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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님의 탄생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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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 (눅 2:1-7)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눅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눅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B. C. 곧 주전과 A. D. 곧 주후로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갔을 때,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유대의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이미 구약성경 미5:2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장차 유대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근본은 상고이며, 그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면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어떻게 유대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님을 낳았습니까?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한 가지 특별한 사건을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인구 조사였습니다. 

성경이 응하여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역사를 주관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탄 때의 세계적 상황을 살펴봅니다.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오늘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때를 가리킵니다. 눅1:5을 보면, 그 때는 “유대 왕 헤롯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돔 사람, 곧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고,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바로 이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가서 그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여섯째 되는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가서,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임을 알렸습니다.    

천사의 말 대로,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들을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 후 때가 차서,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권적으로 예비하셨습니다.   

먼저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렸습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를 제패한 후에, 영을 내렸습니다.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인구 조사를 한 것입니다. 인구 조사의 주목적은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나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보아 수리아의 관할에 속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통치하던 지역의 인구 조사를 성공적으로 잘 진행시켰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구레뇨는 수리아의 총독으로 재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인구 조사는 구레뇨가 처음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행한 인구 조사였습니다. 그는 재임되고 난 후, 황제의 신임을 받으려고 또다시 인구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누가 세상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가이사 아구스도나 수리아의 총독 구례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쓰임을 받은 도구들이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들어 유다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가이사 아구스도와 수리아 총독 구레뇨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또한 한 개인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이 다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호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토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를 늘 돌보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항상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장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성탄 때의 국가적 상황을 살펴봅니니다. 

눅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눅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의해,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자신이 관할하는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끝마쳐야 할 기한을 못 박았습니다. 이에 따라 유대 왕 헤롯도 그 기한 내에 모든 유대인들이 호적을 하도록 엄하게 지시했습니다. 

본시 유대인들은 자신의 계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언제라도 그 곳의 서기관이 기록한 상세한 계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왕 헤롯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하게 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계보를 보면,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신의 본적지인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해야만 했습니다. 

삼상16:1 말씀과 같이,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베들레헴에서 양을 쳤습니다. 삼상20:6 말씀처럼,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유대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요셉은 호적하기 위해서 자신이 살던 갈릴리 나사렛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인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30km 정도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먼 거리의 여행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들레헴은 해발 600m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호적하러 올라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혼자서 호적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마1:24 말씀을 보면, 이미 요셉은 자기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이는 약혼에서 결혼으로 옮겨간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아직도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 기간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절인 마1:25 말씀에서 밝혀집니다. 

그들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법적으로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약혼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때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몸으로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이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니다. 만일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만일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기한을 정해주지 않았더라면, 만일 유대 왕 헤롯이 각자의 고향에서 호적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도 분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린 것도,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가 기한을 정한 것도, 유대 왕 헤롯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것도, 요셉이 만삭의 몸인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올라간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눅12:6∼7 말씀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낙심하지도 맙시다. 모든 일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세한 것까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함으로 모든 일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탄 때의 개인적인 상황을 살펴봅니다. 

눅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가 만삭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행길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가급적 천천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나사렛을 출발한 지 닷새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 동안 베들레헴에서 머물렀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호적할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들의 순번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호적은 끝이 났지만,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기 때문에 그대로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그들이 갈릴리 나사렛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유대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성경에 기록된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섭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붙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있을 때, 해산할 날이 찼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는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10개월을 자라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난지 팔 일이 되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혜도 자라시며, 그 키도 자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히2:17∼18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능히 도우시며, 우리를 모든 고통 가운데서 능히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혼자서 괴로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에게 아뢰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능히 이겨내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봅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마리아는 “외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동정녀의 상태를 그대로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마13:55∼56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로 증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자녀를 낳지 않고 끝까지 동정을 지켰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내용일 뿐입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쌌습니다. 강보는 갓난아기를 둘러싸는 천을 뜻합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세상으로 나오면 추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의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보로 둘러쌉니다. 

게다가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면, 자연히 온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몸에 상처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의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 강보로 둘러싸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강보로 쌌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아예 왕복을 입고 탄생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머리에 후광이 둘러 비치는 모습으로 탄생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알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키도 얼마 안되고, 몸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태어나시자 말자, 다른 아이들처럼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강보로 싸서 어디에 뉘었습니까? 침대에 뉘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한 방에 뉘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습니다. 구유는 가축의 꼴을 담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습니까?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외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숙박 시설이 동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숙박 시설 앞에는 으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숙박 시설 앞에는 으레 마구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귀나 노새와 같은 짐승들이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관에 있을 방을 구하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서 짐을 풀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해산했습니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강보에 아기 예수님을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서 탄생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아구스도를 이용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의 황제를 동원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아들의 탄생을 위해서는 마구간과 구유만을 준비하셨을까요?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구유에 누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구간이 어떠한 곳입니까? 더럽고 지저분한 곳입니다. 추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마구간은 우리의 죄를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마구간보다도 우리의 죄를 더 더럽게, 더 역겹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럽고 추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의 모든 허물이 깨끗하여 진 것입니다. 

또한 구유는 어떠한 곳입니까? 짐승들에게 줄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뉘이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을 잘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기쁨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합시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가난한 심령이 되어, 우리 속에 천국을 풍성히 소유합시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로 청결하게 하여,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밝히 바라봅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우리를 짓누르는 죄의 짐과 세상적인 근심과 불안에서 온전히 벗어납시다. 그리고 성탄의 기쁨과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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