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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1) (사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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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오신 예수님(1) (사 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1-5)”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사야서 11장 1절로 5절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축복과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모든 인류는 죄와 절망 가운데 살고 있을 터인데 왠 일인지 왠 은혜인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영생의 문이 열렸습니다. 죄에서 놓여남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해서 그 전과 후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이전을 B.C. 라고 그래서 ‘Before Christ’ 예수님 이전의 시대, 그 다음 예수님 탄생 이후를 A.D.라고 해서 ‘Anno Domini’ (After Christ)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시대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올해가 주후 2012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역사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자에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망하고 낙심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말씀 가운데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가, 어떠한 예수님이신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 성령이 함께 하심 

첫째로 예수님이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 “그의 위에 야훼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과 함께 하는 일생이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예수님이 탄생하셨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그 다음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 하였고, 또 그의 모든 사역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 15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성령에 이끌려서 그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서 이와 같은 귀한 사역을 감당하신다고 주님이 말씀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할렐루야. 성령이 임하여서 예수님께서 그 사역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하셨는데,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할렐루야.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귀한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 우리도 모두가 성령 충만 받아서 우리 주님 가신 십자가 그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마지막 제자들과 만찬 하시면서도 그들에게 성령이 오실 것과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설명이 되었는데,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 가르침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우리의 겉으로는 예수님을 만방에 증거하고 우리의 사는 삶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금 성령으로 충만함 받을 것을 분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붙잡고 예루살렘성에 열흘 동안 간절히 모여 기도할 때 오순절 날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 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능력을 받아서 사도 베드로가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얼마가지 않아서 수 만명이 예수 믿는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주의 복음이 온 예루살렘을 뒤덮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전도의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도 베드로에게 능력이 임했던지 그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스쳐 지나갈까 상한 병든 자들이 그 길에서 기다렸습니다. 누워서 기다렸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성령을 교회에 보내셨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충만히 임하셔서 나를 붙잡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이 임하면 기도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성령이 임하면 말씀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고, 성령이 임하면 내가 받은 은혜를 베풀고 나눌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성령이 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김은주 선교사님이 『천국 열쇠』라고 하는 귀한 책을 내셨는데요. 제가 이 책에 추천사를 써 드렸는데 이 선교사님 아주 몸도 작고 연약한 분이예요. 남편 되신 선교사님 주로 미국에서 사역하고 계신데, 그런데 이분이 천명이 넘는 큰 교회를 필리핀에서 섬기고 계세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지역에 어떻게 그런 사명을 그 연약한 몸으로 감당 할 수 있나. 하도 이분은 금식을 많이 하셔가지고 가뜩이나 말랐는데 더 말랐어요. 만나보면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거 같아요.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 받으니까 역사가 나타나서 귀신이 쫓겨 가고, 병이 고침 받고, 하나님 은혜가 임하고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도의 자녀 하나가 뛰어 왔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 저 무당 굿하는 사람에게 붙잡혀서 굿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아볼라리오’ 라고 하는 이단 종교가 이제 그 어머니를 붙잡아가지고 굿을 해요. 그 어머니가 원래 귀신 들려갖고 벌거벗고 뛰어 다니는 것을 붙잡아서 기도해주고 고쳐놨는데 이단들이 그걸 알고 다시 또 그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외쳤더니 혼비백산 하고 다 도망갔어요. 

그런데 소문이 들려오기를 그 사람들이 선교사 가만 안두겠다고, 선교사를 잡아서 창자를 다 꺼내겠다고 막 이런 악성 소문을 퍼뜨리고 그 다음에 선교사 모양을 그 인형으로 만들어 갖고 칼로 찌르면서 저주한다는 거예요. 어 근데 몸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해요. 선교사님이 간절히 삼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 이단들이 모이는 본부로 갔습니다. 가서 당당히 외쳤습니다. “모두 나와라! 너의 잡신이 강한가, 내가 믿는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서 강하신가, 한번 붙어 보자고!”

소리를 쳤더니 놀래갖고 문틈으로 내다보고 나오지 않더래요. 그리고 나서 돌아왔는데 일주일 후에 사람들이 와서 뛰어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완전히 철수하고 다 딴데로 가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연약한 여성이지만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니까 그 무시무시한 이단들도 두려워 떨면서 결국은 본부를 철수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이와 같은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할렐루야. “오직 나의 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사회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모략과 재능의 신입니다. 모략은 우리를 상담하는 그러한 영을 말합니다. 모략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만들어주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심

둘째로, 예수님은 성령님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사야 11장 3절에, “그가 야훼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경외란 말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섬긴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어르신 앞에 설 때 늘 이렇게 좀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서잖아요. 엄격한 부모님 밑에 자란 분은 “얘야.”하면 벌써 떤다고요. 왜? 어르신 앞에 서는 우리들의 모습이 늘 그렇게 위축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 야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때 어찌 우리가 두렵고 떨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만 내 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 사랑합니다.” 하는 그 사랑의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아요.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사람들이 안볼 때 왜 도둑들이 밤에 움직입니까. 다 자고 안볼 때 움직이는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우리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찾았어요.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헌신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좋고, 말씀 듣는 것이 너무나 좋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너무나 좋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일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다가 33살을 살고 인생을 떠난 우리 안수현 선생님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에서 이분의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감동을 많이 주는지 몰라요.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고, 환자를 가족처럼 돌본 의사 선생님 이예요. 늘 환자의 손을 붙잡고 같이 그 마음의 아픔을 위로하고, 울어주기도 하고, 돈이 없는 환자는 대신해서 병원비를 물어주기도 하고, 일과 끝나고 일찍 들어가 쉬어야 하는데 늦게까지 남아서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을 일일이 살피고, 의약 분업 사태가 나서 모든 의사가 진료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는데 그때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음성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음성은 듣지 않겠다.’ 그래서 환자의 편이 되가지고 파업한 병동 의사 아무도 명도 없는데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온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본 이 의사 선생님. 밤을 새우고, 끼니를 굶어 가면서까지 일손이 딸리니까 많은 환자를 돌봤던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은 그의 삶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그의 장례식 때 무려 4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요.

그의 신앙 고백을 보세요. “나는 책상 앞에 ''코람데오''라는 문구를 붙였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경외는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는 건강한 두려움이다. 나는 그분 앞에 서서 친밀함과 경외함의 두 기둥을 축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주한 생각을 가라앉히고, 마음과 생각을 그분께 고정시킨다.” 할렐루야.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잠언 1장 7절에,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심

나아가서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의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시는데 이제는 우리에게 공의를 나타내 주세요. 이사야 11장 3절 4절에,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 그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시며 동시에 공의의 예수님. 공의라는 건 뭐냐.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 있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적당히 죄와 타협하고 살면 그것이 바로 불의예요. 불의. 그것이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가야 그것이 공의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 입구에서 헌금함에 헌금 넣는 사람 보셨습니다. 한 부자가 거들먹거리면서 돈을 막 쏟아 넣으면서 ‘내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한다.’ 하고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 보는데 “야, 저 사람 헌금 참 많이 하네.” 다들 놀랬어요. 그런데 그 뒤에 조금 있다가 옷을 초라하게 입은 한 과부가 쭈빗쭈빗 와서 동전 두 잎을 넣고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과부를 칭찬 합니다. 저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중에 있는 것을 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다. 그 정성이 귀하다. 할렐루야. 헌금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드리는 것이에요. 정성으로 드리는 거예요. 내 자신을 과시하고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구세군 자선냄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1억이 넘는 수표를 넣으셨어요. 자기를 밝히지 않은 거예요. 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그냥 불쌍한 사람 돕기 위해서 헌금을 놓고 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섬김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자신을 감추는데 있습니다. 자기가 영광을 다 받아버리면 하나님 기뻐하는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예수님 당시에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모든 걸 갖추어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제사장 바리세인들의 중심을 보시고 저들에 잘못된 것을 지적 하셨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허례허식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데 급급했어요. 이중 인격적이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미움과 교만과 온갖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 들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거룩’ 사람들 앞에서 들으라고 “나는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하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세리들은 저 뒤에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하는데 이분들은 한 번도 사람을 죄인이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 중심을 보셨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시고 뒤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를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외모를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주님은 늘 의로운 판단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우상숭배로 인해서 또 여러가지 인간의 탐욕과 교만으로 인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공의로 그들을 바로 잡아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의의 심판자로 오셔서 입술에 막대기로 저 말씀을 통하여 저들 권면하시고 저들을 바로 세우는데 그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시편 45편 6절로 7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의에 하나님께서 종국에 가서 모든 악을 멸하실 것입니다.

시편 72편 2절에,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우리 하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세요. 세상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 편에서지만은 우리 하나님은 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꼭 돌보라고 한 그 두 종류의 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과부들을 돌봐라’ 하나는, ‘고아들을 돌봐라’ 라고 한 것입니다. 평생 남편만 믿고 살다가 남편이 죽었으니 “과부들을 돌봐라” 또 부모를 믿고 사는 자녀들이 부모님 일찍 돌아가셨으니 “고아를 돌봐라” 이게 구약의 가르침이에요. 그러니까 소외된 자, 가난한 자, 헐벗고 굶주린 자, 서민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가진 사람들이,’ 할렐루야. 누가? ‘우리들이.’ 할렐루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악인의 길은 망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시편 1편 6절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아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 의로움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한국사회가 이렇게 혼탁한지 아세요? 자기목적을 위해서는 불의하고 손을 잡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짓하고 손을 잡습니다. 그래서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남을 상처를 입히고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에 이 혼탁한 사회가 되어있는 거예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어디가도 바른 이야기를 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많은 지도자들이 그러한 본을 보여서 이 땅에 다시는 그러한 갈등과 대립으로 그리고 미움과 다툼으로 그리고 온갖 흑색선전으로 뒤덮이는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없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 대한민국이 성숙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만 바라보고 진리만 이야기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거짓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 굳건히 세워주시고 이제 저 휴전선도 무너뜨려서 남북통일의 시대를 열어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이 모든 갈등과 대립을 없애게 하여 주옵소서. 지역 간의 갈등과 대립, 이거 정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 아닙니까? 우리 대한민국에 무슨 지역감정이 어디 있습니까? 또 이념 간의 좌우에 대립, 또 계층 간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또 남북 간의 대립, 이 모든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로 사랑으로 풀어야 될 것입니다.


4. 참 평화를 가져 오심 

마지막 네 번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님, 주님의 시대가 오면 이같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사야 11장 6절로 8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것이 바로 평화가 깃든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리하고 어린양하고 같이 있어요. 당장 잡아먹지 그런데 평화가 임하면 그 강한 짐승 속에 있던 이 탐욕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아니 사자가 풀을 같이 먹는다니까요. 독사의 굴에 어린애가 손을 넣어도 물지를 않아요. 왜?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제하셨기 때문에 참된 평화가 왔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전한 것이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모임에는 늘 다툼과 싸움과 갈등이 있어요.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그 사나운 짐승이나 순한 짐승이나 같이 있는 것처럼 어울려 지내게, 지혜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지내고,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같이 어울려 지내게 되고, 우리 장애인이나 정상인이나 똑같이 대우를 받고. 한국에 지금 200만 이주민이 와있어요.

외국인에서 노동,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과 결혼해서 이주해온 분 200만 이주민 시대에 이제 저들 다문화 시대에 얼굴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고 할렐루야. 참된 평화가 이 땅에 깃들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호세아 2장 18절에,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의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칼과 활을 꺾어 버린다고 그랬습니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 전 세계에 이 작은 나라가 절반이 잘려져서 우리 같은 동족들끼리 딱 총을 겨누고 있으니 이거 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 모든 총을 꺾어주시고 휴전선이 무너져서 그리스도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북한을 품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사랑과 용서가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화인데요, 이 ‘콰이강의 다리’라고 하는 영화가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태국에 이 콰이강에 그 일본군이 영국 포로들을 붙잡아갖고 다리를 놓게 하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군이 중요한 장비를 하나 잃어버렸어요. 그간 포로가 어디다 숨겨 놓은줄 알고 다 연병장에 세워놓고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해라 만약에 자수하지 않으면 너희들 모두가 다 총살이다 하나, 둘, 셋.” 하니까 한 사람이 탁 나와서 제가 “그 장비를 훔쳐서 저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사람을 총살해 죽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른데 창고에 보니까 더 다른데 잘 숨겨놨어요. 거기 있었어, 그 장비가, 그런데 그때 자기가 “내가 그걸 가져갔습니다.” 안하면 다른 친구들이 동료들이 다 죽으니까 대신 죽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평화로 참 용서와 사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님의 그 희생으로 우리가 사랑과 용서를 받았음으로 이제 우리가 마음에 결심을 해서 “이제 부터는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화평의 사신이 되겠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 나라가 우리 이웃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밝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더 이상 다투지 말게 하시고 더 이상 싸우지 말게 하시고 사랑과 평화와 용서가 우리 삶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즘 가정에 문제가 많아요. 부부끼리 열심히 싸우는 분들이 있어요. 여긴 없지만 저쪽가면 좀 있어요. 하여간 뭐 하루가 멀다하고 소리치며 싸웁니다. 부모와 자식 간이 원수처럼 지내요. “원수, 원수” 그래요. 자기가 낳은 자식을 원수라 그래요. 또 아이들은 부모님 앞에 분노합니다. 왜 그런 마음속에 분노를 담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가정이 파괴되고 또 사회가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 마음에 예수의 사랑이 임하여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손에 손 마주잡고 참된 평화의 나라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에 주님이 임하여 주셔서 참된 의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삶에 모셔서 이 평화를 만방에 증거하며 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참된 평화와 참된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영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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