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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 기다려야 할 분 (눅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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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기다려야 할 분 (눅 2:25-33)
 
기다림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앓고 있는 심리적인 질병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급증이고 다른 하나는 화병입니다. 어쩌면 60세가 넘으신 분들은 다 조금씩은 화병을 앓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옛날보다 화병을 앓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고 입으로 토해내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병은 줄어든 것 같은데 대신 다투는 일은 더 많아졌습니다. 옛날에는 참던 것을 지금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렇듯 화병은 줄어든 데 반해 조급증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예 국민적인 정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빨리 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들은 이야기합니다. “빨리 좀 일어나라. 빨리 밥 먹고 학교 좀 가라. 빨리 숙제해라.” 이 ‘빨리 빨리’에 대한 요구는 자녀가 자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빨리 좀 결혼해라. 빨리 애 좀 낳아라. 빨리 취직해서 돈 좀 벌어라.” 가만히 보면, 빨리 죽으라는 말만 빼고 무슨 일에나 빨리 하라고 독촉합니다. 

우리나라처럼 퀵 서비스가 발달한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자장면 한 그릇도 어디든 초고속으로 배달됩니다. 외국인이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운전을 할 때도 앞차가 천천히 가면, “저 차는 왜 빨리 안가고 늦장을 부리냐”고 투덜댑니다. 남의 차가 나보다 빨리 가기라도 하면 갑자기 화가 나서 더 빨리 운전을 합니다. 이러한 ‘빨리’의 정서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 대한민국에 수없이 많은 속성학원들입니다. 

조급증의 문제는 기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금방 불안해집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으면 괜히 화가 납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작은 문제가 생겨도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이 되든지 아니면 반대로 공격적으로 대들게 됩니다. 쉽게 핏대를 올리고, 아무에게나 신경질을 부립니다.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12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19일 수요일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날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대사이고 국가 대사입니다. 이 큰 일을 앞두고, 양 정당의 진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조급한가를 한 눈에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죽기 살기로 상대방을 향해서 공격을 퍼붓습니다. 네거티브, 흑색선전을 통해 상대방을 매도하면서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싸움들을 보면, 우리나라가 여전히 정치적인 후진국임을 가슴 아프게 느끼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일이 지나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됩니다. 앞으로 5년간 그 지도자에게 우리의 국정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정권은 매우 중요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뽑을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또 친구들에게 질문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세 가지를 봐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성품입니다. ‘책임지는 지도자인가? 국민과 마음으로부터 소통하고 국민을 긍휼이 여기는 지도자인가? 섬김의 마음을 갖고 있는 지도자인가?’ 이것은 곧 지도자적인 자질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살펴보면 그것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지도자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예술 등 이 모든 것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셋째, 대한민국이 받은 축복을 이어갈 수 있는가 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지도자인지 아니면 퇴보시킬 지도자인지를 우리는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은 어떤 것들입니까? 첫 번째는 산업화와 정보화를 통한 경제발전입니다. 두 번째는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북한의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며 지구촌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 축복의 역사를 우리는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투표하고,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반드시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못된 정치인들의 모습이란. 이전투구가 따로 없군! 정말 뽑을 사람이 없어!” 또 여전히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가장 최고의 정치적인 인물을 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다들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뽑으라. 부정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최악이 아니면 차악을 택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투표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향한 섭리를 갖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투표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투표 후에 우리에게 남은 몫은, 누가 되든 한 마음으로 돕는 것입니다. 새롭게 뽑힌 지도자가 내 마음에 부족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자라게 생각되는 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들은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돕고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12월은 정치적인 기다림이 있는 동시에 또 다른 기다림이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 참된 통치자, 왕 중에 왕, 이 땅에 참 평화를 가져다주는 분, 이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 바로 이 분을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므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네덜란드의 빛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Rembrandt)의 '시므온의 노래'라는 그림을 본 적 있으십니까?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그림입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긴 수염이 난 시므온이 반쯤 감은 눈으로 지그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얼굴은 놀라움과 감동에 잠겨 있습니다.‘참으로 놀랍다. 내 오랜 기다림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주셨구나. 

이 어린 아이가 내가 그동안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여러 가지 감정들이 시므온의 표정에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시므온은 이러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누가복음 2:29) 

시므온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가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드디어 그의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제 제 영을 데려가셔도 괜찮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로마제국의 엄청난 억압과 핍박 속에서 신앙의 자유와 나라를 잃어버린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군요.” 

공자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도(道)를 듣고 실천하는 것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기다림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온 것이었습니다.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려온 빛의 역사, 시므온은 그것을 기다리며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의 이마의 깊은 주름과 흰 머리카락, 길게 내려온 수염이 그가 지나온 믿음의 세월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세월을, 인고의 세월을 지나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드디어 그렇게도 그리던 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다림의 영을 가지고 계십니까? 기다림의 영이 없으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다는 것은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원이 없다는 것은 인생을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기다림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고, 삶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다림만큼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설렘이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맡겨진 삶에 대한 만족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인생에서 실패하기 쉽습니다. 실패하는 줄도 모르고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잃어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10개월 동안 기다릴 때, 그 아기를 가슴에 품을 수 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성취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기쁨도, 감격도 없습니다. 길고 어두운 겨울밤을 지나야 찬란한 태양의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봄에 수고하고 땀 흘리며 씨를 뿌려야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을 때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준비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믿는 믿음의 영성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기다림의 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해서 25년의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무려 400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땅을 떠나왔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 또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시간인 대림절을 허락하셨습니다. 대림절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강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인간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빛의 역사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어둠의 역사를 뚫고 이 땅에 오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을 밝히는 빛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는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죄 가운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거짓과 불의가 넘치는 세상을 진리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툼과 갈등 속에서 전쟁하고 있는 세상에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시므온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서게 됩니다. 시므온의 놀람과 기쁨, 평안함과 감사, 기대와 설렘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늙는 것이 낡음이 되지 않으려면 기다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이 있으면 늙어지는 것이 낡음으로 멈춰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체가 낡아지지만 우리의 영과 마음은 날로 날로 새롭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다시 덧입혀 주신다는 마음 속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 속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랜 기다림에도 새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 속 소망을 노래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누가복음 2:30~31) 

내가 주님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 앞에 준비한 것이며, 이방을 비추시는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들었으니 소망이 다 끊어졌다고 여기십니까?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끊어졌다고 여기십니까?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배반하고 떠났다고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진 듯 느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으면 소원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기다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져서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지루하게만 여겨지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미리 우리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지루해하고, 화를 내며 살지 말라고, 실망하고 낙담하면서 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다시 소망을 품고, 다시금 기다림의 영을 갖고 일어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치유와 회복이 있고, 평안의 기쁨이 있으며, 세계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다려야 할 분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셨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탕자를 향해 달려갔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달려오시고, 나를 안아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내 기다림보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더 컸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고 다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내가 기다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주어진 삶의 자리를 축복의 현장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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