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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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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9-14)

성탄절이 되기 전 4주, 오늘부터 크리스마스 때까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대강절, 혹은 대림절, 강림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 당시 기다리는 메시야가 오셨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느 때 우리들은 사람을 빨리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같이 이렇게 목회하는 목사는 그런 일이 많이 발생합니다. 상대방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다고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미안하고 어색해집니다. 

또 반대로 수십 년 전에 헤어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내가 보자마자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대면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알아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인간관계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이야기인데 집사님이 아내가 오래간만에 한국을 가서 한 달 동안 있다가 오게 되어서 아내를 맞이하러 비행장에 나갔습니다. 한 달 만에 아내가 오는데 승객 명단에도 있고 비행기도 다 도착했다고 사인판에 다 나오고 사람도 다 나왔는데 아내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비행기 명단에도 나와 있고 이 비행기 맞고….’ 그래도 오지를 않으니까 ‘인천공항에서 도로 들어갔나? 아픈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 와보니까 아내가 집에 와 있는 것입니다. 보자마자 아내가 남편에게 “한 달 만에 오는데 비행장에도 안 나오고 어디를 갔다 오는 거예요?” 막 꾸중을 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비행장에서 오는 길이야! 2시간 이상 기다렸는데?” 서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내가 나온 것을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비슷한 여자가 한명 지나갔다.” 그래서 그 소문이 퍼져서 비슷한 여자와 사는 집사라고 놀림감이 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런데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4장 9절에 가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여기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8장 19절에 가면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또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냐? 알아보겠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예레미야라고 하나이다.” “그러니까 못 알아보는 것이다.” 모두 틀린 대답도 하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오신다고 했고 예수님 오시는 방법은 “나사렛에서 사실 것이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다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오셨는데 왜 알아보지 못하는가? 

오늘 말씀에 이렇게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이라는 소유권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이 지금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 땅인 줄 알고 삽니다. 또, 세상에 많은 백성들이 있는데 자기 백성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서 예화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고 멀리 타국에 갔다고 했습니다. 수확의 당연한 자기 몫을 가져오라고 종을 보냈더니 그 땅을 맡아서 청지기 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 땅이 자기들 땅인 양 수확을 받으러 온 종을 때려서 공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맨 마지막에 최후 수단으로 그 땅의 상속 권리가 있는 자기의 아들을 보내서 마땅한 열매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아! 이는 상속자다. 죽여 버리면 이 땅을 영원히 우리가 차지한다.” 그래서 죽여 버렸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과거 역사부터 온통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24편을 보십시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소유권이 하나님이로다.” 그런데 인간들이 욕심을 부려서 땅과 백성이 자기들 것인 양 끝없는 땅 욕심을 부리고 끝없는 자기 백성 욕심을 부려서 그렇게 많은 전쟁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절대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 자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으니까 백성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왔는데 주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꺼야! 이건 내꺼야!” 이런 욕심을 부립니다. 

여러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임금님이 백성을 향해서 “짐은 곧 나라다.” 이것은 내거란 말입니다. 나라 땅이 다 자기 것으로 알기 때문에 또, 그 나라 백성은 다 자기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사용하고 자기 뜻대로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들은 땅과 백성의 주인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해서 교회를 다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상속자야. 죽여야 돼! 그리고 우리가 차지하고 살아야 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은행의 직원들과 같습니다. 은행에는 돈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습니다. 돈이 쓰레기 쌓여있듯 잔뜩 있습니다. 만약 직원들이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생각할 때 이 사회는 금방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직원들은 관리의 책임만 있을 뿐입니다. 그 돈을 잘 관리해서 그 돈의 진짜 주인에게 행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은행 직원이 사무 착오를 일으켜서 계산을 잘못해서 100만원인데 10만원이라고 적어놓으면 ‘0’ 하나를 잘못 기재하면 그 돈의 주인은 즉시 관리자에게 따집니다. “여보시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그런 것이 발견될 때 관리자는 주인에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사과하면서 양해를 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주인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또, 사람의 주인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오매” 자기 것인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땅과 백성의 주인됨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땅을 가지고 있든지 어느 백성을 가지고 있든지 청지기입니다. 관리자들입니다. 심지어 내가 피땀 흘려서 돈을 벌어서 내 이름으로 등기 문서가 되어 있는 땅일지라도 자수성가해서 내 사업체를 내 마음대로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결혼해서 산고의 노력으로 얻은 아들딸일지라도 소유권은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나라나 어떤 공동체나 자신이 소속하고 땅이나 백성을 자기 것으로 알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갈 데가 없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으면 우리 땅을 다 내어드리고 이 세상의 주인이 오셨으므로 그 분의 뜻대로 세상을 운영해 나가도록 했어야 되는데 “아! 상속자가 왔어. 진짜 주인 아들이야.” “그러면 어떡해?” “죽여 버리면 우리 거야.”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온 백성의 주인 자리를 예수님께 드려야 되는데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그 주인이 오는 것을 시기해서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하는 수치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요한이 지금 밝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문제의 기초적 요인을 살펴보면 우리들 마음속에 이 교회라는 땅이 자기 것으로 알고 주인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흉악한 마귀의 생각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우리 신앙도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내가 잘 관리를 해서 내 믿음이 주인에게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쓰여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장 싫어했습니다. 

왜 싫어하셨습니까? 자기 것인 양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의인이나 된 듯이 비판자의 자세를 가지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나섰습니다. “회칠한 무덤이여! 천국을 가로막고 소경된 인도자여!” 유대민족의 영원한 실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온 세상 민족에게 나눠주지 못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도하는 거 보셨습니까? 절대로 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부탁을 하시고 마지막 말을 끝냈습니까?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그게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이다. 너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나눠주어야 되는데 국수주의라고 하는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혀서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아니하여서 유대인들이 심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 주인을 몰라볼 때 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것이 노아 홍수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린 횡령죄가 세상에 가득했을 때 그 잘못 가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은 땅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섬기고 있는 노아에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라고 하신 것이 노아의 심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모든 것의 주인이 나라고 하는 사상이 가득할 때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주인의 자리에 모셔 들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주여! 주여!”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주인이시여!”라는 뜻입니다. 그 주인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이 자기 것으로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내가 주인인데 무슨 주인이 왔단 말이야?” “진짜 주인이야? 그러면 죽여 없애버리면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이 권세를 주겠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땅과 이백성의 주인으로 알고 그렇게 영접하는 자는 나도 그 주인의 권리와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 권세를 나에게 주시겠다.’ 라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은 “이 땅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가 뭐가 그렇게 유명하고 위대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때 온 세상이 땅의 주인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요한은 알아봤습니다. 그때 사실 온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 그에게 나가서 새로운 종교 의식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이는 메시야다.” 사람들이 다 메시야로 경배하려고 할 때 “나는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뭐요?”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다.” “그러면 메시야는 누구입니까?” “내 뒤에 오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 있다.” 그래서 가장 큰 자입니다. 주인을 알아본 세례 요한, 그리고 주인이라고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은 다 고난당했습니다. 

이순신 장군, 이율곡 선생 모두 고난당했습니다. 왜? 알아주지 않습니다. 임금님도 안 알아주고 백성들도 안 알아주고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들은 다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 선도까지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 왜군들이 몰려오는데 그것을 대비하지 않고 다른 일만 하고 있으니 그러 말을 했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남해안 거제도에 달린 외로운 한산 섬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수류에 혼자 앉아 ‘나라도 이 왜군을 막아야지 큰 칼을 옆에 차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데 나라에서는 자리다툼만 세월을 보내니 깊은 시름을 하는데 그 밤에 누가 피리를 불어주어서 내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한탄했습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율곡 선생은 “앞으로 그런 일이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니 10만 대군을 양성할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애국충정의 말을 했다가 그것이 임금님의 미움을 받아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서민이 되어서 저 한탄강 강가에 가서 정자 하나를 짓고 강가에다 매일 기름칠을 하니 “저 율곡 선생이 정신이 돌았다. 쫓겨나시더니 저 한탄강 기슭에 누가 와서 즐긴다고 저기다 정자 하나를 짓고 날마다 기름칠을 하니 아무래도 저 율곡 선생이 이상해졌다.” 그는 묵묵히 “필요한 때가 있다.” 나중의 그의 예언대로 국란을 당해서 임금님이 신의주로 도망을 가는데 한탄강에 이르러 한밤중에 강이 있으니 건너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불을 밝혀야 하는데 그 한밤중에 누군가 그 정자의 기름칠한 정자에 불을 지르니 환하게 한탄강을 비추어 임금님이 무사히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땅도 백성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텅 비어있는 아무것도 없는 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의 모든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하고 예수님이 계실만한 방이 전혀 없이 신앙도 교회도 땅도 백성도 사업도 자식도, 금덩어리 돈 모두 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으니까 예수님은 계실 데가 없어서 마구간으로 쫓겨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과 백성을 주인의 뜻대로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사용해야 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국제기구를 운영하는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평화가 오고 그런 비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나라 대통령을 하면 그 사람 때문에 온 국민이 행복하고 그런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잘 사는 사회가 되고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구원의 방주 공동체가 되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것을 잘 관리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빌려서 살고 있는 인간들이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믿는 온유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투쟁이란 무엇입니까? 이 땅과 백성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횡령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정신을 차리도록 투쟁을 해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의 자리에 주인을 모시는 작업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마귀의 손에 들어간 땅과 백성을 빼앗아서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제 생각에 북한의 주석은 김일성이 되지 말고 조만식 선생이 되었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온유하고 욕심 없는 지도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름까지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자기 이름은 김성주인데 빨치산 부대의 항일운동 투쟁한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해서 남의 것을 가지고 땅을 67년 동안이나 자기 것으로 삼아 그 땅의 백성의 주인인 예수님을 다 내쫓아버려서 지금 북한 땅이 된 거 아닙니까? 땅과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므로 그의 주인됨을 인정하고 그 주인의 뜻을 인정하고 우리는 겸손히 청지기로서 살아가야 됩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어떤 권세라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재벌도 하나님의 땅과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것으로 알면 죄입니다. 관리인의 일을 충실하게 해서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되돌리는 우리 몸뚱이마저도 사도 바울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그가 필요한 대로 써져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알아주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눈물 흘리고 피 흘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가 살아가면 됩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유일하게 눈이 오는 지역이 한 군데 있습니다. 빅베어라는 산입니다. 거기 곰이 많아서 빅베어입니다. 얼마나 경치가 좋고 그 아열대 사막기후에서 겨울철이면 눈이 내리니 얼마나 눈 구경을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그 산에 큰 별장 하나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 제일 땅 값 비싼 빅베어 호수가 있습니다. 눈이 녹아내려서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철철 흐릅니다. 큰 호숫가 주변이 땅값이 제일 비싸고 제일 좋은 곳입니다. 

거기 호숫가에 붙은 제일 큰 땅과 별장을 가지고 있는 큰 부자가 있습니다. 거기가면 여름에는 그 호수에서 보트를 끌고 수영하고 말 타고 별것을 다 합니다. 사람들이 수백 명이 와서 기거해도 괜찮은 시설을 다 완비하고 친구와 동창들 불러서 즐기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나도 저런 별장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아서 저런 별장을 이런 땅값 비싼 곳에 사놓고 즐길까?’ 생각합니다. 그 땅은 자기 땅입니다. 그 부자가 피땀 흘려서 돈 벌어서 마련한 것입니다. 

어느 날 선언합니다. “나 이거 그만 갖겠습니다.” “그러면 뭐할 겁니까? 팔 건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좋은 것을 주셨는데 너 혼자만 가지고 있을 거냐고 야단맞을 거 같아서 그만 가지겠습니다. 너무 많이 즐겼습니다.” 자기 아들 딸 다 있습니다. 아직도 그 사람은 생애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만 가져야지 나 혼자 너무 많이 누렸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떡할 겁니까?”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장로교 수양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그곳에 가려고 날마다 신청하는 겁니다. 제일 먼저 “이번 여름 몇 월 며칠부터 우리가 쓰겠습니다.” 온 교인이 그곳에 가서 여름에 수련회 가면 수영도 하고 보트 타고 별 것을 다 합니다. 수백 명 시설이 다 되어 있습니다. 밥 해먹고 겨울철에 눈보라가 내려도 며칠씩 있고 어느 교회든지 신청하면 같은 교단 안에 있는 교회는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이 “나 너무 많이 누렸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곳은 자기 돈으로 다 한 것입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되돌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의 자세로 세상을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대강절 첫 주일 인데 우리 한 달 동안 대강절, 강림절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 지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자기를 영접치 아니하였고” 

대강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열어서 오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는 사상, 영접하는 자의 사상이 무엇인가? 바로 자기 땅, 자기 백성, 주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다 버리고 말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성탄절을 바라보며 이 기간을 오늘부터 갖게 되는데 주인을 알아보는 시간이 되십시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주여! 주여!” 하는데 “주님, 주님, 주님이시여! 주인이시여!” 그런 뜻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는데 우리는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또 12월 성탄의 달을 오늘부터 맞이합니다. 이 기간은 대강절이라서 주인이 오실 때 주인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내 육신까지도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필요를 따라 사용되어 지는 사역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셔서 성탄의 계절이 매우 즐겁고 복되고 하나님께도 큰 은혜를 받는 축복된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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