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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증인의 대열에 서기 원합니다! (히 1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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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증인의 대열에 서기 원합니다! (히 11:7-32)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천차만별입니다.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믿는구나!” 하고 인정하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눅 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걱정을 하신 것인가요?

히브리서는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본문 :27에 보면 ‘모세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27절 ...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의 기준이고, 우리가 이 믿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자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나? 싶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증인들이 한 둘이 아니고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렇게 열거하다가 숨이 찰 정도입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찾아보기 정말 힘든데, 실제로는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가서는 보면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일까요? 단순히 “믿음으로 산 증인들이 많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몇 명인지 세어 보라는 말일까요? 
“너도 믿음으로 사는 그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이 시간 상상의 눈을 떠서 주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교인들이 앉아 있습니다. 예배 후 함께 예배당을 빠져 나갈 것입니다. 그 때, 앞에 노아가 가고 아브라함이 가고 모세가 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옆에는 이삭이 가고 야곱이 가고 요셉에 가고 뒤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이 함께 걸어가는 상상을 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 살아갈 때, 이 느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옆에 안 보입니까? 그러면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대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으니 시온성 향해 가는 것입니다.
예배 후에 나가서 길일 사방으로 뚫려 있는 데도 집으로 가는 길로 자연스럽게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에 집으로 가는 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천국으로 가는 대로가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천국가는 자의 삶을 살아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증인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한 첫 사람인 노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주목할 말씀을 하였습니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살던 때는 창세기 6장 5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실 정도로,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 악한 시대에 살던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곧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니, 산 위에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120년 동안 그 방주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를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자, 미치광이, 광신자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는 진리를 농담거리로 삼는 분들을 봅니다. 너무 진지해지니까 약간 긴장을 풀어 보려는 의도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다가 결국 망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노아는 영성일기를 쓴 정도가 아니라 산 위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내 안에 계시다” 그 질문을 품고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12개월도 아니고, 12년도 아니고, 무려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신 말씀을 믿고,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이삭은 장래에 일어날 일을 바라보며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고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결국 이집트에서 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뼈를 가져가라고 유언을 해 놓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의 신분과 부귀영화를 버린 것은 영원한 나라에게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9절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렇게 해보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홍해도 마른 땅처럼 건너지만 믿음이 없었던 이집트 군대는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믿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와 상급을 믿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던 것입니다. 

유난히 다른 사람의 말이나 평가에 예민한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 뭐라고 말만 하면, 신경을 쓰고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주변의 말에 너무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사모님이 어느 날 남편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목사님, 목사님은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신경을 덜 쓰십니까?”목사님은 사모님의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 목회 위기를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농담거리로 여깁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말 표현에 강조하느라 사용하는 ‘너무’라는 표현은 엄밀하게 말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답니다. ‘너무 좋다’는 말은 정확한 의미로는 ‘안 좋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너무 바쁘다.
살다 보면 바쁠 수 있지만 어느 정도면 너무 바쁜 것입니까?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기도도 못하고 주님 바라보는 일기도 못 쓸 정도로 바쁜 것이 너무 바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라 시간에 지배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영이 지배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바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먼저 예배하고 기도하고 영성일기를 쓰면 내가 시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
살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이면 너무 어려운 것입니까?
십일조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다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돈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마귀가 돈을 가지고 나를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재정적인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재정적으로 어렵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먼저 십일조하고 감사하고 나누어주면 내가 돈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난다.
화가 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너무 화가 나는 경우는 죄가 됩니다. 하루가 지나도 분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도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용서를 선포하고 오히려 기도하면 내가 화를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죽지 않으려는 우리 자아가 문제이지 복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대원 과정 수료식 때 한 전도사님은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자기 안에 죽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정말 죽게 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런 마음이었기에 그 전도사님의 간증에 공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정말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산다는 것은 한 번 결단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강한 체험을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도 사용하지 않으니 믿음으로 사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라고 했는데,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다루려면 익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이 선 검일수록 두렵습니다.

지난 금요일은 세계적으로‘12월 21일 종말론'이 극성이었던 날이었습니다.
고대 마야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 끝난다고 해서 전 세계에 급속히 퍼진 종말론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으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저도 당시를 생각해 보면 믿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변에서 종말에 대한 예언이 쏟아졌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동시 다발적인 경우, 도저히 헛소리할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렇게 말할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성경적인 근거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 같지만 도저히 종말이 온다고 선언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준비하고 살아야 하겠다는 정도로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이 다 한 길을 갈 때, 믿음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을 자신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도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어가게 하지 않으시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는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연단이구나!’ 생각하시는 분, 믿음이 달라지셨습니까? 고생만 하셨습니까?
연단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눈에 보이듯 바라보아지는 믿음을 가졌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졸업을 할 것 아닙니까? 광야에서 연단만 받다가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살 것입니까?

선교단체 사역자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짐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자들이 전 세계로 급속히 나아갈 수 있는 비결임을 알았습니다. 예수전도단 창시자인 로렌 커닝헴은“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일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재하심을 매 순간 확신케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실험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남은 세월 가장 가치있게 사는 길입니다.
자신도 가족도 이웃도 다 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허드슨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중국내지선교회’의 창설자)가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쳤을 때, 당시 영국의 어떤 선교단체도 그룰 중국으로 파송해 주지 않았습니다. 실망했지만 허드슨테일러는 조지뮬러 목사님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죠지뮬러의 기도 웅답으로 그의 고아원을 돌보셨음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물러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던 중‘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 선교사로 부르셨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죠지뮬러 목사님은 어떻게 그런 믿음으로 살았을까요? 
목회하면서 교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상황에서 주일에도 돈 벌려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더 이상 설교로는 믿음을 가르칠 수 없어서 친히 기도만으로 고아들을 먹이고 입힐 결단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믿음의 증인]이 없다면 여러분이 그 첫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믿음의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오직 믿음 하나로 1960년대 강원도 산골짜기에 예수원이라는 중보기도 공동체를 세운 대천덕 신부의 자서전을 읽다가‘너도 교회를 믿음의 실험실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교지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오직 믿음 하나만 가지고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선교사님이 안쓰럽게 생각하는데 ‘너도 선교사다!’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청빙을 받던 달에는“주님의 손을 잡고 물 위를 걸으라”를 주제로 특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 부임해 와서 젊은이교회를 창립하고 청년들이 오직 하나님이 먹여 주고 재워주실 것을 믿고 거지순례 전도를 다녀오는 날, 청년들을 맞이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도 거지순례 전도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돈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았는데, 가진 재산을 0으로 만들고 헌신하며 사는 순회선교단 사역자들을 보면서 돈 없어도 오직 하나님을 믿고 얼마든지 살고 사역할 수 있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 건축과 건축비 상환과 지금 교회의 모든 사역이 믿음의 실험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고 건축 빚 214억 원은 줄어줄 기미가 없는데, 그해 추수감사헌금, 예산에 크게 미달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건축 부채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교인들은 벌써 17년째 건축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도 중에 주님은 ‘헌금을 드리고 싶은 사람의 헌금만 받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교인의 수를 세고 세지 말아라! 나만 바라보아라!”

2009년 2월 22일 특별기도회, 1,000명 교인들이 모이고 80억 원 이상의 헌금이 작정되었습니다, 본당 건축헌금 당시 32억 원이었으니 그보다 3배 가까운 작정액, 그해 부채가 177억으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증인 대열에 서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기준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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