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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마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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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마 1:18-23)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나단이라는 한 남자가 플로리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침울하고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습니다.  어떤 친절한 사람이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굳게 닫혔던 입을 열고 자기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죄를 지어 뉴욕 형무소에서 4년간 징역을 살고 형량만기로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옥으로 가면서 그 아내에게 자기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권했습니다.  1년간은 면회도 오고 편지도 왔지만 3년 전부터 아내로부터는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감일이 가까워오자 갈 데라고는 없어서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참 나무가 있었는데 마침 이 버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를 원한다면 그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노란 손수건이 참 나무에 걸려 있으면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지만, 만일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그 아내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 알고 버스가 가는 종착점까지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 마을이 가까워 오자 달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초조하게 숨을 죽이고 큰 참 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차 안에서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 큰 참 나무가 온통 노랗게 꽃피어 있는 것입니다.  손수건 하나만 매달아 놓으면 혹시 남편이 못보고 지나갈까 봐 아내는 나뭇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을 주렁주렁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 밑에는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노랗게 물든 나무를 바라다보면서 즐겁게 뛰놀았지만 그의 아내는 집안에서 남편 맞을 준비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은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성탄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과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크리스마스는 Christ와 Mas가 합해서 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심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만을 경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통계 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은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성탄절에 떠오르는 사람이 산타클로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트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집과 나무에 의미 없이 수많은 전등을 장식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 오셨던 그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고달픔에 지쳐 있었습니다.  무겁고 침울한 절망감이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도무지 희망은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고통만이 계속해서 밀려왔습니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보시고 참으로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위로해 보십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위로가 백성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점점 더 불안과 절망 속에 빠져듭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던 하나님께서 아주 비장한 결심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들 곁에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도대체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장 23절 말씀에 보면,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8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이 한 말씀에 위로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위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옆에 있는 분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축복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전능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하게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과 함께 계십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본문 19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서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행동이 어떠했길래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까?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요셉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내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  누구의 아이일까?  궁금합니다.  부정한 여자라면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요셉이 고민하면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아들을 낳을 것이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본문 19절에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남의 죄를 들추어서 공개적으로 더 크게 떠들고 다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에게 찾아가서 악담을 하고 화풀이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내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만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되도록 덮어주고 감싸주면서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치유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닫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서 부정한 일이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다니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허물을 가려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 짐을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비록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당해도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일을 이루십니다.  용서하고, 감싸려고 하는 의로운 그 사람을 통해서 큰 일을 맡기십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주 앞에서 의로운 요셉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로운 요셉의 행동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한 요셉.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나이만큼이나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다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요셉과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특별히 24절 이하에 보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수치와 고난도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요즘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말없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를 외면하고서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난의 길을 거부하고서 천국의 유리 수정바다를 거닐 수는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살면서 의로운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겠다고 한다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인간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약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죽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로 갑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께는 영광이었고, 자신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여러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92편 12절에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게 되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성장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장 16절에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십니다.  의로운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은혜를 입은 사람과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이런 말을 전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죄가 나와 하나님 사이를 막았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그냥 보통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된 나와 함께 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생과 함께 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입니다.  죄악으로 관계가 단절된 이 땅을 다시금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한 인사말은 그냥 하는 평범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크게 은총을 받은 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들에게 한 번만 눈길을 주셔도 은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시기만 해도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서 여러분의 심령이 평안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십니다.

민수기 6장 2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신다는 사실은 은혜요 평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시면 그것은 저주요, 화입니다.  오늘 저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저와 여러분에게 비춰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와 사업과 직장과 이 땅 위에 가득 비춰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철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보면, 궁내에서 여자들이 아무리 출신 성분이 나빠도 임금이 눈길을 주게 되면 성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십니다.  이것보다 더한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길을 한 번 주시는 것도 복이요, 은총이라고 한다면 하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회복을 노래하면서 외친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기뻐하면서 이렇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은혜와 평강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입니다.  인간은 전혀 하나님을 기대하거나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어느 날 천사를 통해서 은혜를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마리아와 요셉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도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소위 피안에 이르는 8개의 길이라든지, 힌두교의 인과응보 교리라든지, 혹은 유태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이라든지, 이슬람교가 이야기하는 계율에는 이런 은혜가 없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좋은 세상을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고 도를 갈고 닦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라고 설파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길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고 절제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얻습니까?  보십시오.  불교 역사상 보기 드문 초인간적인 극기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 정각을 얻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죽으면서 남긴 열반송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한 인간이 구원을 얻고자, 도를 깨닫고자 한 평생 뼈를 깎는 극기 수행을 한다고 한들, 그의 마지막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고행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노력하면 할수록, 고행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자신의 비참한 모습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주 앞에 나와서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풍성하신 하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자격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그의 지나온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그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철 스님은 한때 8년 동안이나 드러눕지 않았습니다.  10년간을 사람의 근접을 피해서 암자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아비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루도 드러눕지 않으면 못 삽니다.  한 시간도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외롭고 쓸쓸해서 안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제가 이 땅의 생명을 마감하는 순간에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된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나긴 믿음의 여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납시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헬무트 틸리케'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발견하시고 나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절망에 다다른 듯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기회는 정말 시작된다는데 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절망에 빠져 고통을 당하면서 허덕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온 천지가 캄캄해 보이는 그 순간에 빛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참된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누추한 마굿간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들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하니까 곁에서 우리들의 어려움을 좀 거들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슬픔이 너무 크니까 우리들 곁에 오셔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병든 자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돌보아 주시려고 병든 자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생의 삶에 실패한 사람, 그래서 절망 가운데 있는 그들 곁에 함께 계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자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내일의 일을 염려하면서 불안과 초조함 속에 어쩔 줄 몰라하며 떨고 있는 이들의 손을 붙잡으시고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내가 옆에 있지 않느냐?"  우리의 손을 꼭 붙잡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다른 그 누구가 아닌 하나님이 옆에 계셔주시면 슬픔을 당한 사람이 위로를 받을까 싶어서,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는 사람이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병든 사람들 곁에 있어 아픔을 함께 나누면 그가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슬픔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곁에 계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곁에 계시기 위해서 이 아픔과 좌절과 불안으로 뒤범벅된 오늘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을 꼭 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아기 예수님이 나실 믿음의 자리를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이 가난한 내 맘에, 지치고 처절한 내 삶 속에 어서 오시옵소서.  임마누엘로 탄생하시옵소서."

임마누엘이신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치고 곤한 내 영혼을 그분께 의탁하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신 빛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십시오.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면 셋방에서 살아도 천국입니다.  그러나 진시황제가 살았던 아방궁과 같은 집에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분과 더불어 사십시오.  마음의 천국을 이루십시오.  그래야 영원한 천국이 보장됩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한국 CCC를 창설했던 고(故) 김준곤 목사님께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생애 일어났던 최대의 사건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요, 사랑이요, 소망이요, 나의 평안이요, 지혜요, 힘이요, 모든 것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유일한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랑하는 내 이웃에게, 내 동족에게 목숨을 바쳐 드리고 싶은 것도 예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열정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 영신 제단에 나왔든, 결국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이번 성탄절에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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