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임마누엘 (마 1:18-25)

첨부 1


임마누엘 (마 1:18-25)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큰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제 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루먼(1884-1972) 대통령은 취임 연설 말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솔로몬의 기도에서 인용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매사에 이렇게 기도하며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향리로 돌아 왔을 때,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인기도 많고, 늘 반장만 하셨겠지요?”
그러자 트루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 반대란다. 나는 어렸을 때 재주도 없었고, 운동도 못했고, 누가 조금만 큰 소리를 쳐도 겁을 잔뜩 집어먹는 겁쟁이였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요?”
“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믿었단다. 그래서 난 아무런 재능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모든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노력했단다. 하나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단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실망하고 좌절한 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외국의 침략 속에서 그런 절망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서도 근대에 들어서자마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 절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독립을 열망하였지만, 실제로 일본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제로부터 억압당하는 이 민족을 구원해 주셔서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셨습니다. 그 많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펼쳐온 우리 민족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민족의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북쪽에서 막강한 무기와 군대를 앞세워 남침한 6.25 전쟁만 하더라도 단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이 될 정도로 남쪽의 수준은 형편없었습니다. 

유엔군이 때맞춰 참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을 연임하고 있던 분이 트루먼 대통령입니다. 그는 해방 후 한국에 진주했던 미군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한국에는 아무런 미련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당장 도와주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트루먼은 조금도 관심 없는 듯 보좌관에게 신경을 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사람 당시 미국의 교계를 앞장서서 이끌어가던 빌리그레이엄 목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대통령 각하 코리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나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 자그마치 50만 명의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의 박해를 피해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실 랍니까? 당신도 크리스천으로서 어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결코 각하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온 미국의 크리스천과 손을 잡고 당신을 낙선시키는데 앞장 설 것입니다.”

그 말에 놀란 트루먼이 당장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의 대표가 회의에 지각을 합니다. 그래서 소련 대표가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이 되고난 다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론 소련 대표가 일찍 떠났는데 도중에 교통 혼잡으로 인해 길이 막혀 늦어졌다니 그때 무슨 차가 그렇게 많았다고 교통체증이 하필 그 시간에 생겼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이 땅의 크리스천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계 역사 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세계에서 가장 못 살던 나라에서 이제는 세계에서 십위 안팎을 다투는 나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유대 갈릴리 지방에서도 멀리 구석진 산골 이스르엘 골짜기의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숲속 마을에 있는 작은 동네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그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옵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이미 윗집에 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가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사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이 지키는 모세의 법으로는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 임신하면 그 두 사람을 다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입니다. 
그래 대답을 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더더욱 남자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된다고 하니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실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못하실 일이 없으시니 가능도 하겠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런 일이 지구 역사상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마리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지만 요셉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날 보니 마리아의 배가 불러옵니다. 그래도 너무도 사랑하던 여인이기에 어떻게 하면 저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헤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저에게 말씀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 그분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름부터가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듯 죄의 싹이 되는 남자를 통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이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태어나는 후손들은 죄악의 쓴 뿌리를 안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아닙니다. 듣기는 들어도 그저 막연할 뿐입니다. 그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해도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뿌리 없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쉽게 흔들립니다. 작은 일에도 금방 실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다르죠. 하지만 그건 오늘의 이야기일 뿐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습니다. 그랬던 백성들,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부르짖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 사람의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함께 주님 나라에 이르도록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유대인 엘리 위젤이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탈출을 시도하다 처참하게 죽는 유대인 소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수용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교수형을 당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는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달린 채 20여 분 이상 발버둥 쳤습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태인들이 여기저기서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했습니다. 그 가운데 있던 엘리에 비젤의 마음속에도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절규가 터져나왔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세요? 지금 당신은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비젤은 이때의 감동을 평생 가슴에 품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엘리에 비젤은 모리야기라는 작가를 만나 그 당시의 신비한 음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모리야기는 

“저는 알 것 같네요. 그분은 바로 당신의 동족인 유대인 예수라고 합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의 고난 속에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지진 해일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기도 하지만 우리 고난에 함께 하시고 아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이 단순히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언제 죽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영원한 죽음, 최후의 심판대가 우리들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정해진 길입니다. 아니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사람들은 죽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이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절했습니다.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창조 언약 즉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서로 사랑하도록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노동의 복을 주셨습니다. 일하는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하는데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또 가정의 평안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기쁨으로 일을 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놀고먹으려고만 했습니다. 편한 길만 찾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죽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하여금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죗값을 치루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용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어 그 죗값을 치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길 밖에는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지만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처절하게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거기다가 이마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는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간구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쉽게 믿은 것 같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서 우리가 감당하고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죗값을 처절하게 그 몸으로 치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배 아판 난 자식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배 아파 난 자식이 아니라 그 생명으로 바꾸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만약 호화 궁궐에서 왕으로 태어나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고 하였다면 그리고 손에 칼을 들고 믿을래 죽을래 하였다면 겉으로야 믿는다고 따른다고 하였을지라도 새 생명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직접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주가 되시어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 모든 믿음 안에서 자녀된 자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영으로 다시 산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죽으시는 순간 나도 죽은 것입니다. 죄에 관하여 그 순간 나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내 죗값이 다 청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영원한 생명의 사람으로 믿음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녀로서 사는 것은 사실은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면 우리의 삶도 거기서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영원한 생명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바울 사도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합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 사도는 벧전 4:7~11을 통해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중심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마음이 요동을 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쉽게 낙심도 하고 좌절도 합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이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의 중심이 바로 되지 못해서입니다. 

거기다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도하여도 근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염려함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 없이 의심하며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중언부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겠다는데 왜 의심하십니까? 

그리고 거기에다 급하기는 또 무엇이 그리도 급합니까? 그냥 밥 하면 밥 나와라 뚝딱 그런 도깨비 방망이마냥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으로 간구하고 때를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모든 수고와 더불어 또한 주님이 우리들에게 찾으시는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정성껏 쌀을 씻어서 밥을 안치고는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밥이 뜸이 다 들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은 게으르기 짝이 없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데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왜 안 주시냐고 합니다. 이게 뭐냐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중심을 바로 잡으시고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 되십시오. 그리고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뜨겁게 사랑은 하되 받는 것만 뜨겁게 하려고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으니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돕는 배필은 도움 받는 배필이 아니라 도와주는 배필입니다. 도와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대접하는데 왜 원망합니까? 나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대접하세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 봉사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못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사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직임을 맡기실 때는 반드시 먼저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한다면 다들 자기 자랑에 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능력도 지혜도 부족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느냐 하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길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셨던 주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요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요 주님이 우리의 방패시오 주님이 우리의 상급이십니다. 이 주님과 함께 날마다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므로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 도마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 후의 일은 기록이 없으므로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마의 행전’이라는 외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국으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성령께서는 도마에게 인도에 가라는 지시를 했으나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인도까지 여행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는 히브리인인데 어떻게 인도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저는 못갑니다.” 
그 때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서 
“두려워말라, 도마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나 도마가 아주 강하게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저는 못갑니다.” 
이때 압바네스라는 상인이 인도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군다포러스 왕의 보냄을 받고 기술 좋은 목수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이 시장에 와서 압바네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목수를 사시렵니까?” 
“예” 
“그래요, 내가 목수인 종이 하나 있는데 당신께 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기 있는 도마를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흥정이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중히 “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는 도마라 이름하는 나의 종을 인도의 왕 군다포러스의 상인 압바네스에게 판 것을 인정함” 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압바네스는 도마에게 와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분이 당신의 주인이요?” 
“예” 
“나는 그로부터 당신은 샀소” 
도마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도마는 일찍 일어나 기도하기를 “나의 주님, 나는 당신의 뜻을 좇겠습니다.” 하고 주님께 완전히 항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남인도에 가면 도마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우리 혼자 보내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 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느니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고 실제 시간을 재어보면서 서로 자기들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길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이 얼마든지 주님이 이제 됐다 하고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