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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주가 나셨으니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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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셨으니 (눅 2:1-14) 

1999년 10월 12일에는 지구촌의 인구가 60억 명이었는데, 2011년 10월 31일에는 70억 명을 돌파했다고 UN이 공식 발표했습니다. 매년 8300만 명씩 인구가 늘어나는 셈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아기들이 태어나고 있는데, 인류 역사상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보다 더 위대한 탄생 스토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독특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니 온 땅이 함께 기뻐하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념하며 성전에 모여 특별감사예배를 드렸다는 말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의 탄생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본문은 성탄절에 가장 많이 사랑받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스토리는 그저 재미있거나 낭만적인 연극의 소재가 아니라 그 당시의 유대 땅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에 (1-2절) 

교회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의 신앙의 표현이지 실제 인물은 아니라든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인데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등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이 시기적으로는 1세기 아구스도 황제 때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일 때요 지리적으로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나셨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들은 Pax Romana(로마의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진정한 화해와 사랑에 입각한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를 무차별 정복하면서 무력으로 얻는 평화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평화로 여겨졌는지 모르나 정복당한 나라와 민족들은 심한 고통과 굴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옥타비아누스로 알려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주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가 실권을 잡은 지 얼마 후에 통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인구조사를 주전 28년과 8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하였습니다. 세금징수와 징집을 위함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서기 525년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연도를 계산하여 만들었는데, 계산 착오로 실제와 4-5년 정도의 오차가 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헤롯이 주전 4년 유월절 직전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주전 4년 1,2월이나 주전 5년 12월로 잡고 있습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당시 국세 조사라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교통 통신의 미비, 행정 체제의 미비 등으로 인해 국세 조사가 수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다윗이 인구조사 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7만 명이 죽은 사건(대상 21:14)을 잘 알고 있기에 인구조사에 대한 강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단번에 시행한 것이 아니라 지파별로 가문별로 점차로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두 번째 인구조사를 주전 8년에 시작했지만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이 주전 4,5년경에 호적을 실시하고 그 기간 중에 예수님은 탄생하신 것은 역사적인 기록과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장소에 (3-5절) 

4절에 보면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 지파 중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요셉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 같으나 그 뒤에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미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예언하였는데,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가 700년 전에 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조차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마리아가 해산할 즈음에 그동안 살아오던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게 함으로 그 예언을 정확히 이루십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느라 서민들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겪던 시절에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풍요를 상징하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나신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오심은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모든 시대와 공간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역사하고 다스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도 주관하시기에 자기 생각대로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전환점에 서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우리 모두는 택한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자기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며 (6-7절) 

우리는 드라마나 칸타타를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를 아름답게 표현하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못합니다. 오히려 안타깝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요즘처럼 교통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예루살렘 성읍에서 남쪽으로 약 8km 쯤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가자면 보통 사람도 삼일은 걸리는데 마리아와 함께 갔으니 아마 며칠은 더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어렵게 베들레헴에 왔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7하).

여기에 ‘여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뤼마’는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객실’은 우리나라의 사랑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적을 하기 위하여 다윗 집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한꺼번에 몰려들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머물 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고 추워집니다. 빈방을 찾으려고 다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합니다. 상식적으로도 해산을 앞둔 임산부가 있으면 불쌍히 여기면서 빈방을 찾아주거나 자기가 있는 곳을 양보해서라도 편의를 베풀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힘겨워하는 것을 바라보는 요셉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어쩔 수 없이 가축들이 머무는 축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해산하게 됩니다. 산파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니요 쾌적한 분위기도 아닌 곳에서 마리아는 예수를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구유란 소나 말 또는 나귀가 죽을 먹는 그릇, 곧 여물통을 가리킵니다. 구유는 차갑고 더럽고 냄새 나는 그릇입니다. 냄새나는 여물통에 아이를 누이는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요? 해산 과정이 너무 서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하는 회의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서 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태어나면 안 되는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예수님의 출산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마리아나 요셉의 친척이나 친구들 중에도 아이의 출산을 축하하며 방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저 높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무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한테서, 그것도 같은 다윗 집 가문 사람들에게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소외와 무관심, 이것이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실상입니다. 


목자들에게 먼저 (8-12절) 

베들레헴에 있는 어느 집 축사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이 장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구주이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탄생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기 예수가 나셨을 때 찾아가 경배한 사람들은 몇 안 됩니다. 그중에도 제일 먼저 찾아가서 경배한 자들은 율법에 능통하다는 서기관들도 아니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장들도 아니고,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변두리 인생들로 취급받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베들레헴 마을 밖 적막한 들녘에서 자기의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하필이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제일 먼저 알려졌을까요? 춥고 어두운 밤에도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목자들이 어쩌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천사들이 그들에게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한밤중에 빛난 주의 영광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구주요, 그리스도요, 주라는 천사의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11절에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너희’는 천사의 말을 듣는 목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을 가리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온 세상에 큰 기쁨과 평화를 준 황제로서 신격화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구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온 세상에 큰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주님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유에 뉘인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분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나 부자,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이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나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주요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분이 낮고 천한 구유에 뉘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여기서 강보는 포대기를 말합니다. 보통 부잣집 아기들은 고운 세마포 같은 것으로 싸지 포대기로 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쌀 것이 없어 포대기를 사용하였고 또 구유에 뉘었습니다. 목자들은 허름한 곳에 계신 예수님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야말로 자신들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13-14절) 

천사가 목자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 전하는데 갑자기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놀라운 구원 사역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여기서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이며, ‘땅’과 대응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평화를 줄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란 인간이 누리는 번영과 복지, 건강과 평안을 다 포함한 넓은 의미의 평강입니다. 히브리 말로 shalom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19:38)라고 찬송했습니다. 천사들은 ‘땅’의 평화를 찬양하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 사람들은 ‘하늘’의 평화를 외칩니다. 종합해보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고 진정한 평화가 온 우주에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런데 이 평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기뻐하심이란 단어의 원어는 ‘유도키아’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은혜 곧 평화의 은혜를 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희망으로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 베풀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실 때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탄생과 재림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위로: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며 그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고 그들의 타락 후에도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탄생은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셨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적막한 베들레헴 밖들에서 허다한 천군 천사들의 장엄한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탄생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을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의 평화는 무력으로 얻어지는 것이기에 정복당한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늘의 군대와 함께 찬양하고 기쁨으로 맞이하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권세자를 낮추시고 주가 기뻐하시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역전의 역사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목자들은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였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한 하늘의 메신저라면 목자들은 땅의 메신저였습니다. 천사가 천군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목자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양 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들은 그 밤에 양을 돌보면서도 피곤해 하지 않고 신세타령도 하지 않고 기쁨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삶에 소망과 치료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합니다. 인상을 쓰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모습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참 평화를 누리게 하신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 안으로: 주님을 닮아 낮아져야 합니다

지난 주 한국의 대선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세 기간 동안 국민들은 지역, 이념, 계층 세대 간의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모의투표를 해본다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갈등으로 인한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며 국민 통합의 길로 갈 수 있을지 새 정부가 풀어야할 큰 숙제입니다. 선거에 이긴 자들은 오만에 빠져 자기들끼리 승리를 자축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진 쪽의 상처를 감싸고 싸매면서 함께 전진해나가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선거에 진 자들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선거에 이겼거니 졌거나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권과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시되 구유에 누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누이신 곳이 구유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도 목자들처럼 이 땅에서는 천대 받던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며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처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교만해져서 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을 참으로 이해하실 수 있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가 없고 치료받지 못할 중병이 없고 해결 받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고후 8:9, “부요하신 자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겸손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서 태어나실 정도로 낮아지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합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께 내어드릴 빈 방이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셔서 부요케 하시려고 구유에 뉘이신 주님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3) 밖으로: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천사가 목자들 곁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이 너무 놀라 무서워할 때 천사가 지금 베들레헴에 백성들을 위하여 구세주요 메시야요 주님 되시는 분이 나셨는데 그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진 아기 예수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들은 대로 구주를 보기 위해 서둘러 베들레헴까지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서 보고 이 아기에 대해 천사가 말한 대로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구세주요, 메시아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며 이루어진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복음을 들었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나실 때는 천사들이 그 소식을 알려주었으나 이제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길에 나가서 선교지에서 주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인간관계가 어색해지거나 서먹서먹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이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을 가정이나 교회나 삶의 현장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기간으로 삼읍시다. 그럴 때 주님이 바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동들과 같이 우리 모두가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이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들을, 행하신 일들을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짐승의 냄새가 나는 아주 더러운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낮아지심은 우리를 높아지게 하심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찾아오셔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삶에 소망과 치료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의 영화는 영원히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구유에서 나심으로 시작한 예수님의 역사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고 이 아침에 저희들도 주님의 나심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가장 크고 좋은 소식이요 기쁨이 됩니다. 

주의 나심을 기념하는 이 계절에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안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하며, 밖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 안으로, 바깥으로 모든 관계를 회복하면서 새해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누리는 그 위로와 평화를 누리시며 하나님께 구원의 찬송을 부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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