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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주가 나신 표적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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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신 표적 (눅 2:8-14)


함박눈이 몹시 내리던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남편을 따라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내는 계속 의심을 토해 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어요?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 문 앞에 이르자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하고 집문 앞에서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푸드득 하며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며 말합니다.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고” 그러나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뇌리에 무엇인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이 하나님 품을 떠났던 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성탄절은 인류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성탄의 그날에 우주적 영접이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천군 천사들의 노래가 있었고 아기 예수 나신 곳을 알리는 큰 별이 나타났습니다. 들에는 목자들의 경배가 있었고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주적 경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찬양과 영광의 초점이 오직 아기 예수께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별과 천사들은 아기의 계신 곳을 가리켜 주었고,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은 그 아기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낮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처럼 군림하는 모습으로, 권세 있는 자로 오실 수 있었음에도 가난한 아기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유의 아기로 오시는 표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랑의 표적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는 그의 눈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안구이식 말고는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남자는 병실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다가와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눈이 미이라 같다. 아저씨, 말 못해?” 그러나 모르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을 감싸 쥐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합니다. “아저씨, 엄마가 그러는데 자꾸 울면 병이 안 낫는대” 그 날 이후 남자는 소녀와 함께 산책을 하고, 이야기도 주고받았습니다. “아저씨, 나 아저씨랑 결혼할래?” “그래, 좋아” 시간이 흘러 남자가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소녀가 퇴원하는 날 예쁜 꽃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몇 주후 병원에서 남자에게 안구기증자가 나타났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뛸 뜻이 기뻤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잃었던 빛을 찾았습니다. 병원은 기증자가 보낸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남자는 편지를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편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아저씨, 나 아무래도 아저씨랑 결혼 못 할 것 같애. 그래서 아저씨 눈 할래.” 일곱 살 소녀가 하늘나라에 가면서 그에게 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밝은 눈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면서까지 생명 대신 준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나심입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는 죄악이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시켜 보여 주신 것이 아기 예수의 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역사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사랑을 아기 예수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이 아기 예수의 나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기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들으며, 느끼며,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소망의 표적

일본에 가가와 토요히코 (賀川豊彦)는 시장(市長)의 소실 태생입니다. 본처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는데 형제들이 하나같이 구박했습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 가지고” 라며 서자인 그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했지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성탄절이 가까운 겨울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토요히코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감옥에 있는 죄수라도 사랑하십니다.” 토요히코는 소망을 가지고 당장 그 대열에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전도대원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본문 10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아기를 안고 기뻐하는 것은 아기의 현재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구세주가 아기로 오셨다는 사실은 희망이 없는 백성에게 희망을 가지도록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지닌 자는 인내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소망을 지닌 사람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당장 무엇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노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기도는 부실기업과 같습니다. 아기 예수에게서 소망을 보아야 합니다. 금번 성탄절이 희망의 인내를 심는 마음이 솟아난다면 복된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소망의 표적입니다. 
 
셋째로 평화의 표적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 목사는 미국 유명 병원의 의사인 나이지리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성은 나이지리아어로 매우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맥도날드 목사는 “이름의 뜻이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라고 말하며 그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사랑했는데 조부모가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너무 사랑했기에 부모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 가족 사회에서 추방됐습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게 되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녀인 자신을 안으면서 부모를 용서했습니다.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분노와 적대감이 사라지자, 부모는 그녀에게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 란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는 여의사의 이름이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아기로 오셨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가 햇살에 눈 녹듯이 없어졌습니다. 분노를 사라지게 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더욱 마음에 모시고,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 아기 안에 평화가 있습니다. 아기를 보는 평화의 눈으로 이웃을, 사회를 그리고 가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의 현존을 체험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여 오시옵소서’ 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전달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복된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오강남(吳剛男) 교수가 ‘예수는 없다’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초판이 발행된지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무신론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 현대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비판의 책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교회와 우리의 삶속에 예수는 없다.”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성육의 본질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는 이유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표적이 되십니다. 아기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짐을 지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탄의 본질이기에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성탄의 표적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소망입니다. 평화입니다. 모름지기 구주가 나신 표적을 소유하여 성탄을 모시는 복된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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