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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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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39-56)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삶에 위기를 맞이할 때 우리는 더욱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사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일 더하기 일은 둘입니다. 그러나 일 더하기 일이 둘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도 되는 것이 시너지 효과입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섬길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풍성하여집니다. 고난을 헤쳐 가는 비결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성도의 교제를 통한 격려와 위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여인은 늙도록 자식을 낳지 못한 엘리사벳이요, 또 한 사람은 이제 막 정혼한 마리아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임신 중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 다 성령 충만, 기쁨 충만합니다. 

두 사람의 나이차가 많지만 서로의 만남을 기뻐합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가집니다. 보잘것없는 자신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니 이웃을 경쟁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고 사랑을 나눌 상대로 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며 성령에 감동되어 찬양으로 화답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두 여인들처럼 삶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하여 감격의 찬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가족끼리 (부부, 부모와 자식, 고부 간), 교우들끼리 (목사와 교인, 교인들, 목장 식구들, 선교회, 사역부서), 이웃들끼리 (직장 동료, 사업 파트너, 이웃) 두 여인들처럼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고 격려하면서 어느 때보다 훈훈한 성탄절을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난 놀라운 경험, 그리고 앞으로 임할 엄청난 일들을 생각하니까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된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누가는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한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때에”라고 표현합니다. 분명한 것은 천사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유대의 산골마을로 서둘러 갔다는 점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던 아이가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은 태아가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할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마리아가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복 받은 여자요 태중에 있는 아이도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감격해합니다. 

여기서 주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과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제 막 잉태한지라 겉으로 보아서는 마리아가 임신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과 그 태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마리아의 음성을 들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이인 세례자 요한이 기뻐 뛴 것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요,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지막으로 한 말,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는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대답한 것을 엘리사벳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 역시 성령의 역사입니다.

엘리사벳의 찬송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왕 자식을 낳는 것 내가 메시야를 낳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하며 마리아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마리아를 축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4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낙심될 때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문제점만 들추어내기보다 격려하고 품어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의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향하여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나눌 사람이 있습니까? 몸과 마음이 연약할 때 기도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있습니까? 

엘리사벳과 같이 자기의 삶의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될 때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편, 자기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혈기를 자주 부리는 사람은 조심하게 됩니다. 자꾸 충고만 하려하고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위엄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기에 믿는 형제자매들끼리 서로를 인정하고 품어야 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품습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좋은 친구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자꾸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시고 이런 사람을 또한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찬송에 화답합니다. 그녀의 찬송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와의 만남을 통하여 깨달았고,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하여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 가운데 구구절절이 시편의 내용들이 인용되어 있고 특히 한나가 눈물로 기도하던 가운데 사무엘을 얻고 나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기도하던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처녀가 아니라 평소에 구약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때가 되니 묵상한 말씀을 그의 기도와 찬양에 사용합니다. 마리아를 보면 하나님은 결코 아무나 사용하지 않으시고 준비된 자를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46-48절)

마리아의 찬송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이 구주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고 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내 구주가 되신다는 말은 자신도 죄인이요, 구주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계속 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의 종이 되어 모든 일에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것이 더할 나위없는 특권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은 개인적인 비천함이라기보다는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는 그 백성의 비천함을 상징합니다. 사무엘상 1:11에서 한나의 비천함은 아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비천함이 암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비천함은 메시아요 구원자가 될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 마리아는 달동네에 사는 처녀요, 가난한 목수 요셉과 정혼한 여인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리아가 선택되었고 만민을 구원하실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한 마리아는 ‘복된 여인’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은 그 크신 사랑으로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의 원천이며 기쁨의 근거입니다. 우리도 돌아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2)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49-53절)

Holy is His name. 항상 아기 예수만을 안고 있는 마리아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마리아가 언급한 큰일은 경건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반전의 역사입니다.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에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서기도 하며 가난에 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세상 것을 포기했음을 아시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높이시며 역전의 복을 허락하셔서 풍족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며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십니다. 그들이 쌓고 신뢰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그 인생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하게 보응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3)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54-55절)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을 지킬 때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 산에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자” “비천한 자” “주리는 자”로 소개된 자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54절에 ‘긍휼들을 기억하시려고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고 합니다. 이제 메시아의 탄생으로 그 언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성탄절은 어떤 절기가 되어야 합니까? 회복의 절기입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까지 새벽기도 시간에 욥기를 같이 살펴보았습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의 관습적인 신앙이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굳건히 붙들고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38장에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에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친절한 답변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너는 누구냐”(38:2) 하며 정체성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대적하시는 자세가 아니라, 창조세계의 구조와 운행, 동물들이 지닌 생태학적인 특징 등을 말씀하시면서 욥을 가르치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앞에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고 그의 보잘것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더욱 적극적인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회개’라는 틀 속에서 하나님의 처분만을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서 본연의 청지기의 모습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새로운 사명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됩니다. 깨달음의 절정이 42장 6절에 나옵니다. 개역개정에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회개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들먹이면서 친구들이 욥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이 칭찬을 들었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도리어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회개합니다’는 정확한 번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의미를 살린다면 “그러므로 저는 저의 미련한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달리하겠습니다.” 즉 하나님과 대면한 후 욥 안에서 자기 정체성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갑니다. 욥은 감히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대답을 듣는 대화 파트너로 서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경제, 건강, 명예, 자녀 등 세상의 울타리는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발견’이 중요합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인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런 지식도 없고 아무런 의지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욥기의 결말은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 자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인생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욥은 갑절의 재산을 소유했으며, 딸들에게조차 상속하는 아버지이며 대적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로 활동합니다. 

마리아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와 만남,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또한 마리아의 기쁨의 찬양은 믿음에 뿌리를 둔 개인적 기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시선을 고정한 전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들, 즉 전능하심, 거룩하심, 자비하심, 신실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모호한 이해와 피상적인 지식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날마다 성령에 충만하여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 생각하십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이웃과의 관계 회복 -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은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상대방의 기쁨이 내 기쁨인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쯤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놀라운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들의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적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각자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하게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기쁨에 넘쳐 주님을 찬양하는 최고의 태교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경험하게 되는 복 중의 하나는 내가 받은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교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God never makes junk.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 이상 비교하며 낙심하거나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을 인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인하여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기, 질투, 의미 없는 경쟁은 우리와 상관없는 단어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격려하고 믿음을 세워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우리를 돌아보고 부족하지만 우리를 용납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됩니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목장이 바로 그런 안심하고 내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고 들어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만약 오해하고 불신하고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가십으로 전하는 모임이 된다면 더 이상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목장에서 서로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자라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진 상처가 치유됩니다. 

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원진부터 솔선수범하며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면서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회복에 이르는 첫 단계는 용서입니다. 욥에게 세 친구들로부터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권위로 욥을 짓눌렀고,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죽은 이유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정죄했으며, 소발은 악인이 멸망할 때 받을 모든 벌을 욥에게 돌리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을 위해 속제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 모든 상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용서했더니 하나님과 통하고 사람들과 통하고 물질과 통하며 새로운 사명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봅시다.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정죄하거나,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해’ 하며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 우리의 말을 과연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기뻐하실까 아니면 탄식하실까 

이 단순한 기준에 한번 비추어보시기 바랍니다. 용서할 때, 진정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참고로 계시록 20:12를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생명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우는 것은 회개와 용서밖에 없습니다.


회복의 기쁨은 표현해야 합니다.

항상 기쁨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복됩니다. 진정한 신앙의 척도는 얼마나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기쁨의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확신한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감격과 그 계획 가운데 담겨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한나가 실로의 성막에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 고백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한나의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실행하실 구원 역사를 예고합니다. 즉 사무엘의 탄생은 신실한 제사장 가문과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다윗 왕의 등장을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그것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더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집니다. 엘리사벳, 마리아, 심지어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도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기뻐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일들 중 기억나는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오늘날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바라보며 소리쳐 춤추며 반응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20에 의하면 성령이 충만한 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골로새서 3:16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서로 가르칠 뿐 더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 충만이 말씀 충만과 연결됩니다. 성도들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Connecticut, Newtown에서 벌어진 총격으로 인하여 20명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28명이 죽었습니다. 부모의 이혼, 어머니와의 갈등과 같은 가족에 대한 분노가 치유되지 못하니 그런 끔찍스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성탄절은 회복의 절기입니다. 미움 대신에 사랑을, 절망 대신에 소망을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받으려하기 보다 주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금년이 가기 전에 화해할 사람은 없습니까? 죄와 허물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일 4:10-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가족 간에, 교우 간에, 이웃 간에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영혼으로 주를 찬양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품으면서 진정한 회복을 이루며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는 담대한 고백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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