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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가장 낯선 여행 (눅 1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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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낯선 여행 (눅 18:9-17)

작금에 이르러 동북아시아 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권력을 장악했고, 일본은 아베가, 우리나라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앞으로 동북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고,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기도 합니다. 나라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시진핑은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은 광동성 성장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진핑은 고생을 모르고 귀공자처럼 자랐습니다. 

이런 그가 권력을 잡은 후에 <가장 낯선 여행>을 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낯설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는 대단한 위세를 떨치면서 다녔지만, 이번에는 아주 소박한 서민적인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여행을 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 고급 승용차 대신에 투명 유리의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경찰의 에스코트도 없이 이동했습니다. 교통통제도 없었고, 환영인파도 동원되지 않았으며, 그가 내리는 곳에 빨간 카펫도 깔리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악수하고 담소했으며, 비가 새는 한 가정집에 들어가서는 집을 수리해 주도록 즉석에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서민적인 모습은 과거의 권력자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중국인들이 열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연출인지, 진심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어쨌든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참 이중적인 것은 열광은 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VIP 대접을 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며, 높은 사람과 막역한 관계임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또 자신을 세상의 부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순백의 영혼을 가진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의인처럼 보이려는 이런 경향은 특히 유대인들에게 강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정서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매우 흡사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위 <딸깍발이>가 있었습니다. 

딸깍발이란 날씨가 개었지만, 가난하여 신발이 없어서 나막신을 신어야 하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가난하면서도 체면을 중시했습니다. 냉수 마시고도 이를 쑤시고,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했습니다. 양반이라는 것을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만나기만 하면 가문과 족보부터 따졌습니다. 체면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혈통을 자랑했고, 율법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는지 자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면서 일반 백성을 <율법도 모르는 무지랭이>로 경멸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울 사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가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이 주님을 영접하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태도를 모두 버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이런 자기 자랑과 교만에 매달려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해서 생기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알량한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실 그 자존심도 결국에는 인생을 망치는 독이 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유대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도하는 태도와 내용이 너무 다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18-19절을 읽어봅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남과 다른 점을 나열했습니다. 자신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사람들과 다르며, 특히 눈앞에 있는 세리와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나열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기도에는 몇 가지 치명적 잘못이 있습니다. 

첫째,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의로움 그 자체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알량한 의를 과시하는 것은 태양 앞에서 촛불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세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 함으로써 상대적 의를 자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적 의가 아니라, 절대적 의를 원하십니다. 그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셋째로,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절대적 의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는 상대적 의만 있을 뿐, 절대적 의는 없으므로, 절대적 의를 가진 하나님께 얻는 방법 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상대적 의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얻을 수 없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교만과 자기 의 가운데 도취되어 살다가 멸망해갈 자신을 위해 드리는 장례식 기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으셔야 할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므로 허공을 맴도는 독백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 세리는 어떠했습니까? 먼저 우리는 유대 사회에서 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사람들을 위촉하여 세금 징수 업무를 맡겼습니다. 이들은 정해진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남은 것은 자신의 몫으로 삼았습니다. 수완이 좋고 인정이 없는 세리들은 백성을 억압하여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백성의 피를 빨고, 나라를 망치는 매국노로 지탄받았습니다. 거지도 창기가 주는 돈은 받아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않을 정도로 세리는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이러한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14절 앞 부분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때 그의 의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 의는 세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것인데, 그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그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기도가 어떠했기에 이런 사랑의 응답을 받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의 기도는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알고 드리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아멘! 

그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보인 이러한 태도와 바리새인이 보인 태도를 비교하면서 그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끝부분을 보실까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낮추는 자가 받는 복을 깨닫게 됩니다.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낮추어 기도하는 자는 의롭다함을 받게 됩니다. 

여기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세리는 과연 자신을 낮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리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낮춘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처음부터 가장 낮은 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는 10미터 높이에서 있다가 바닥으로 내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그를 가장 낮은 자로 취급했고, 세리 자신도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면서 가장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낮추었다기보다는 정확한 자기 자리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이 죄인으로서 가장 낮은 바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높였습니다. 그게 그의 치명적인 죄였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저지른 다른 죄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할 자신을 망각하고 높이려 하는 것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낮추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동안 가장 낮은 바닥에 있어야 할 죄인임을 망각하고, 어울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라, 내려와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 내려와야 산다.>고 하십니다. 

늘 올라가는 데만 익숙한 사람들은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당황합니다. 올라가는 여행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내려가는 여행은 낯설어 합니다. <내가 어떻게 저 바닥에 내려 갈 수 있나?>라고 말하면서 못 내려갑니다. 내려가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기 자리도 아닌 허공의 높은 곳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려가야 삽니다. 낮추는 자가 높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낯선 여행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래로 내려가는 낯선 여행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은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10미터 높이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은 하늘 끝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높은 곳으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죄인이므로 마땅히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떠나셔서 베들레헴의 냄새나는 마구간에 나시는, 가장 낯선 여행을 하신 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여행이었습니다. 제대로 하려면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붉은 카펫을 드리우고,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곳에 임하셔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고 무릎 꿇게 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행에는 그 모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세상 방문 소식은 동방박사와 목자, 시므온과 안나 같은 지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낯선 내려가는 여행을 하신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는 이상한 여행을 하신 이후부터 세상에는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힘 있는 자가 위에 앉는 게 당연했습니다. 높은 자는 대접을 받는 게 당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맛에 힘을 가지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헤롯 가문의 왕들,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 서기관들, 회당장들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모습에 너무도 익숙했고,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로 <높은 자가 낮아져 낮은 자를 섬기는 섬김의 리더십>이 생겼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찾아가고, 부자가 가난한 이를 염려하고, 권력자가 일반 백성을 위해 우는 리더십이 생겼습니다. 이런 모습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배우고 닮아가고 있습니다.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이들이 가난한 백성들이 있는 아프리카 정글로 들어갑니다. 스스로 낮추어 겸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새로운 질서를 우리 삶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 예수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자신의 자리는 가장 낮은 사형수의 자리였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렇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 그러던 중 따스한 손길이 우리를 보듬어 안으면서 <난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네 죄를 씻었다. 울지 마라. 넌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 자 일어서라. 다시 시작하라. 내가 너를 귀하게 세워 주리라>는 음성을 듣는 것, 복을 받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본래 자신이 가장 낮은 자였음을 잊지 않고 늘 겸손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리더가 되기 위해 기도하면서 헌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낮아지는 낯선 여행>을 하길 원합니다. 마땅히 했어야 하지만, 지금까지 해 보지 않았던 낯선 여행을 하길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 

노총각이 친구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찌 아직 결혼을 안 했는가?>  <얘기를 들어보게. 나는 이상적인 여자만 찾고 있었지. 내 눈이 높지 않던가?>  <그래, 그래서 아직 자네 마음에 맞는 여자를 못 만났군!> <아닐세. 내 이상에 맞는 여인을 만났네.>  <그래? 그런데 왜 결혼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여자도 이상적인 남자를 찾고 있더군.> 낮추면 장가도 들 수 있고, 시집도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낮추면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겸손>>이란 책으로 유명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다. 그것은 탐욕이 없는 상태이며,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해로운 일에 과민 반응하기 않는 것이며 칭찬을 받거나 멸시를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써 침묵의 바다와도 같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은총을 얻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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