문화가 다른 민족끼리 친구가 되어 이름을 주고 받고 그 뜻을 알고 나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름들이 많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 중에도 Smith, Baker, Carter, Taylor, Capenters, Shoemaker 등 조상들의 직업을 따라 지어진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름을 인디언 식으로 풀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인 이름으로 많이 사용하는 영철이라는 이름을 ‘길 영’자에 ‘밝을 철’로 썼다면 ‘오래오래 똑똑해’라는 뜻이고, ‘밝을 철’에 ‘빼어날 수’를 쓴 철수는 ‘똑똑하고 빼어나라’는 뜻이 됩니다.  ‘아름다울 미’에 ‘꽃부리 영’을 쓴 미영 씨는 ‘꽃처럼 예쁜이’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은 너무 거창한 뜻을 가졌고 또는 성과 이름을 합해서 읽으면 의미가 이상 야릇해져 본인에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듣는 순간 웃음보를 터뜨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절대 사용하지 않는 이름 두 개가 있다면 하나는 ‘예수’ 그리고 하나는 ‘유다’ 입니다.   야곱의 아들이며 다윗의 조상이었던 유다라는 이름이 결코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가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후 ‘유다’ 하면 배신자를 가리키는 불명예스런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역시 너무 위대한 이름이라 함부로 붙여주지 않는 이름입니다.

 한국인들 중에 ‘예도 례’와 ‘목숨 수’를 써서 이예수 김예수…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말의 예수와 성경의 예수는 발음은 같아도 그 뜻이 전혀 달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을 듯 합니다.   성은 예, 이름은 수, 예수라는 사람이 병원 대기실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예수님!  들어오세요!’ 하고 부르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향해 주목하지 않을까요?예수라는 이름은 이처럼 아무나 쉽게 쓰기에는 너무 묵직한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고하셨습니다.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인데 간단히 줄이면 ‘구원자’라는 거창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우리와 언제나 늘 함께 계시려고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뜻의 이름을 가진 구약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신약 헬라어의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이름답게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으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 그 땅을 나누어주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어른들이 지어주는 아기의 이름은 이 다음에 자라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담겼습니다.  그런데 이름처럼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름값을 하고 살아라 하는데 너무 거창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늘 부담을 가지고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이름의 뜻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까?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식으로 예수와 그리스도가 따라 다닙니다.   이때 예수는 본명이며, 그리스도는 직분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목사 윤영택 혹은 윤영택 목사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직분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구약 히브리어의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요1:41).  우리 말로는 ‘구세주’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로 나가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유대인들이 사람을 보내어‘당신이 누구요?’하고 질문했습니다.   요한의 특이한 외모 뿐 아니라  행동이나 말하는 투가 옛날의 엘리야 선지자처럼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만나러 광야로 몰려나갔기 때문에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던 겁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나는 엘리야가 아니고 그리스도는 더욱 아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하며 겸손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실 때 대제사장이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희가 말하였다’ 하고 시인하자 그들이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며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하는 모독죄를 범했다 하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누가 너를 때렸는가 알아맞춰보라’ 하고 조롱했습니다(마26장).   자기들 앞에 끌려 온 나사렛 예수가 절대로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고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하며 기다렸던 메시야,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는 어마어마한 영광 가운데 계시는 고귀한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나사렛 시골 출신 천한 목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하니 기가 막혀 무시하며 그런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감히 사람들이 함부로 사칭할 수도 없고 조롱할 수도 없는 높고 귀하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천한 목수의 집안에서 낮고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그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할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었으니 죄인들의 영원한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흘리는 죽음으로 대신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외에 어떤 사람도 남을 구원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의롭고 선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12월 초 뉴욕 맨허튼 지하철 49번가 역에서 58세 재미 동포 한기석씨가 데이비스라는 흑인 남성에게 떠밀려 선로로 떨어져 열차에 치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한기석 씨가 열차에 부딪히기 전 22초 동안 우마르 압바시라는 사진기자는 달려오는 전동차를 바라보며 선로에서 올라오려고 애를 쓰는 한 씨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찍었고 그 사진을 뉴욕포스트에 팔았습니다.   뉴욕포스트는 이 사진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으며 ‘이 사람은 곧 죽을 운명(Doomed)’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습니다. 

사진기자들은 사건 현장에서 '인명(人命)이 먼저냐, 보도가 먼저냐' 고민하는데 때로는 한 사람의 죽음을 담은 사진이 수많은 다른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 사진 기자와 '뉴욕포스트'는 특종 욕심에 눈이 멀어 인륜을 저버린 짓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람을 먼저 살려야지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사진기자 우마르 압바시는 "거기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씨가 선로 위로 떨어지자 다들 도망치기 바빴다.  나는 너무 멀리 있었지만 가까이 있던 승객 누구도 그를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달려가며 카메라 플래쉬로 기관사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해명을 했습니다.  

한기석 씨가 출석했던 뉴욕 우리교회 목사님 말에 의하면 “한기석 성도는 힘든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을 아끼지 않은 신실한 성도였으며, 교인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거나 교회에 기쁜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오신 분이었다”했고,  “지난 1년 동안 토요일마다 교회 청소를 혼자 도맡아 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뉴욕 우리교회 성도들에 따르면 한 씨는 지난 10월말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교회 성도들이 피해를 당했을 때, 솔선수범하여 피해 성도들의 가정을 도왔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한기석 씨를 응급치료했던 의사는 “한 씨는 다른 승객들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홀로 맞섰던 용감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이비스를 제지하다 이런 끔찍한 사고를 만난 한기석 씨는 혹시 다른 사람이 지하철 승강장 아래로 떨어져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행동했을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 뉴욕의 지하철 승강장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 씨가 떨어지자 모두들 달아나기 바빴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이 없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저는 퍼뜩 도쿄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씨가 생각났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승강장 아래로 떨어져 위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죄인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세상이라는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사양하고 자기를 비우셨을 뿐 아니라 사람을 구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셨으며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위험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도 달려들어 구출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전동차가 사람을 치고 멈췄을 때 벌떼처럼 달려들어 휴대폰 카메라로 죽어가는 한기석 씨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끔찍한 사고 직전 22초의 순간을 카메라로 담은 기자가 정말 한기석 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 유가족들을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 절박한 광경이 담긴 사진을 다음날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도록 신문사에 팔아 넘길 수 있었을까요?   그러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카메라 플래시로 기관사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는 것 뿐이었다 해명했으니 과연 그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렇게 비정한 뉴욕의 시민들처럼 세상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들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정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메시야의 직무를 완수하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예수님을 가리켜 영웅심리에 가득찬 어리석은 행동이라 비판할 수 있을까요?무모한 듯 보이는 그분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는데 어느 누가 예수님의 희생을 값싼 행위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작전을 펼칠 때 때로는 위험과 큰 희생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대원들은 다른 사람의 안전과 목숨 건지는 일에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사명입니다.   불이 난 집 안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려다 순직한 소방관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힘이 달려 죽음을 당한 사람,  자동차에 치게 될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사람의 이야기 등 이런 용감한 사람들의 선행과 안타까운 희생에 관한 사연을 자주 듣습니다.   어찌 그런 무모한 행동으로 아까운 목숨을 버렸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한 살신성인의 숭고한 정신까지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어가는 죄인들을 향해 ‘위험해’하며 소리만 지르고 ‘꾸무럭거리다 죽을 지 모르니 어서 빨리 빠져 나와’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이 제 스스로 그 죽음을 면할 수 있을까요?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신 것은 죄인들을 현장에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기 위함이지 위험 신호만 보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위험 신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외치고 또 외치게 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를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제 힘으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죽음의 자리에 눌러 앉아 무감각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 보내셨고 자기 목숨과 맞바꾸어 죄인들을 구조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진 다른 이들을 밖으로 밀쳐 내어 살리셨고 자신이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랑으로 구조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자발적으로 낮아지며 목숨까지 던졌다면 그 희생이, 그 죽음이 소영웅주의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으로 값싸게 취급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대신 내 목숨을 내놓을 만한 용기는 없더라도 이웃의 어려움에 동참하기 위해 최소한 내가 가진 물질, 시간, 재능, 지식, 건강 등 그 무엇인가를 나누는 작은 희생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구원에 감사함으로 보답하는 작은 섬김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 너무 거창하여 이름값을 하고 살기에 버거운 사람도 있습니다.   이름 대로 살아야 할 의무도 없고 이름 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좋은 이름값을 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 말고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능력 있는 이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죄인들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며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자고 권면했습니다(엡4:1).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짐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그 이름에 걸맞게 삽시다.   나는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나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 가운데 계시고 내 삶의 중심에 계시며 나를 다스리시는 주인으로 인정하며 순종할 때 세상을 이기며 죄를 이기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 생명을 구하러 세상에 낮아져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쁨과 감사와 평화의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닮아 작은 예수,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구원의 복음을 나눔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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